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한계를 극복하라
본문말씀 : 사도행전 14장 8-10절
8.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9.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10.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 구원의 믿음을 가지라 >
본문에는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을 일으키는 장면이 나온다. 루스드라에서 바울이 말씀을 전할 때 많은 사람들이 설교를 들었지만 특별히 나면서부터 발을 쓰지 못했던 사람이 그 말씀에 빨려들었다. 그때 바울이 주목하면서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믿음은 말씀을 바탕으로 한 구원의 믿음이었다.
믿음에는 2가지가 있다. ‘구원받지 못하는 믿음’과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다. 긍정적인 사고방식도 믿음의 형태는 부분적으로 가지고 있고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힘이 난다. 그러나 그런 믿음의 형태가 꼭 구원받을 만한 믿음만은 아니다. 구원받을 만한 믿음은 구세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다.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하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 이외에 다른 것을 믿는 것은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아니다.
한 아내가 투병하는 남편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남편이 나을 줄 믿습니다.” 그런 기도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주의할 것은 ‘남편이 나을 것’을 믿음 대상으로 여기면 믿음의 본질이 흐려질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남편의 치유를 위해 기도할 때 ‘남편이 나을 것’을 믿기보다 ‘남편을 낫게 하실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남편이 나을 것’ 자체를 굳게 믿는 것은 본인은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기복주의의 형태가 된다.
‘남편이 낫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gift)이다. 남편을 낫게 하시는 분(giver)은 하나님이다. 아무리 다급해도 하나님(giver)보다 선물(gift)을 더 사모하지 말라. 믿음의 대상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참된 믿음과 기복신앙이 갈라진다. 기복주의는 복을 추구하지만 가장 복을 못 받게 하는 사상이다. 기복주의를 버리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구원의 믿음을 가질 때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최선의 복이 주어진다.
< 자기 한계를 극복하라 >
바울이 못 걷는 자에게 외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라고 한 선포는 모든 사람에게 주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 발로 일어설 생각은 하지 않고 하나님이 일으켜 주기만 바라지 말라. 하나님을 온전히 믿어도 내가 할 일은 하라. 하나님은 일어서려고 할 때 일으켜 주신다. 하나님은 기적적인 역사를 혼자 이루기보다 사람을 통해 그리고 사람과 함께 이루기를 기뻐하신다. 가만히 있기보다 기도하며 일할 때 복된 열매가 맺히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일하심을 나타내는 표시다.
어떤 교인은 제 발로 일어서려고 하지 않고 섬김만 받으려고 한다. 믿음이 어리고 약할 때는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믿음의 연륜이 쌓이면 남을 돕는 위치에 서라. 오래 믿음 생활을 했어도 여전히 젖먹이처럼 남을 의지하려고만 하면 하나님은 기적과 역사를 일으켜 주실 수 없다. 하나님은 지금도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고 말씀하신다. 그 말씀을 붙잡고 다시 벌떡 일어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뛰어 자기 한계를 극복하라.
자기 한계를 깨뜨린다는 것은 쉽지 않다. 자기 힘만으로는 할 수 없다. 루스드라의 못 걷는 사람도 스스로 자기 한계를 깨뜨린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말씀이 필요하다. 날 때부터 못 걸었기에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지만 바울이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라고 하는 말씀이 들렸을 때 순간적으로 그는 자기가 못 걷는 자란 사실을 잊고 일어나 걷게 되었다. 자기 극복은 의지나 결단의 산물이 아니라 말씀을 긍정할 때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과 육신을 살리는 수술 칼과 같은 역할을 하는 살아있는 말씀이다(히 4:12). 말씀은 지식이나 정보가 아니라 능력의 원천이다. 말씀 안에 생명과 기적이 내포되어 있다. 말씀의 생명력이 슬픔과 염려와 근심을 없애고 사람을 움직이고 변화시킨다. 결국 말씀이 내 안에서 생명이 되도록 말씀을 잘 듣고 받아들이는 것은 치유를 체험하게 하는 핵심 통로다. 그런 치유의 역사가 지금도 나타날 수 있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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