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대로 살라





본문말씀 : 사도행전 11장 24-26절
24.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25.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 좋은 리더가 되라 >

 안디옥은 수리아 셀류시드 왕조의 수도였다. 당시 안디옥은 로마 제국에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셋째로 큰 도시로서 약 50만 명이 살고 있었다. 또한 디아스포라 유대인도 전체 인구의 7분의 1이 될 정도로 많이 살고 있었다. 스데반의 핍박으로 예루살렘에서 흩어진 사람들이 안디옥에 이르러 처음에는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했다(19절). 그 흩어진 사람 중 구브로와 구레네 출신 몇 사람이 안디옥에서 유대인뿐만 아니라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했다. 그 복음을 듣고 수많은 헬라인들이 주님께 돌아왔다(21절).

 안디옥 교회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어울려 잘 성장한다는 소식이 예루살렘 교회에 들렸다(22절).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에서 사도들 대신 바나바를 파송했다. 바나바는 유대 본토 출신이 아닌 안디옥과 가까운 구브로 섬 출신으로 언어와 문화에서 사도들보다 안디옥 성도에게 더 친화적으로 목회할 수 있었다. 바나바가 안디옥에 이르러 보니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안디옥 신자들에게 있었다. 바나바는 기쁜 마음으로 그들을 위로했고 착한 성품에 성령과 믿음까지 충만했던 바나바의 신실한 목회로 많은 사람들이 더해졌다.

 교인들이 많아지면서 바나바는 혼자 사역하기에 벅찬 것을 알고 다소에 10여 년간 은거해 있던 바울을 찾아 그를 안디옥으로 데려왔다(25-26절). 위대한 모습이다. 부목사가 너무 탁월하면 담임목사는 자신의 리더십이 훼손될까 하는 염려도 한다. 그래서 탁월한 사람을 부목사나 동역자로 삼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길 수 있지만 바나바는 거룩한 비전과 목적을 따라서 그런 부담을 기꺼이 졌다. 그는 위대한 섬김의 리더였다.

 바나바의 위대성은 바울 같은 인물을 동역자로 선택했다는 점에 있다. 바울이 바울 된 것에는 바나바의 역할이 컸다. 내가 훌륭한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이 훌륭한 일을 하도록 하는 것은 더 중요하다. 혼자 훌륭한 일을 하는 것은 ‘더하기의 역사’를 만들지만 남이 큰일을 하게 만드는 것은 ‘곱하기의 역사’를 만든다. 바나바와 바울이란 좋은 리더가 있었기에 안디옥 교회는 복된 교회가 될 수 있었다.

<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 >

 바나바의 열린 목회로 안디옥 교회는 계속 부흥해 믿는 무리가 많아졌고 거기서 역사상 처음으로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이란 칭호를 들었다(26절). 당시 그리스도인이란 말은 요즘 한국말로 ‘예수장이’란 말이었다. 처음에는 그 호칭이 경멸조로 붙여졌고 그리스도인은 어리석은 리더를 따르는 무지한 집단 정도로 인식되었다. 그래도 안디옥 교인들은 더욱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임을 자처하며 불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인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었다.

 안디옥 성도들이 변화된 삶을 살자 경멸조로 붙여진 그리스도인이란 용어는 점차 존경적인 용어로 바뀌었고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는 말이 자랑스러운 고백이 되었다. 얼마나 복된 모습인가?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예수쟁이란 이름이 존경스런 이름이 되지 못하고 경멸조로 들리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성도가 사회에 실제적인 선한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오히려 해악을 끼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성령충만하다고 주장하는데 성령의 열매가 없다. 성령의 열매가 없는 성령충만은 없다. 성령충만과 성령의 열매를 따로 보는 이원론은 잘못된 것이다. 내적으로 성령충만하면 자연히 외적으로 그 열매가 나타난다. 외적인 변화도 없이 성령충만하다고 하면 그런 성령충만은 무속인의 신들림과 다를 것이 없다. 행동 변화도 없고 예수님을 주로 영접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영에 붙잡히는 체험을 하고 다른 세계와 접촉할 수 있다. 성령의 열매가 없이 성령충만을 경계하라.

 예전에 시골에서는 목사가 심방을 끝내고 가면 목사가 먹다 남은 음식을 먹으려고 경쟁이 벌어졌다. 그 음식을 먹으면 복이 임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것은 거룩한 삶이라기보다는 비정상적인 삶이다. 그런 모습 때문에 예수쟁이에 대한 경멸조의 인식이 사라지지 않는다. 성도에게는 종교적 신들림이 아닌 참된 성령충만이 나타나야 한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가 많이 맺히도록 힘쓰고 욕심과 기복주의를 멀리하며 늘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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