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를 수용하고 극복하라
< 열린 마음을 가지라 >
1970-80년대에 우리나라에서는 건물도 없이 천막만 치고 목회해도 부흥하는 교회가 많았다. 그때 교회가 우후죽순으로 생겼고 신학교도 학생들로 넘쳤다. 동시에 목사 안수를 남발하는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속성으로 받는 가짜 목사도 늘어났다. 가짜 목사가 말발이나 웅변 실력을 앞세워 사람들을 웃겼다 울렸다 하고 거짓 능력을 앞세워 교회를 키워도 당시에는 인터넷을 통한 정보 유통이 없고 검증 시스템도 빈약해서 가짜를 잘 걸러내지 못했다.
가짜 목사는 대개 신학과 배움을 무시하고 영성을 내세운다. 또한 영성과 윤리가 별개인 것처럼 “기독교는 윤리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면서 윤리를 무시한다. 삶 자체가 편법과 거짓이기에 당연히 윤리를 무시할 수밖에 없다. 가짜 목사들은 신학과 배움을 무시해도 내적인 열등감 때문에 자기를 어떻게든 높게 보이려고 한다. 그래서 가짜 박사 학력까지 걸치고 기존 목사들을 공격할 거리를 찾아내어 비판하면서 자신의 영적인 지식을 은근히 과시한다. 때로는 비본질적인 문제로 그렇게 공격한다.
1980년대에 한 가짜 목사가 주장했다. “한국 목사들이 쓰는 ‘하나님이 축복한다’라는 말은 무식한 말입니다. 축복(祝福)이란 말에서 축(祝)은 ‘빌 축’자로서 하나님이 축복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복을 비신다’는 뜻인데 전능하신 하나님이 누구에게 복을 빕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이 축복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복 주신다‘고 표현해야 됩니다. 목사들이 복과 축복도 잘 구분하지 못하니 그렇게 무식하면 됩니까?”
어느 날 출판사를 운영하는 A 집사가 기도원에 갔다가 설교 중에 그 가짜 목사의 복과 축복의 차이에 대한 주장을 들었다. 그 후 A 집사도 열심히 복과 축복의 의미를 바로 알고 쓰자고 주장했다. 그런 주장이 한때 꽤 먹혀서 1980년대에 한국 교회에 때 아닌 ‘복과 축복의 의미 차이와 관련된 영양가 없는 논쟁’이 벌어졌다. 왜 그런 논쟁이 벌어졌는가? 언어의 표현 차이로 영적 지식을 과시하고 자신을 높게 보이려는 태도가 문제였다.
1990년대 중반쯤에 A 집사가 목회도 하고 글도 쓰는 B 목사에게 말했다. “목사님! 요새 제가 복과 축복의 용어를 바르게 쓰자는 운동을 합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신다’는 말이나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는 말은 틀린 표현 같습니다. 축복이란 ‘복을 빈다’는 뜻인데 어떻게 하나님이 복을 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복 주신다’ 혹은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라고 써야 맞는 표현 같습니다.”
그때 B 목사가 조심스럽게 권고했다. “집사님! 그런 문제에 너무 깊이 매달리지 마십시오. 언어는 살아있는 생물과 같아서 그 뜻과 표현이 시대에 따라 계속 바뀝니다. ‘축복’을 한자어대로 뜻풀이하면 ‘복을 비는 것’이란 뜻이지만 ‘하나님이 복을 내리는 것’이란 의미로 사람들이 계속 쓰면 ‘축복’을 ‘복을 내리는 것’이란 의미로 얼마든지 변화되어 사용될 수 있습니다. 언어의 의미와 표현 변화에 열린 마음을 가져보세요.” A 집사가 진중하게 듣고 그때부터 복과 축복의 의미 차이를 바로 알고 쓰자는 운동을 그만두었다.
요즘도 간혹 복과 축복의 의미 차이를 바로 알고 쓰자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서 그 의미 차이를 아는 것이 지식이 높은 증거인 것처럼 복과 축복의 의미를 혼용해 쓰는 설교자를 비판한다. 그러나 B 목사의 말대로 이미 한국어 사전은 ‘축복’이란 의미를 ‘복을 비는 것’이란 의미 외에 ‘복을 내리는 것’이란 의미로 정의하고 있다. 비본질적인 문제에서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것을 늘 열린 마음으로 수용하라.
