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잊지 말라
본문말씀 : 호세아 13장 4-8절
4.그러나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5.내가 광야 마른 땅에서 너를 알았거늘 6.그들이 먹여 준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르니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 이로 말미암아 나를 잊었느니라 7.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사자 같고 길 가에서 기다리는 표범 같으니라 8.내가 새끼 잃은 곰 같이 그들을 만나 그의 염통 꺼풀을 찢고 거기서 암사자 같이 그들을 삼키리라 들짐승이 그들을 찢으리라
< 우상숭배의 파멸성 >
우상숭배에 빠지면 태양이 떠오른 후 곧 사라지는 아침 구름과 쉽게 사라지는 이슬처럼 되고 타작마당에서 광풍에 날리는 쭉정이나 굴뚝에서 나가는 연기처럼 된다(3절). 우상숭배는 파멸이 예고된 것이란 뜻이다. 하나님은 우상숭배에 빠진 백성에게 자신을 사자와 길가에서 기다리는 표범과 새끼를 잃은 곰과 암사자와 같다고 비유하셨다(7-8절). 무섭고 빠르고 위엄스럽게 우상숭배에 빠진 백성을 심판하실 것이란 암시다. 한 마디로 말하면 우상숭배에 빠지면 엄중하게 심판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양보와 관용이 넘치지만 다른 우상에게 참된 신의 지위를 양보하거나 우상숭배에 대해 관용하심으로 진리를 양보하지는 않는다. 양보해도 될 것을 양보하지 않는 것은 완고한 것이지만 진리를 양보하지 않는 것은 독실한 것이다. 불신자의 눈에 유일신 사상이 독선처럼 보여도 전능하신 참 신은 한분일 수밖에 없다. 다른 사상은 다 타협의 여지가 있어도 하나님을 여러 신 중 하나쯤으로 여기는 사상에는 타협이 없어야 한다. 사람이 가장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 자리에 다른 우상을 두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어떻게 깊이 사랑할 수 있느냐고 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은 사람에 대한 사랑 중의 하나인 N분의 일쯤의 사랑으로 가볍게 여기지 말라. 하나님은 수많은 사람을 사랑해도 일대일의 사랑만큼 깊은 차원에서 사랑하신다. 그 사랑을 진중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도 N분의 일의 사랑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배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서 파멸적인 결과를 낳는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일대일의 깊은 사랑으로 알고 하나님만 사랑하라. 헛된 자존심과 이성을 앞세워 하나님의 사랑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상대의 진실한 사랑의 고백을 계산적인 사랑으로 오해하고 다른 것을 바라보면 상대에게 큰 상처가 된다.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해 다른 헛된 신을 바라보지 말라. 사랑을 잘 주는 적극성도 중요하지만 사랑을 잘 받는 수용성도 중요하다. 행동도 잘해야 하지만 그 전에 마음과 성향을 하나님 중심적으로 잘 가꾸는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얻고 파멸에서 구원받는다.
< 하나님을 잊지 말라 >
하나님만 구원자로 알고 다른 신을 알거나 섬기지 말라(4절). 왜 이스라엘이 다른 신을 찾아 섬겼는가? 교만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잊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고생할 때 그의 형편과 처지와 사정을 알아줄 정도로 친근한 사랑을 보여주고 돌봐주며 필요를 채워주고 배부르게 하시니까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잊었기 때문이다(5-6절). 우상숭배란 마음이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잊는 것이다.
왜 하나님의 은혜를 잊는가? 근본적인 이유는 아직도 자기를 완전히 부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절실한 필요를 모르고 혼자서도 잘살 수 있다고 여기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어느새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수 있다. 자기 교만이 완전히 깨져서 손바닥이 땅에 닿은 후 일어서야 하나님의 은혜가 마음속에 깊이 각인된다. 그때 삶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은 뿌리 깊은 내적인 교만 때문이다. 자기에 대한 자부심은 또 하나의 우상이 될 수 있다. 마음이 넓되 하나님 자리에서 하나님을 몰아내는 양보는 없게 하라. 믿음은 절대적이어야 능력도 생긴다.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이란 식의 믿음에는 역사가 생기기 힘들다. 일본과 태국은 우리나라보다 복음을 훨씬 일찍 접했지만 부흥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았다. 불교와 미신으로 전도에 진전이 없자 “절에 가면서 교회에 나와도 좋습니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초대 교회는 처음부터 복음의 절대성을 내세웠다. 우상을 불태우고 교회에 나오라고 했다. 제사와 술 담배도 금했다. 지나친 모습 같았지만 그 모습을 통해 생명력이 커지고 강해졌다. 하나님만 바라보았던 믿음의 선배들이 부흥의 초석을 다진 것이다. 세상에서 타협은 미덕이 될 수 있지만 복음의 진리만은 양보하지 말라. 우상에게 하나님 자리를 양보하지 말고 나를 내세우거나 앞세우지 말라. 100퍼센트의 은혜를 앞세울 때 100퍼센트의 충성이 나오면서 내일의 더욱 큰 은혜도 예비된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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