10월, 2018의 게시물 표시

사랑의 대가를 지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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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합리해도 순종하라 >  하나님은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이 변함없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려고 호세아에게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고멜을 사랑하라고 하셨다(1절). 호세아를 떠난 고멜의 모습을 통해 여호와를 떠나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에 대한 묘사를 한 것이지만 그래도 음란을 이기지 못해 창녀가 된 아내를 사랑하라는 명령은 너무 가혹하다. 불쌍하니까 받아주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라는 명령이기에 불합리한 명령이지만 호세아는 순종했다. 그것이 믿음이다. 믿음이란 내 생각과 감정대로 믿는 것이 아니다.  교부 터툴리안이 말했다. “나는 불합리하기에 믿는다.” 이성적으로 타당한 것은 공부 대상이지 믿음 대상이 아니다. 이해되기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평범한 것이다. 이해되지 않아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이다. 100세에 낳은 아들을 바치라는 명령이나 홍해 바다로 뛰어들라는 명령은 불합리하지만 불합리해도 순종하는 믿음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왜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제자가 될 수 있었는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그가 말했다. “선생님! 우리가 밤새 수고를 해도 얻은 것이 없지만 말씀에 의지해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그는 밤새 수고하는 끈기와 뚝심과 열정이 있었다. 고기가 잘 잡히면 밤을 새워도 재미있지만 밤새 피라미 한 마리 안 잡힐 때 밤을 새우는 것은 힘든 일이다. 베드로는 자기 일에 미칠 줄 아는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한번 시작한 일은 뿌리를 뽑는 근성이 있었다. 그런 근성을 배우라. 고지가 바로 저긴데 여기서 포기하지 말라. 하나님은 맡겨진 일에 생명을 내걸고 끈기와 열정과 뚝심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을 찾는다. 그런 사람이 대개 문제를 딛고 승리하지만 끈기와 열정과 뚝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에 순종하려는 태도다. 베드로처럼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라고 하라.  밤새 소득이 없는 상태에서 맞이한 그날 아침 베드로는 기분 ...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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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망의 문을 열어주신다  하나님은 아골 골짜기를 소망의 문으로 삼아주신다(14-15절).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아가면 절망도 희망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 현실은 어두워도 아골 골짜기를 소망의 문으로 삼아주시는 하나님을 만나면 내면이 빛나게 된다. 그때 어떤 시련과 상처도 극복할 수 있다. 믿음의 능력은 세상 권력보다 큰 힘이다. 가난한 사람보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 더 불쌍한 사람이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한과 상처와 절망을 이겨내어 어둠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  믿음은 희망을 낳는다. 희망(希望)에서 ‘희(希)’는 ‘희망한다’는 뜻도 있지만 ‘희박하다’는 뜻도 있다. 희망은 가능성이 희박한 상황에서 가능성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 가능성의 원천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래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절망하지 않는다. 고통 중에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동행은 큰 힘이 된다. 사랑의 하나님과의 동행은 더욱 큰 힘이 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축복의 지렛대이고 인생의 버팀목이다. 하나님 안에서는 아골 골짜기가 소망의 문으로 변한다. 2. 남편이 되어주신다  회복의 때에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에 다시 빠지지 않고 하나님을 내 남편이라 일컬을 정도로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새롭게 한다(16절). 그때 하나님은 바알들의 이름을 그의 입에서 제거해 다시는 그의 이름을 기억해 부르지 않게 하신다(17절).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신랑이 되어주신다(19-20절). 그 말씀처럼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표현된 말씀은 거의 없다. 특히 ‘장가든다’는 말씀을 세 번 반복해서 표현한 것은 이스라엘을 회복시켜주시려는 하나님의 간절한 열망을 잘 나타낸다.  하나님은 장가 들어주시면서 영원한 삶, 공의, 정의, 은총, 긍휼히 여김, 진실함 등의 수많은 선물을 약속하신다. 엄청난 결혼 지참금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축복만 바라보지 말라. 눈에 보이지 않게 주시는 축복이 훨씬 크고 많다. 조금 어렵다고 신랑을 향한 마음이 흔들...