< 율법주의에 빠지지 말라 >
가이사랴 오순절 사건 후 베드로는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이 있고 성령도 임했다.’라고 하면서 들뜬 상태로 예루살렘에 돌아왔다. 그런데 할례파 교인들이 베드로가 가이샤라에서 이방인들과 교제하고 함께 음식을 먹었다고 비난했다(3절).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지만 여전히 유대 율법주의를 내세워 사도 베드로를 면전에서 비난하는 할례자 교인들을 보라. 사람에게는 율법적인 본능이 있어서 조금만 방심해도 금방 율법주의에 빠지고 형식과 전통에 얽매여 남을 비판하기 쉽다.
왜 율법주의자가 남을 쉽게 비판하는가? 남의 마음과 동기와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율법과 전통만 내세우기 때문이다. 율법주의자가 내세우는 율법은 대개 편견적인 자기 율법이다. 자기 율법을 내세워 비판하는 것은 복된 모습이 아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잘 지킨다고 자부한 바리새인을 심히 미워하셨다. 그들은 안식일의 본질적인 정신은 잊고 형식적인 논리로 안식일에 499미터는 가도 되지만 500미터 넘으면 율법을 범한 것이라고 자기 율법을 만들었다. 결국 안식일에 병을 고친다고 예수님까지 비난했다.
안식일의 본질은 하나님 중심적으로 살라는 것인데 바리새인은 하나님이 없이 율법 조문만 붙들고 안식일 논쟁을 했다. 요새도 그런 유사한 안식일 논쟁이 있다. 어떤 사람은 주일에 식당에 가거나 물건을 사면 주인을 일하게 하는 것이기에 잘못된 행동이라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교회에 오려고 버스나 지하철을 타는 것도 운전자를 일하게 하는 것인데 그것은 왜 비판하지 않는가? 율법주의에 빠지면 비판적 주장으로 자기모순에 빠질 때도 많다. 그런 얄팍한 주일성수 논쟁에 빠지면 복된 인생이 될 수 없다.
왜 그런 논쟁이 생기는가? 대개 어떤 틀 안에 남의 영혼을 가둬서 사로잡고 나의 영성을 높게 보이려는 심리 때문이다. 율법적인 틀을 내세우는 교주를 주의하라. 또한 내 잣대로 쉽게 남을 비판하지 말고 남의 형편과 처지를 이해하고 용납하라. 본질적인 진리 문제에서는 굳게 닫혀 진리를 고수하되 비본질적인 생활 문제에서는 변화를 넉넉히 수용하라. 율법주의와 비판주의를 잘 극복해야 하나님이 삶의 지경을 넓혀주신다.
< 온유한 태도를 가지라 >
베드로는 원래 성질이 매우 급한 사람이었다. 성령 받기 전의 베드로라면 할례자들이 비난할 때 새까만 교회 후배가 말도 안 되는 비난을 한다고 멱살 잡고 흔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베드로는 온유하게 자신에게 있었던 환상에 대해 차근차근히 설명했다(4절). 그러자 할례자들과 예루살렘 교인들이 베드로의 말을 듣고 잠잠해졌고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런 아름다운 결과를 낳은 데에는 베드로의 온유한 태도가 큰 역할을 했다.
