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에 길들여지라





본문말씀 : 사도행전 19장 8-12절
8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9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10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11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 성령충만의 모습은 다양하다 >

 사도 바울은 3차 선교여행 중 에베소에서 상당 기간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다. 처음 3개월 동안은 회당에서 말씀을 전했지만 비방하는 사람들 때문에 결국 믿는 제자들과 회당을 떠나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2년 동안 강론하자 에베소의 많은 유대인과 헬라인이 말씀을 들었다(8-10절). 그때 배웠던 제자들이 각처로 퍼지면서 주변에 생겨난 교회들이 골로새 교회, 히에라볼리 교회(골 4:13), 서머나 교회, 버가모 교회, 두아디라 교회, 사데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 등이다.

 바울은 두란노 서원을 통해 말씀 중심적인 사역을 했지만 하나님은 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셨다(11절). 심지어는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갔다. 바울에게 신비한 능력이 있거나 바울이 쓰던 손수건이나 앞치마에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울이나 바울의 물건을 매개로 능력을 나타내신 것이었다.

 바울은 그런 신비한 능력을 억지로 보여주려고 하지 않았다. 왜 하나님은 그런 기적이 있게 하셨는가? 당시 헬라 문화의 중심지로서 우상숭배가 극심했던 에베소 사람들을 복음으로 이끌려면 기적적인 능력이 특별히 필요했기에 그런 능력을 허락하셨을 것이다. 지금도 그런 기적은 일어날 수 있다. 다만 꼭 알아야 할 사실은 바울이 이방 종교의 점술사나 마술사나 무속인처럼 의도적으로 그런 능력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말씀을 강론하는 사경회를 열었다. 즉 은사 중심적인 사역이 아닌 말씀 중심적인 사역을 통해 오히려 기적적인 능력이 나타난 것이다. 성령충만을 통한 능력을 마술적인 능력으로 오해하지도 말고 외적인 어떤 능력이 있어야 성령으로 충만한 것이라고 단정하지도 말라. 성령충만의 모습은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처럼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그런 다양성에 열린 마음을 가지고 성령충만을 사모하라.

< 하나님의 뜻에 길들여지라 >

 믿음생활에서 성령충만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 문제는 성령충만에 대해 오해하는 것이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수시로 금식하고 잠자리도 멀리하면서 엘리야나 모세처럼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인가? 아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정상적인 보통 사람이다. 좋은 인격을 가지고 가정과 삶의 현장에서 자기 할 일을 잘 감당해서 칭찬 받고 영과 진리로 예배하고 힘써 전도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특이한 체질과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 아니다. 바울은 산신령처럼 살지 않고 보통 사람처럼 똑같이 먹고 자고 생계를 꾸리면서 복음을 증거했다. 복된 삶은 세상에서도 성도답게 사는 삶이다. 결국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의 가장 뚜렷한 보편적인 특징은 남을 섬기면서 겸손하고 성실하게 사는 것이다.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신령함을 과시하기보다는 실천적인 사랑을 보여주라.

 신앙생활에서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감정적인 태도다. 성령충만은 감정을 풀어주는 것이 아니다. 감정에 치우치지 말라. 바른 믿음은 감정을 잘 다스리는 믿음이다.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요구하기보다 이해하고 자기 자리를 굳게 지키면서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한다. 자기 위치를 알고 살아가면 “저 사람 참 안 됐어.”라는 말을 듣는 대상이 되지 않는다. 얼마나 복된 모습인가? 외로움이 깊이 반응하는 성령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살면 ‘힘들어도 행복한 삶’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세상은 세상에 익숙한 삶을 요구하지만 하나님은 세상에 낯선 삶을 요구한다. 낯선 삶에 적응하려면 불편하고 힘들지만 성령님을 마음속에 모시면 잘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낯선 삶을 향해 떠날 때 참된 해방의 역사가 있고 후일에 믿음의 조상이 되는 은혜도 따른다. 나그네 의식을 품고 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세상 원리에 길들여지기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뜻과 비전에 길들여지기를 원할 때 세상의 적대를 뒤따르는 하나님의 환대가 있을 것이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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