행복한 성도가 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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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길이 참고 기다리라  본문에는 인내와 관련된 단어가 5번 나온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왜 현대인의 행복지수가 낮은가? 인내의 부족 때문이다. 너무 조급해하거나 너무 서두르면 행복을 음미할 틈이 없다. 여행할 때 가이드 설명을 중간에 끓어 질문하고, 식당에서 재촉해서 나온 음식을 금방 먹고, 비행기가 도착하면 바로 안전벨트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은 한국인이란 말이 있다. 그런 조급한 습성이 행복지수를 낮추는 주요 원인이다.  교회생활의 행복지수가 낮다면 그것도 인내 부족과 관련이 깊다. 설교가 조금만 길어져도 짜증내고 기도 응답이 빨리 없다고 금방 기도에 회의를 품고 포기하면 어떻게 깊은 은혜가 주어지겠는가? 추수 때까지 기다리는 농부처럼 길이 참고 기다릴 줄 알라(7절). 신실한 믿음은 인내하는 삶과 비례한다. 기도 응답이 더뎌도 인내하고 사랑과 전도의 열매가 적어도 인내하라. 믿음의 인내는 어떤 능력보다 소중한 능력이다.  교부 크리소스톰은 인내를 이렇게 정의했다. “인내란 복수할 힘이 있어도 자제하는 마음이다.” 부부싸움에서 굳이 승패를 나누면 누가 이긴 것인가? 소리를 작게 내고 참은 쪽이 이긴 것이다. 웃음까지 머금으면 더 이긴 것이다. 마음에 섭섭함이 없이 미안한 마음까지 가지면 완전히 이긴 것이다. 참고 인내하는 태도가 나의 강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인내는 쉽지 않지만 인내하고 기다리면 반드시 하나님의 넘치는 보상의 열매가 주어진다.  성공한 사람 중에 재주나 능력보다 탁월한 인내 때문에 성공한 사람이 많다. 자본과 인맥과 재능이 부족해도 인내심이 탁월하면 성공 가능성도 커진다. 인간관계도 늘 좋을 수 없기에 어려울 때를 대비해 인내를 훈련하라. 왜 하나님은 불의한 세상을 당장 심판하지 않는가? 한 명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서다. 기도 응답도 당장 하실 수 있지만 내 안에 거룩한 성품과 성숙한 믿음을 심으면서 가장 적합한 때에 응답하려고 기다리시는 것이다. 속성 코스로 은...

최고로 사랑받는 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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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베드로의 사랑을 받기 원해서 물으신 것이 아니었다. 사람이 “당신 나를 사랑해?”하는 것은 더 사랑받기 위해서 묻는 것이지만 예수님의 질문에는 전혀 다른 뜻이 있다. 그것은 “네가 나를 사랑해야 사는 길이 열리고 능력과 지혜도 생긴다. 너는 나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뜻이다. 나는 주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이다. 그 사실을 아는 것은 큰 힘과 위로를 준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더욱 큰 힘을 준다. 사랑에 관심이 많아도 실제로 사랑하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의 축복과 은혜는 없다.  삶에 진정한 능력과 축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신뢰가 가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교인 중에 못된 사람도 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확실히 다르다. 어거스틴이 말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든지 하십시오.”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믿음이 간다.  누군가 가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해도 한 가지만 있으면 신뢰를 접지 않는다. 그 한 가지란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냐?”는 것이다. 성경을 보면 사도 바울은 고집이 있었고 그의 서신을 보면 마음을 칼로 베는 듯한 상처 주는 말들도 엄청나게 많다. 심지어는 실명까지 거론하며 책망한다. 그래도 그에게 “무식한 놈! 교양 없는 놈!”이라고 하지 않는다.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심을 가지고 그 말을 했기 때문이다.  언어도 부족하고, 도덕도 부족하고 행실도 부족하고 일하는 것도 부족해서 자신이 너무 한심한 생각이 들 때도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면 그런 대로 살아갈 용기가 난다. 부족한 것이 많아도 한 가지만 있으면 다 용납되는 용서의 마스터키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본문 말씀대로 예수님을 내가 가장 좋아하고 아끼는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사랑하고 지금보다 조금 더 사랑하면 주님으로부터 최고로 사랑받는 성도가 될 수 있다....

첫 사랑을 회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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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리는 밥에서 나온다 >  예수님은 믿음을 배반한 제자들에게 어떤 말씀을 하고 싶었지만 밥 먹기 전에 하지 않고 먼저 따뜻한 사랑의 식탁을 만들어 밥을 잘 먹인 후에 하셨다. 예수님은 밥 먹이는 것을 매우 중시했다. 벳새다 광야에서도 말씀만 주지 않고 배고픈 군중들에게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배도 채워주셨다. 주기도문을 보면 주님은 가장 먼저 찬양 기도를 가르쳐주셨다. 그 다음으로 구하는 기도를 가르치실 때 ‘죄 사함을 구하는 기도’보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먼저 하게 하셨다. 그처럼 ‘밥 먹이는 것’을 귀하게 보셨다.  밥을 나눠주는 것은 무엇보다 귀한 것이다. 사람들이 “진지 드세요.”라고 할 때 ‘진지’란 ‘어른들이 드시는 밥’을 높이는 말인데 그 말은 ‘참된 지혜’를 뜻하는 ‘진지(眞智)’라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렇다면 조상들은 “진리는 밥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실제로 요새 많은 싸움이 진리 싸움보다는 밥그릇 싸움이다. 반면에 밥을 나누려고 하면 지혜도 생기고 외적인 평화와 내적인 평안도 주어진다.  예수님은 “내가 생명의 떡이니”라고 하셨다(요 6:38). 그 말씀에서 떡은 ‘매일 먹는 밥’으로 표현해야 더 정확하다. 예수님이 “나는 생명의 밥이니”라고 하신 이유는 우리의 밥이 되어주고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였다. 밥을 나눠주는 삶에 진리가 있고 축복이 있다. 세상에서 제일 복이 없는 사람은 밥그릇을 빼앗으려는 사람이다. 두 번째로 복이 없는 사람은 내 밥그릇만 챙기는 사람이다. 진짜 복된 사람은 밥을 나눠주는 사람이다. 그 중에서도 제일 복된 사람은 자기가 밥이 되어주고 ‘거룩한 일을 위해 따돌림까지 감수하는 사람’이다.  축복을 원하면 어려운 사람에게 따뜻한 사랑과 밥을 나눠주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라. 선교란 ‘주님의 사랑과 밥을 나눠주는 것’이다. 참된 믿음은 선교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게 한다. 선교사들은 나를 대신해 전방에 나가 영적 전쟁을 하고 있다....