매달 <월새기(월간새벽기도)>를 교정할 때 몇 백 군데 이상을 교정한다. 오자 교정도 하지만 대부분은 표현을 수정하는 것이다. 교정 팀이 정치 성향 비하, 장애인 비하, 여성 비하, 가난한 사람 비하, 인종 비하, 병자 비하 등의 어감이 최대한 없도록 필자에게 표현의 수정을 제안하면 필자는 그 제안을 힘써 수용한다. 그런 많은 제안에 마음이 닫혀서 기분 나쁘다고 하지도 않고 상처를 입지도 않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교정 팀이 먼저 필자의 말씀에 깊이 은혜를 받고 있고 인격적인 존중심과 충성심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글에서 너무 강한 표현, 거부감이 들 수 있는 표현, 지나친 유머 표현 등도 최대한 걸러낸다. 교정 단계에서 글이 난도질되는 셈이다. 그러면 싸움과 상처와 갈등이 넘칠 것 같다. 그러나 교정 팀이 필자를 최대한 존중하는 것을 알고 그 제안을 기꺼이 수용하니까 글이 난도질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수 있는 교정 시간이 오히려 한 달의 사역 시간 중 가장 즐겁게 웃음꽃이 피는 시간이 된다. 보편 사고에 맞춰 들으려는 열린 마음을 예비하면 상처 가능성도 크게 줄일 수 있고 작은 일로 시험에 잘 들지도 않는다.
그렇게 세심하게 작은 표현 하나까지 독자가 상처받지 않도록 힘써 배려하며 수정해도 어떤 독자에게는 <월새기>의 어떤 말씀이 자기 자존심과 상처를 건드려 아픔을 주고 때로는 받아치고 싶고 시험 들게 하는 말씀처럼 들릴 수 있다. 인간 세상에서 그런 상황이 전혀 없을 수는 없다. 그때는 어쩔 수 없다. 다만 그런 상황이 최대한 생기지 않도록 세세하게 신경 쓰면서 수정 제안을 기꺼이 수용한다. 그렇지만 본질적인 문제에서 강력하게 어떤 메시지를 선포하고 싶으면 수정 제안을 수용하지 않고 필자의 표현을 고수하기도 한다.
< 변화를 수용하고 극복하라 >
진리의 본질적인 면을 굳게 붙잡으면서 비본질적인 면에서는 열린 마음을 가지라. 성경의 본질적인 진리는 달라질 수 없지만 비본질적인 진리의 적용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세상은 계속 변한다. 나도 변하고 있고 더 나아가 변해야 한다. 세상의 변화 흐름에 지혜롭게 따라가려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세상의 변화도 크게 보면 하나님이 그렇게 변화시켜 가는 것이다. 인생의 수많은 변화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변화다. 중요한 것은 세상과 인생의 변화 속에 하나님의 선한 손길과 섭리가 있음을 믿는 것이다.
가끔 큰 고난에 처하면 남의 위로도 큰 도움이 안 된다. 때로는 깊은 좌절감에 사로잡혀 자기 감옥 안에 자기를 가두기도 한다. 그때는 자기가 제일 불행한 존재 같다. 교정기관에 수용되면 처음에는 죽을 것 같은 심적 고통을 겪으면서 자기 감옥에도 갇힌다. 그러다가 점차 깨달음을 얻으면서 그 감옥에서 나온다. 스스로 깨닫기도 하지만 <월새기> 같은 책이 깨달음에 큰 도움을 준다. 그때 평안과 자유가 생기면 감옥에 있어도 감옥 밖에 있는 것 같다. 반면에 감옥 밖에서도 고통스런 감옥 생활을 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자금 문제로 수시로 부도 위기에 몰린 사람을 생각해보라. 그가 자존심이 강해 성격상 돈을 빌려달라는 말을 못한다면 그 상황은 마치 지옥과 같다. 그런 상황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목사에게 기쁨을 주려는 성도가 있다. 그러면 목사는 그 성도를 잊지 못한다. 하나님은 더욱 그 성도를 잊지 않으신다. 그런 산고의 진통 상황들을 통과하면서 <월새기> 사역이 지금까지 지탱되었고 수많은 영혼이 구원받고 변화되는 열매를 맺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상황이나 죽음과 같은 고난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라. 그 상황도 하나님이 지켜보심을 신뢰하면서 늘 열린 마음으로 모든 상황을 잘 수용한 후 믿음으로 극복하라. 영향력과 지경이 확대되는 복을 원하면 마음의 지경부터 확대시키라. 본질적인 진리에서는 굳게 닫혀 보수적으로 살고 비본질적인 문제에서는 활짝 열려 개방적으로 살면서 온유한 자세로 관습과 습관과 편견을 잘 극복해서 영향력이 넘치는 인물 성도가 되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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