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중심적으로 살라





본문말씀 : 창세기 1장 3-14절
3.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 어둠의 존재를 인정하라 >

 천지창조는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넷째 날, 다섯째 날, 여섯째 날의 6일간 이뤄졌다. 이 표현에서 ‘날’은 24시간의 하루를 의미하는가? 어떤 성경학자는 그 ‘날’을 ‘시대’로 해석한다.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을 수 있기에 그런 해석도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해석은 7일째를 안식일로 지키는 상황을 설명할 수 없어서 실제로 24시간의 의미일 것이란 의견이 지배적이다.

 어떤 성경학자는 절충 의견을 내놓는다. 하루 24시간은 넷째 날에 창조된 해와 달과 별의 운행을 통해 형성된 시간 개념이기에 처음 3일은 시대 개념의 날이고 나중의 3일은 24시간 개념의 날이라고 본다. 보수적인 관점에서는 그 ‘날’을 오늘날의 24시간의 개념으로 여긴다. 해가 넷째 날에 창조되어서 넷째 날 이후는 오늘날의 24시간의 날과 같은 개념이라면 그 전에 3일간도 같은 개념의 날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첫째 날 창조 작품은 빛이었다. 그 빛으로 하나님의 창조물을 볼 수 있고 생명활동이 유지된다. 빛이 생김으로 빛과 어둠을 나누고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4-5절). 어둠도 필요해서 하나님이 있게 하셨다는 암시다. 빛은 낮에 일할 때 필요하고 어둠을 밤에 쉴 때 필요하다. 어둠의 필요성은 휴식의 필요성과 같은 개념이다. 빛을 들어오게 하는 창문도 필요하지만 빛을 막아주는 커튼도 필요하다. 어둠의 존재를 인정하라.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참된 믿음이다.

< 예수님 중심적으로 살라 >

 흔히 빛은 태양과 태양이 반사된 달과 그 외에 별로부터 온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넷째 날에 태양과 달과 별이 생기기도 전에 첫째 날에 빛이 생성되었다고 기록한다. 그렇다면 첫째 날의 빛과 넷째 날의 현재 눈으로 식별되는 태양과 별로부터 생성되는 빛은 다르다는 뜻이 된다. 또한 식물은 광합성을 통해 영양을 공급받기에 태양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태양이 먼저 창조되어야 하고 식물이 나중에 창조되어야 하지만 성경은 식물이 넷째 날에 창조된 태양보다 먼저 셋째 날에 창조되었다고 기록한다.

 왜 그런 차이가 있게 되었는가? 정확한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일부 성경학자들은 창조 사역을 ‘예수님의 사역’과 연관시켜 그 의미를 해석했다. 그 해석에 의하면 창조 첫날에 창조된 빛은 물리적인 빛이 아닌 참 빛, 곧 예수님의 탄생을 예표한다. 요한복음 1장 9절을 보면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란 말씀이 있다. 사도 요한도 예수님을 빛으로 표현했다. 어거스틴도 첫째 날의 빛을 영적인 빛으로 해석했다

 이상과 같은 영적인 해석은 해석적인 논리이지 성경적인 진리는 아니다. 성경을 지나치게 영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될 위험성도 많기에 주의해야 한다. 다만 영적인 해석이 전혀 근거 없는 논리만은 아니다. 성경의 중심 주제는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구약의 수많은 사건과 인물과 환경을 통해 하나님이 드러내시기를 원하는 가장 위대한 대상은 예수님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끊임없이 특별계시인 성경을 통해 그리고 3대 일반계시인 자연과 역사와 양심을 통해 말씀하신다. 그 모든 말씀의 핵심은 “오직 예수!”라고 말할 수 있다.

 마태복음 17장을 보면 예수님이 12제자 중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의 3명만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 그 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신비하게 변형된 예수님과 얘기했다. 그 장면을 목격한 베드로가 감격하며 예수님께 말했다. “예수님! 너무 황홀합니다.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기서 삽시다.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예수님을 드리고 또 하나는 모세에게 또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겠습니다.”

 베드로가 그 말을 할 때 하늘에서 갑자기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베드로의 입을 막고 오직 예수님의 말을 들으라고 했다. 왜 하나님이 베드로의 말을 막으셨는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오직 예수 밖에는 없어야 한다는 뜻이고 은둔하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사명을 가지고 세상에 나가 ‘오직 예수’를 전파해야 된다는 암시다. 모든 문제의 해답은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며 곧 다시 오실 것이다. 늘 예수님 중심적으로 삶을 재편하고 예수님의 삶을 이 땅에 구현하면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살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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