패배의식을 버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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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번에 성자가 되지 않는다 >  요한복음 21장의 장면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었다(14절).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처음 나타나셨을 때는 도마가 없는 상황에서 모든 제자들이 모였을 때였고(요 20:19-23), 그 일주일 후에는 도마를 포함한 다른 제자들이 있을 때 나타나셨다(요 20:26-29). 그 다음으로 본문에 나타나셨기에 전체적으로는 세 번 이상 나타나셨지만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만은 본문의 장면이 세 번째였다. 예수님이 계속 나타나신 것은 예수님과의 지속적인 만남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사람은 한 번의 체험으로 성자가 되지 않는다. 대도(大盜) 조세형도 주님을 만나 변화되었다고 한때 수많은 교회로 간증 집회를 다녔다. 어느 날 그가 일본에 가서 좀도둑질을 하다가 잡혔다. 그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내 귀를 의심했다. “아! 이건 현실이 아니야! 일본 경찰이 사람을 잘못 본 거야!” 그날 하루 종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 잡힌 사람이 조세형 씨가 아니길 간절히 원했지만 사실이었다.  폭력계의 대부라던 조양은도 한때 주님을 만났다. 그가 변화되어 출소한 후 큰 교회에서 목회자의 주례 하에 성대한 결혼식도 올렸다. 그 결혼식 장면을 뉴스에서 보고 또한 그의 간증과 사랑 이야기를 신문과 잡지를 통해 보며 필자도 그 가정이 행복하게 살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그도 얼마 후에 또 감옥에 갔다. 그 소식도 믿고 싶지 않았지만 현실이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한번 혹은 몇 번으로 끝나면 안 된다.  예수님과 숙식을 함께 하며 3년간 제자훈련을 받았던 직계 제자들도 계속적인 만남이 필요해서 예수님이 계속 나타나셨다면 우리와 같은 존재에게 주님과의 지속적인 만남이 있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은 세 번의 만남 이후에도 계속 나타나실 것이다. 그 만남이 없으면 어느새 또 넘어진다. 그 인간의 연약함을 알고 계속 만나주려고 주님은 40일 동안 이 땅에 계시며 ...

그래도 사는 길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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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회사원이 있었다. 그는 대기업에서 승승장구하다 54세에 IMF를 맞아 직장에서 퇴출당했다. 그때 가족들에게 말했다. “이제야 속이 후련하다. 내가 지금까지 오랫동안 회사에 매여 가족과 좋은 시간도 못 가졌고 취미생활도 못했는데 이제는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도 많아지고 취미생활도 할 수 있어 잘 됐다.” 가족들은 정말 그런 줄 알았다. 실제로 그는 처음엔 여행도 가고 가족과 함께 외식도 했다. 그러나 3개월쯤 후부터 완전히 말을 잃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3개월 내내 자살을 생각했다. 그때 쉽게 죽지 못한 이유는 가족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죽을 방법을 찾지 못한 것이 유일한 이유였다. 그의 54회 생일에 가족은 아빠에게 힘을 주자고 했다. 그날 네 식구가 조용한 찻집에 가서 아내가 먼저 말했다. “여보! 당신 54회 생일에 우리가 특별 선물을 준비했어요.” 그리고 봉투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 종이에는 그 동안 남편에게 고마웠던 일, 남편이 자랑스러웠던 일 54개가 적혀 있었다. 그 내용을 다 읽고 아내가 말했다. “당신은 내게 주신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이었어요.”  곧 이어 대학생 딸이 아빠에게 고마웠던 54가지 일을 다 읽고 말했다. “저는 저를 이만큼 키워주신 아빠가 너무 자랑스러워요.” 아빠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계속해서 고등학생 아들이 아빠에게 고마웠던 54가지 일을 다 읽고 말했다. “아빠는 우리 가정의 보석과 같은 분이예요.” 결국 아빠가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날 그는 일어섰다. 자존심이 무너지며 다 무너졌는데 자기에게는 아직 소중한 가족이 있음을 깨닫고 더 이상 무너지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 후 그는 다시 든든한 남편과 아빠의 모습을 되찾고 작은 행복의 조건에 감사하며 열심히 살았다.  가끔 좌절감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이 언뜻 생각날 때가 있다. 누구에게나 그런 힘든 때가 있다. 그래도 사는 길은 있다. 그래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값진 진주로 보신다. 하나님은 나를 사려고 ‘...

