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덴 사역의 실패 이유
본문말씀 : 사도행전 17장 16-19절
16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18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19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바울은 아덴을 둘러보면서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거룩한 분노가 생겼다(16절). 그 분노를 가지고 회당에서는 유대인 및 경건한 사람들과 변론했고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했다. 그러자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 중 일부가 비꼬며 말했다.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어떤 사람은 “그가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라고 했다. 바울이 예수님과 부활을 전했기 때문이다.
그 철학자들이 바울을 붙잡고 의사당인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했다.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그들의 요청을 듣고 바울이 그들 앞에서 철학적으로 그럴듯하게 설교했지만 결과적으로 아덴 사역에서 큰 열매도 없이 선한 영향을 주기보다 오히려 조롱을 들었다. 그때 바울은 상당한 좌절감을 느꼈을 것이다. 왜 아덴 선교가 실패했는가? 크게 2가지 이유 때문이다.
1. 혼자 사역했기 때문
바울 선교여행을 시작하면서 대부분 팀을 이뤄 사역했다. 그런데 아덴에서는 혼자 복음을 전했다. 그것이 문제였다. 아무리 위대한 사도라도 혼자 모든 일을 할 수는 없다. 모세가 아무리 훌륭해도 아론과 훌이 양손을 받쳐주지 않으면 실패하기 쉽다. 주연도 필요하지만 조연도 필요하다.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베드로나 바울처럼 마음을 통쾌하게 하는 산봉우리처럼 우뚝 솟은 인물도 필요하지만 산자락 언저리의 그늘에서 맑은 물을 흘려내는 옹달샘처럼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인물도 필요하다.
모세는 광야 40년 동안 강한 믿음과 카리스마로 백성을 이끌었다. 그래도 종종 약한 모습을 보였다. 모세나 바울에게도 동역자가 필요했다. 심지어는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두고 기도할 때 제자들의 기도 동역을 원했다. 예수님도 기도 동역을 필요로 했다면 사람에게는 얼마나 더욱 기도 동역이 필요하겠는가? 주연이 되려는 사람은 많지만 조연 역할을 기꺼이 맡는 사람은 적다. 그러면 복된 공동체나 복된 사회를 이루기 힘들다.
조연이 있어야 주연이 빛나고 주연도 조연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공동체의 거룩한 꿈이 멋지게 이뤄진다. 능력과 가능성이 있고 큰 꿈과 비전을 가졌어도 동역자가 없으면 그 꿈과 비전을 펼치지 못할 때가 많다. 필자가 오랫동안 한국에서 기독교선교연맹(C&MA) 소속 목사로 사역하면서 가장 필자의 영혼을 사모하게 만들었던 단어 중 하나가 ‘동역자’란 단어였다. 배가 항해하려면 배를 띄워주는 물이 필요하듯이 큰 꿈과 비전을 이루려면 배경이 되어주는 기도 후원자나 동역자가 절실히 필요하다.
2. 논쟁을 앞세웠기 때문
바울은 아덴을 둘러보면서 엄청난 철학적 기운을 느꼈다. 당시에 정치의 본산은 로마였고 종교의 본산은 예루살렘이었고 철학의 본산은 아덴이었다. 아덴의 보통 시민도 대단한 철학 이론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그런 분위기를 보고 자신도 옛날에 가졌던 철학적 태도가 튀어나와서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기보다 철학적 변론과 지식으로 그들을 감동시키고 기를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기를 죽이기는커녕 오히려 조롱만 받았다.
그들은 바울을 ‘말쟁이’라고 조롱하며 이렇게 서로 말했을 것이다. “저 키 작은 외지인이 말은 잘하네. 말을 조금 더 들어볼까?” 그래서 바울이 설교할 때도 팔짱 끼면서 들었을 것이다. 말쟁이란 조롱은 성도가 가장 듣지 말아야 할 수치스러운 조롱이다. 말을 절제하라. 깊은 만족감은 고요한 영혼 속에 깃든다. 위대함과 건강함을 겸비하려면 광장의 선포보다 골방의 침묵을 앞세우라. 말을 절제할 줄 모르면 언젠가 대화가 막히면서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부담스러운 존재가 된다.
혼자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공동체에 있으면 논쟁과 변론과 갈등이 커지기 쉽다. 강의하는 것이 아닌 일반 대화에서 말을 혼자 많이 했으면 회개에 버금갈 정도로 자신의 부덕을 성찰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라. 혼자 말을 많이 하는 것도 피해야 하지만 불신자와의 변론을 힘써 피해야 한다. 십자가의 삶으로 사람을 감동시키며 이끌어야지 지식적인 변론으로 사람의 기를 죽이고 이끌려고 하면 기는 죽일 수 있어도 영혼은 이끌 수 없다. 철학적인 화려한 말보다는 초라해 보이는 십자가가 더 사람의 영혼을 이끈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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