치유의 은혜를 입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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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에게 병은 유익한 점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병이 계속 있기를 바랄 필요는 없다. 병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면서 동시에 병 낫기를 소원해야 한다. 치유의 은혜를 입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의학의 힘을 빌리라  야고보는 병들면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고 그들이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했다(14절). 고대에는 종교인이 사람을 돌보면서 의학적이고 경험적인 지식으로 부분적인 의료 활동도 했기에 장로들에게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라고 했다. 병자에게 기름을 바르는 것은 고대에 흔한 치료법으로서 ‘의식적 수단’이 아닌 ‘의술적 수단’이다. 즉 기름을 바르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현대적 의미로는 병원도 가고 연고도 바르고 약도 먹으면서 기도하라는 뜻이다. 저는 “기름을 바르며”란 표현이 의학적인 의미임을 최근에 깊이 체험했다.  저는 30세쯤에 발가락 피부가 벗겨졌다. 그것이 습진성 무좀인 줄 알았다. 40세쯤에는 발바닥과 발등 뒷부분에서 복숭아뼈까지 피부의 보풀이 오르고 벗겨지면서 늙은 코끼리 피부처럼 변했다. 그때 의아하게 생각했다. “어떻게 무좀이 발등까지 생기지?” 그 증상이 심해져서 50세쯤에는 발톱이 삭고 발톱 주변의 피부까지 썩은 것처럼 가무잡잡하게 변했고 새끼발가락 발톱은 거의 삭아서 심한 발톱 무좀까지 생긴 줄 알았다. 그렇게 25년을 발 증상으로 고생했다.  아무리 강한 독성의 약물을 발라도 소용없어서 영원히 그 증상이 계속될 줄 알았다. 아토피 증상처럼 피부가 가려우니까 어떤 때는 심하게 긁었고 발가락을 비틀기도 했고 가끔은 신경 쓰여서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가 몇 년 전에 갑자기 청소년 때 화장이 싫다고 얼굴에 로션을 바르지 않아 얼굴 피부가 일어 까칠해지고 여드름까지 생겼다가 크림을 바르면서 얼굴 피부가 정상이 된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발을 씻은 후 발가락 사이와 발등 뒷부분과 발톱까지 크림을 바르자 몇 주 만에 발이 깨끗해졌다.  크림을 바르면서 지금...

성령의 바람은 임의로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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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의 호흡 >  예수님은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기 전에 제자들을 향해서 “휴!” 하고 숨을 내쉬는 특이한 모습을 보이셨다. 왜 그렇게 하셨는가? 첫째, 성령충만을 위한 실물교육을 하려는 의도도 있으셨을 것이다. 숨을 내쉴 때 육신적 삶을 내뿜고 숨을 들이마실 때 영적 삶을 받아들인다는 의식 훈련은 꽤 유용하다. 실제적으로 인류의 스승이라 일컬어지는 많은 인물들이 몸과 마음을 가다듬을 때 호흡자세부터 가다듬는 경우가 많았다. 무술 수련생이 단전호흡을 통해 호흡훈련부터 시작하는 이유는 그만큼 호흡 훈련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기도할 때나 묵상할 때 성령의 삶을 생각하며 숨을 들이마시고 육신의 삶을 생각하며 숨을 내뿜는 훈련을 하면서 이렇게 고백해보라. “하나님! 제 호흡은 당신의 것입니다. 호흡할 때마다 제 안에 들어오소서. 숨을 내뿜을 때 제 힘과 약점을 다 내보내고 숨을 들이마실 때 당신의 놀라운 힘이 제게 들어오게 하소서.” 그런 훈련 때문에 갑자기 큰 능력이 생기지는 않아도 삶을 대하는 자세가 많이 달라지고 성령님이 주는 마음의 평안 가능성도 높일 수 있다.  둘째, 성령은 예수님의 영인데 예수님은 호흡이란 상징적 행위를 통해 자신의 생명력이 넘치는 영을 낙심에 빠진 제자들에게 불어넣으시려 했을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을 떠나서는 성령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이다. 불신자에게도 성령 받을 때 생기는 현상과 은사는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다. 요새 성령의 역사를 임의로 만들어내려는 경우도 있기에 특이한 행동이나 모습이나 선전이 있을수록 잘 분별하라.  가끔 보면 가식이나 과장과 쇼맨십을 보여주고 심지어는 거짓된 모습으로 성령충만을 준다고 하는 교주가 있다. 그런 교주에게 거짓에 미혹되는 것에는 자기 책임도 있다. 진실한 것보다 화려한 것을 좋아하고 가시적인 화려한 외적 현상을 성령이 임한 증거로 생각하는 것이 문제다. 그러나 특이한 모습일수록 잘 분별하라. 가식과 과장과 쇼맨...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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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철저히 포기하라  성령의 인도를 받기 위해 기초적으로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훈련된 영적 감각을 갖추는 것이다. 그 영적 감각은 성경을 가까이할수록 좋아진다. 특히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려면 자아를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자아를 포기할 때 성령님은 더욱 세심하게 그의 앞날을 인도하신다.  ‘자아의 포기’는 ‘욕심의 포기’와 같은 말이다.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했다. 두 가지 선택의 길이 있을 때 선한 길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잘 안 찾고 인기가 없는 길은 대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다. 특히 역풍이 불고 내가 간절히 원하는 길이 다 막혀서 하나님의 길을 이해할 수 없을 때 더욱 자아를 포기하라. 그때 위대한 인물의 길로 들어서는 중요한 전기를 맞이한다.  어느 날 부유한 포목상 아들인 프랜시스가 “내 교회를 새롭게 하라.”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가진 돈을 교회 수리에 다 썼다. 아버지는 아들이 돈을 분별없이 쓰는 것으로 여기고 주교 앞으로 데려가 부자관계의 청산을 선언했다. 돈을 되찾고도 싶고 아들에게 경각심도 주기 위해서였다. 그때 아들이 갑자기 입은 옷을 벗어 아버지 발 앞에 내려놓자 주교가 자기 망토를 벗어 프란체스코의 알몸을 덮어주었다. 그때 프랜시스는 알몸이 되면서 옛 세상과 단절하고 성자의 길로 들어섰다. 자기 포기는 위대한 인물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핵심 요소다. 2. 철저히 순종하라  자아를 포기한 후에는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해야 한다. 최선의 순종이 없으면 성령님의 인도는 의미가 없게 된다. 성경을 관통하는 가장 분명한 메시지는 “순종이 있을 때 축복이 있다.”는 것이다. 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었는가? 순종하기 어려울 때 순종했기 때문이다. 현대인에게 왜 기적적인 믿음의 역사가 적은가?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는 믿음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현대인을 가장 순종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돈이다.  서양 속담에 “돈이 말한다(Mone...

나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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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학생이 사춘기 때부터 이성에 대해 눈을 떴다. 이성의 관심을 받고 싶은 마음이 점점 강해졌는데 외모가 떨어져 이성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결국 그는 외모를 포기하고 싸움 기술을 길러 동급 남학생들을 힘으로 무릎 꿇렸다. 또한 또 다른 힘의 표식인 폭넓은 친구관계를 쌓았다. 힘 있는 친구가 얼마나 많으냐가 힘의 표식이기에 그도 힘 있고 싸움을 잘하는 친구를 많이 사귀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런 친구 관계는 다 끊어졌다.  점점 성숙해지면서 그는 ‘삶의 넓이’보다 ‘삶의 깊이’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삶뿐만 아니라 신앙에서도 ‘넓이’보다 ‘깊이’가 중요하다. 성숙이란 ‘넓이’보다 ‘깊이’가 중요함을 아는 것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예수님 말씀은 ‘넓은 삶’보다 ‘깊은 삶’을 도전하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성령으로 다시 오신 것도 ‘깊은 삶’과 더불어 ‘깊은 위로’를 주시려는 깊은 뜻이 있다.  예수님의 사역과 성령님의 사역은 결국은 같아도 굳이 차이를 둔다면 예수님의 사역은 구원의 길을 열어주는 선교사 사역이고 성령님의 사역은 위로와 평안과 능력을 주시려는 목회자 사역이다. 예수님은 보혜사 성령으로 다시 오셔서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 불안에 떨던 제자들을 위로하셨다. 성령님의 임재는 하나님 아버지가 성도 안에 임재하시고 거하시는 것과 같은 것이지만 아직도 많은 성도가 하나님 아버지의 현존을 인식하지 못하고 고아처럼 행동할 때가 많다.  가끔 큰 문제를 만나고 삶이 힘들면 고아처럼 버려진 느낌이 든다. 그런 약한 감정에 빠지지 말라.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성령충만한 삶으로 나를 부르시고 성령의 임재를 통해 상상을 초월한 은혜를 주려고 내 앞에서 기다리고 계신다. 살면서 힘들고 피곤할 때 가장 필요한 것은 누군가의 위로와 격려다. 문제는 참된 위로자가 별로 없다는 현실이고 그 현실이 더 사람을 낙담시킨다. 자기도 약한데 남을 어떻게 위로하는가?  이웃을 내...

예수님의 3가지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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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도를 들어주시겠다는 약속  예수님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고 하셨다(14절). 진실한 기도는 평범한 사람도 위대한 능력자로 만든다. 엘리야가 기적의 선지자가 된 비결은 특별한 능력과 성정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도 실수했고 낙심했고 방황했다. 그래도 기적의 선지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간절한 믿음의 기도 때문이었다(약 5:17). 간절한 기도는 환경을 변화시키고 더 나아가 나를 변화시킨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끝내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을 구하고 예수님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라는 뜻이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억울합니다. 복수해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 기도에는 응답이 없다. 그래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다 응답하신다고 했잖아요.”라고 항의할 수 없다. 그것은 예수님의 이름만 빌려 기도한 것이지 예수님의 뜻과 반대되는 것을 구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복권을 산 후 기도했다. “하나님! 복권에 당첨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 기도도 응답이 안 된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원리를 모르면 예수님의 기도에 관한 말씀이 부도가 잘 난다고 여긴다. 예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과 원리에 합당한 기도를 드려야 하기에 예수님을 사랑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기도응답의 필수조건이다(21절). 기도할 때 예수님의 이름에 합당한 것을 구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그 기도는 능력 있는 기도가 되어 하나님을 일하시게 만든다. 2.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  예수님은 떠나시면서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고 하셨다(16절). 만약 예수님의 뒤를 이어 성령님이 오지 않았다면 영혼의 위로자와 상담자인 보혜사도 없었을 것이고 참된 위로도 사라지면서 수많은 축복을 상실했을...

감사하는 믿음을 가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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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사하는 믿음을 가지라 >  며칠 전 미국 역사상 3번째로 강력했던 허리케인 마이클이 미국 남부를 휩쓸어 하루 종일 재난 방송을 했다. 다음 날 리포터가 태풍으로 폐허가 된 4층 건물 소유주와 인터뷰를 했다.  그는 무너진 건물 잔해를 가리키며 “너무 태풍이 강력해서 어쩔 수 없지요. 다시 일어서야지요.”라고 하면서 전혀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무엇인가 믿는 구석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도에게도 믿는 구석이 있다. ‘믿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 바로 믿는 구석이다. 믿음을 언어와 표정과 행동으로 보여주면서 고난 중에도 감사를 잃지 않으면 하나님은 놀라운 반전의 역사를 허락하신다. 감사하는 삶의 축복은 생각 이상으로 크다. 감사는 인간관계를 견고하게 만들고 삶과 사람과 사물과 사건도 아름답게 보이게 만든다. 감사가 넘치면 사고와 가치관이 긍정적으로 변하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도 커진다. 나쁜 일이 있어도 너무 실망하지 말고 감사하고 좋은 일이 있어도 너무 좋아하지 말고 감사하라.  좋은 환경에서도 욕구불만이 생길 수 있다. 경기에 이기거나 무엇을 가져서 크게 기뻤어도 며칠 지나면 다시 보통의 삶이 된다. 하나님은 사람을 천하보다 귀하게 창조하셨기에 천하의 것만으로는 용량이 너무 큰 영혼 탱크를 채울 수 없다. 가장 어리석은 일은 세상 것으로 영혼을 채워 만족시키려는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가난한 심령이란 감사가 넘치는 심령이다. 감사하면 하나님은 더 감사거리를 주신다.  약점 때문에 콤플렉스에 빠지지 말라. 내가 우습게 보인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실제로 남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때가 많다. 내 약점을 너무 확대해서 보거나 확대해서 생각하지 말라. 내 장점을 보는 눈을 길러야 습관이 되어 남의 장점도 보는 눈이 길러지면서 매력적인 캐릭터가 된다. 하나님은 나의 복된 운명을 위해 내게 가장 알맞은 것을 주셨음을 믿고 감사하라. 감사는 ...

의의 말씀을 경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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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과 관련된 성령님의 역할 >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다. 성경을 보고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은 성령님의 도움 때문이다. 우주는 하나님 말씀으로 충만하다. 귀를 기울이면 수많은 하나님의 음성을 접할 수 있다. 글과 그림에는 작가의 의도가 담겨있듯이 하나님의 창조물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담겨있다. 그 음성 중에 지상 최대의 음성이 성경이다. 성령님은 말씀과 모순된 입장을 취하지 않기에 성령충만한 사람들은 늘 성경 말씀의 권위를 절대적으로 존중하며 성경의 원리와 가르침을 철저히 따른다. 성경과 관련된 성령님의 역할은 무엇인가?  첫째, 성경 말씀에 대한 해석을 준다. 빛을 보려면 빛을 볼 수 있는 시각기관이 있어야 한다. 눈이란 시각기관이 없으면 빛은 있어도 없는 것과 같다. 그처럼 말씀을 깨달으려면 말씀을 깨달을 수 있는 영적 시각기관이 있어야 한다. 그 영적 시각기관 역할을 하는 분이 성령님이다. 누가 말씀을 가장 잘 해석할 수 있는가? 말씀을 주신 분이다. 성령님은 말씀을 그림처럼 생생하고 실제적으로 만든다. 성령님은 말씀에 대한 가장 위대한 주석과도 같다.  둘째, 말씀을 통해 용기와 희망을 준다. 성령님은 말씀을 통해 마음눈을 밝게 해주셔서 우리의 부름의 소망이 무엇인지, 예수 안에서 받아 누려야 할 기업의 영광과 풍성함이 무엇인지, 우리를 위한 주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알려준다(엡 1:17-19). 그처럼 계시의 성령이 찾아오면 마음의 눈이 열려 미래에 대한 넘치는 소망이 있게 되고, 시련 중에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며 범사에 감사하게 된다.  셋째, 말씀을 잘 적용하도록 도와준다. 말씀의 실제적 적용을 위해 2가지가 필요하다. ‘말씀을 기억하는 머리’와 ‘말씀을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이 2가지를 얻으려면 성령님이 도와주셔야 한다. 성령님은 필요한 때 필요한 말씀을 기억나게 한다. 선택의 때는 ‘인도하는 빛’으로 말씀을 기억나게 하고 유혹의 때는 ‘방어하는 칼’로 말씀을...

믿음이 가져다주는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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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주님을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과 권세와 관련해 2가지 중요한 교훈을 준다. 첫째, 체험보다 믿음이 중요하다는 교훈이다. 어떤 체험을 하면 믿음이 견고해질 것 같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체험이 주는 감격은 지속성이 짧다. 하나님은 감정을 따라 왔다 갔다 하는 체험 중심적인 신앙을 별로 기뻐하지 않는다. 체험 중심적인 신앙은 외적인 것에 관심이 많기에 미혹되기도 쉽다. 체험 중심적인 신앙에 너무 치우치지 말라. 신비한 체험이 없어도 구원받은 성도는 이미 보이지 않은 많은 기적을 체험한 존재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하나님을 직접 뵈면 얼마나 믿음이 강해지고 하나님을 깊이 사랑할까?” 그러나 체험이 믿음을 온전하게 한다는 생각은 환상이다. 예수님을 직접 만난 사람도 소수만이 믿음을 가졌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제자훈련을 철저히 받은 12제자 중에도 1명이 배반했고 본문에서 빌립은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굳게 신뢰하며 작은 일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삶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십자가가 최고의 능력이라는 교훈이다. 본문 12절을 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이 말씀을 체험 중심적인 교주는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보다 더 놀라운 기적적인 능력을 행할 수 있다.”고 곡해한다. 과연 그런 말씀인가? 상식적으로도 말이 되지 않는 얘기다. 어떻게 전능하신 예수님보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가 더욱 큰 기적적인 능력을 행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이 말씀은 무슨 말씀인가?  본문 12절에서 ‘그보다’란 말은 문맥에 의하면 ‘내가 하는 일보다’라는 뜻이다. 그때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시려고 했는가? 십자가를 지시려고 했다. 결국 본문 12절에 나오는 ‘내가 하는 일’은 ‘신기한 기적적인 능력’을 ...

근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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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님을 믿는 믿음 때문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러 가는 상황에서 제자들은 그 상황을 느끼고 불안에 싸여 있었다. 그때 주님은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다(1절). 근심과 믿음은 반비례한다. 믿음이 작아지면 근심은 커지고 믿음이 커지면 근심은 작아진다. 믿음은 큰 힘을 준다. 자신을 믿는 신념도 큰 힘이 되는데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얼마나 큰 힘이 되겠는가? 믿음은 소유나 학력이나 재주나 인간관계나 성공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누가 성공했다고 하지만 하나의 성공이 열 가지 근심을 만들 때도 많다.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소유가 많으면 행복할 줄 안다. 그러나 감옥보다 별장에서 자살하는 사람이 더 많다. 물질에 집착하면 삶의 본질과 핵심을 잃는다. 소유가 적을 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순박하고 순수한 모습을 통해 오히려 믿음도 쑥쑥 잘 자랐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밥술 좀 먹고 돈을 좀 만지는 민족이 되니까 타락하고 교만하고 믿음이 잘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소유 자체를 정죄하지 말라. 문제는 소유가 많은 것이 아니라 드림과 나눔과 베풂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소유가 많아질수록 근심과 불행지수도 더 높아진 것이다.  요새 영성(靈性)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영성(靈性)이 무엇인가? 예언하고, 방언을 하고, 영서(靈書)를 쓰는 것이 영성의 표시인가? 그런 영성에는 자기 과시가 느껴진다. 진짜 영성(靈性)은 영(零)이라는 숫자의 영성(零性)이다. 자신을 제로(zero)로 알고 주님을 전폭적으로 믿고 사는 것이 진짜 영성이다. 살면서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잘 되고 잘못되고 하는 것’도 큰 문제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다. 2. 미래는 보장되었기 때문  예수님은 천국에서 우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고 계신다(2절). 그 생각이 머리에 확고히 자리 잡으면 마음의 모든 근심은 사라질 것이다. 한 의료 보고서에 의하면 낮의 해가 짧아질수록...

죽는 길이 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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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 네이버 포스트 "흔적 생명, 영적 생명 / 제씨 펜 주이스 "십자가의 도" ] < 자기의 부족함을 인정하라 >  이틀 전 남양주 수락산에서 55세 여성이 산악회원들과 정상에서 하강하던 중 등반용 안전벨트에 걸었던 로프를 풀었다. 그때 동료들은 무모한 행동을 하지 말라고 소리쳤지만 그녀는 줄도 없이 맨몸으로 50cm 옆 바윗길로 발을 내딛었다가 실족해 30m 아래로 추락해 숨졌다. 그녀는 8년 경력의 클라이머로 평소 등반기구 없이 맨몸으로 바위를 오르는 볼더링(bouldering)을 즐겼는데 지나친 자기 과신이 화를 불렀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운동능력, 인지능력, 기억력, 판단력이 점차 떨어진다. 문제는 긴 세월에 걸쳐서 조금씩 떨어지기에 자신의 능력 저하를 잘 체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자기 몸을 너무 믿지 말라. 쉽게 할 것 같은 일도 막상 해보면 몸이 말을 잘 안 듣는다. 한 아빠는 딸 운동회 때 옛날 실력을 믿고 학부모 달리기에서 1등 하려고 사력을 다해 뛰었는데 생각대로 몸이 안 움직여 답답하고 창피했다고 했다. 사람의 능력은 40대와 50대가 크게 다르고, 50대와 60대가 크게 다르고, 60대와 70대가 크게 다르다.  어르신들이 가끔 “내 몸 같지 않아.”라고 했던 말이 나이가 들면서 점차 자신에게도 실감된다. 젊을 때 운동 신경이 탁월했어도 나이가 들면 계단 하나 내려올 때도 조심해야 한다. 평형감각, 인지능력, 공간지각력 등이 옛날 같지 않아서 점차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는 것 같다. 기억력과 판단력도 점차 떨어진다. 다만 많은 경험을 통해 얻은 눈치나 지혜로 떨어진 능력을 커버해 사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외면하면 무지한 자기 과신으로 인해 남으로부터 무시당하고 소통능력 저하로 고집불통 이미지를 줄 수도 있다.  또한 나이 든 사람끼리도 옛날 같지 않아서 서로 답답할 수 있다. 그때는 서로의 능력 저하를 불쌍히 여기고 이해심을 높여야 한다. 들을 때...

Twinkle 반짝반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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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e among them like stars in the sky as you hold firmly to the word of life.  Philippians 2:15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빌립보서 2:15-16 “Twinkle, Twinkle, Little Star” is an English lullaby. Its lyrics, originally a poem by Jane Taylor, capture the wonder of God’s universe where stars hang “up above the world so high.” In the rarely published later stanzas, the star acts as a guide: “As your bright and tiny spark lights the traveler in the dark.” “반짝반짝 작은 별”이라는 노래는 영국의 자장가입니다. 그 가사는 원래 제인 테일러의 시로, “세상 위 아주 높은 곳”에 별들이 달려있는 경이로운 하나님의 우주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의 뒷부분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는데, 거기에 보면 별이 길 안내자가 됩니다. “밝고 작은 반짝임이 어둠 속의 나그네를 비춰주네.” In Philippians, Paul challenges believers in Philippi to be blameless and pure as they “shine . . . like stars in the sky” while offering the good news of the gospel to all around them (2:15–16). We wonder how we can shine like stars. We often feel inadequate and struggle to think our “light” is bright enough to make a difference. But stars don’t...

사랑을 주려고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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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라 >  요한복음 14-16장의 다락방 강화는 예수님이 죽기 전에 하신 유언의 말씀이다. 그 유언의 말씀으로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하신 말씀이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초대교회의 제자들의 가장 강력한 표시는 ‘사랑’이었다. 참된 사랑이 있으면 자칭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나를 예수님의 제자라 불러준다. 내가 아무리 신기한 영성을 보여도 남들이 나를 예수님의 제자라고 불러주지 않으면 큰 문제다. 교회는 서로 사랑하며 그 사랑이 차고 넘쳐서 이웃에게로 흘러가는 사랑이 충만한 교회라야 한다.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라. 남이 어려울 때 이해하지 못하면 내가 어려울 때 이해받지 못한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먼저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는 말이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위대한 일을 하는 셈이고 위대한 인격자가 되는 요체다. 아프리카에 선교헌금 보내는 것은 훌륭한 일이지만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위대한 일이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사랑하는 것도 위대한 일이고 며느리가 시어머니 사랑하는 것도 위대한 일이다. 동서 간에 서로 사랑하는 것도 위대한 일이다. 같은 직장에 있는데 친구가 혼자 진급했을 때 감사하기가 쉽지 않다. 모르는 사람이 진급하면 괜찮아도 가까운 사람이 진급하면 더 참기 힘들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더 힘든 것이고 그 일을 할 수 있다면 위대한 일이다. 그 위대한 일에 도전해보라. 서로 사랑하는 모습과 관계 속에서 엄청난 파워가 생겨난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서로 깊이 사랑해서 아무 때든지 서로를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교회가 교회 될 수 있는 조건은 표적도 아니고 형식도 아니고 사람의 숫자도 아니고 화려한 모습도 아니고 오직 사랑에 달려 있다. 참 사랑이란 너를 위해 지금 이대로 죽어도 좋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불만이고 저것 좀...

율법주의자의 3대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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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선  세례 요한 당시 유대인은 “어떻게 해야 몸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가?”라고 하며 정결예식의 형식에 대해 불필요한 논쟁을 벌이는 경우가 많았다(25절). 그처럼 종교의 외형적인 형식에만 몰두하다가 점점 위선에 빠졌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 중의 하나가 위선이다. 속은 썩었는데 겉만 화려한 것은 사람의 눈은 속여도 하나님은 속이지 못한다. 종교적 형식은 조금 미숙해도 좋고 기도는 조금 못해도 좋다. 하나님은 외형보다 마음의 진실함을 보신다.  늘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기를 힘쓰라. 진실할 때 남의 말에 잘 흔들리지 않고 기분이 업다운 되지 않는 축복을 얻는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기보다 하나님의 시선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왜 세례 요한이 위대한 선지자가 될 수 있었는가? 진실했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존재였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위선의 외투를 벗어던지게 했다. 사람들이 광야로 나간 것은 그의 진실한 소리를 듣기 위해서였다.  성공 신학이나 번성 신학은 세례 요한을 대할 때마다 그 논리적인 힘이 빠질 것이다. 넓은 문으로 가는 사람은 세례 요한과의 대면을 피하고 싶을 것이고 결국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지 못한다. 세례 요한 당시에 그를 찾아 넓은 광야로 나온 사람들은 좁은 길로 가기를 작정했던 사람들이다. 진리는 달콤하지 않다. 달콤한 말은 잠깐 힘과 위로를 주지만 참된 능력과 평안을 주지 못한다. 오직 진리와 진실만이 참된 능력과 평안을 준다. 2. 질투  당시 사람들은 광야에서 지낸 나실인이자 금욕주의자인 세례 요한과 같은 깨끗한 사람에게서 세례 받으면 더욱 깨끗해질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반면에 예수님은 지극히 평범한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그들 생각에는 예수님이 세례를 주면 별로 능력이 없을 것 같은데 사람들은 세례 요한보다 오히려 예수님께 더 몰렸다. 왜 그런 차이가 있는가? 그것이 외형과 진실의 차이다. 외형보다 진실이 더욱 큰 능력의 원천이다.  세례 요한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