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심을 따라 사는 길
본문말씀 : 누가복음 23장 26-33절
26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27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32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1.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라
빌라도의 재판 후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을 사형장으로 끌고 갈 때 시골에서 오는 구레네 사람 시몬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님을 따르게 했다(26절). 당시 십자가형 관례대로 예수님이 직접 십자가를 지고 형장으로 갈 때 밤새 심문당하고 지친 예수님이 탈진함으로 더 이상 걷지 못하게 되자 군병들이 강제로 시몬에게 십자가를 지웠다. 결국 예수님이 앞서 걷고 구레네 시몬은 얼떨결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뒤따라갔다. 사실상 그때 구레네 시몬의 자리에는 예수님의 12제자가 있어야 했다.
때로는 억지로 혹은 얼떨결에 십자가를 지는 것도 큰 은혜의 원천이 된다. 그것도 결국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하나님은 때로 약한 사람을 불러 강하게 쓰시고 내가 약할 때도 사랑의 손길을 쉽게 포기하지 않으신다. 물론 잘못된 길로 가면 때로 매도 대고 고통도 주시지만 그 매와 고통도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로서 하나님의 선하고 원대한 계획 속에 주어진 것이다. 그 계획은 절대 오차가 없고 결국 선한 열매로 귀결된다.
아무리 정교한 스위스 시계도 1년에 3초의 오차는 있지만 하나님은 지구가 태양 주위의 먼 거리를 돌게 하면서도 1년에 1초의 오차도 없게 하셨다. 그처럼 하나님은 전혀 착오 없이 성도의 앞길을 계획하시고 어떤 때는 소중한 목적 때문에 고통의 순간도 맞이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문제와 시련 때문에 너무 낙심하지 말라. 하나님의 세심한 계획과 선한 손길을 신뢰하고 하나님이 지우시는 십자가를 억지로라도 지고 슬피 울면서라도 십자가의 길을 따르라.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로 가실 때 백성과 및 예수님을 위해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도 따라왔다(27절). 예수님의 수난을 많은 백성들이 애통해할 때 특히 여자 무리들이 더 애통해했다. 당시 여자들은 많은 천대를 받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에서는 12제자보다 더 몸과 마음으로 가까이했다. 그 장면은 소외되고 천대받는 사람이 하늘나라의 확장에 더욱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음을 교훈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슬피 울면서라도 따르라. 세상 끝 날까지 나와 함께 하실 하나님과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할 작정을 할 때 인생은 가장 가치 있게 된다. 헌신이 없이 위대해질 수는 없다. 성공한 사람들은 대개 지식과 재능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헌신을 아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유능한 사람보다 거룩한 비전에 헌신하는 사람을 찾으신다. 내 모든 현실이 다 의미 있는 줄 알고 그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비전을 위해 헌신하면 반드시 쓰임 받게 될 것이다.
2. 미래의 심판을 대비하라
여자의 큰 무리가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면서 따를 때 예수님이 돌이켜 그들을 향해 말씀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28절).” 왜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셨는가? 예수님을 거절해서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을 대비하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인류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길을 자원하셨지만 그래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스라엘 민족의 죄는 심판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 다가올 심판으로 인한 고통을 생각하고 그들의 무지한 태도에 대해 성찰하며 애통해하라는 뜻이다.
무서운 심판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울면서 회개하는 길이다. 회개의 눈물이 심판의 눈물을 막아준다. 회개가 미래의 심판을 막아줄 핵심 요소임을 생각할 때 결국 참된 회개자가 참된 예언자다. 예언을 미래의 일을 정확히 맞추는 점처럼 여기지 말라. 미래의 일을 어쩌다 맞출 수는 있어도 늘 정확히 맞추는 사람은 역사상 한 사람도 없었다. 참된 예언적인 삶은 미래를 점치는 삶이 아니라 미래를 준비하는 삶이다. 참된 예언자도 미래를 점치는 사람이 아니라 미래를 준비하거나 준비시킴으로 승리와 행복의 길로 이끄는 사람이다.
1992년에 성도가 휴거된다고 주장한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당시에 미래를 다 아는 예언자처럼 행세했다. 그러나 그때 이후의 모습은 뿔뿔이 흩어진 가족, 하나님에 대한 회의, 거짓과 비윤리로 인한 타락과 마음의 상처, 현실을 힘 있게 헤쳐 나가지 못하는 미성숙 등으로 귀결되었다. 그들은 거짓 예언자였다. 미래의 일을 정확하게 알 수도 없지만 그렇게 알아도 미래의 현실을 대처하고 극복할 능력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미래를 잘 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 미래를 잘 예측하려는 것도 미래를 잘 대비하기 위해서다.
미래를 잘 대비하라. 주일에 예배하고 주중에는 일터를 기도처로 삼고 일하면서 기도하라. 주중에도 기도한다고 교회에 나오지만 정작 자기 맡은 일을 소홀히 하거나 등한시하면 어떻게 예언자적인 삶을 살겠는가? 땀이 없는 위로는 쾌락 주사나 마약처럼 될 수 있다. 게으름은 결코 위로의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주어진 시간을 그냥 흘리지 말라.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란 명예에 사로잡혀 일터를 기도처로 삼는 원리를 외면하지 말라. 기도한 후에 일하고 일하면서 기도하라. 피와 눈물과 땀이 겸비될 때 미래의 심판을 잘 대비할 수 있다.
3. 예수님의 좌우편에 있으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님과 함께 끌려갔다(32절). 그들이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십자가에 못 박아서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게 되었다(33절). 두 행악자가 구체적으로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는 언급되지 않지만 마태와 마가는 그들이 강도였다고 기록했다. 아마 살인강도였을 것이다.
왜 누가는 예수님의 처형 장소를 정확한 지명 대신 ‘해골이라 하는 곳’이라고 표현했는가? 그곳은 예루살렘 성 밖의 공식 처형 장소로서 해골이 많았기에 해골이란 지명이 붙여졌을 것이다. 그곳을 라틴어 성경 번역본인 벌게이트(Vulgate)는 갈보리(Calvary)라고 표현했고 마태와 마가는 히브리말로 골고다라고 표현했다. 그때 예수님의 좌우편에 강도가 함께 십자가에 달렸는데 그 좌우편 자리는 사실상 예수님의 제자들이 있어야 할 자리였다.
왜 그때 예수님 곁에 12제자가 아무도 없었는가? 십자가의 죽음이 두려워 다 도망갔기 때문이다. 죽을 때는 예수님의 좌우편에 없고 영광을 받을 때만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으려는 것이 문제다. 왜 불평과 원망이 생기는가? 십자가를 회피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이미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예전에 한 신문에 이런 만화가 실렸다. 공동묘지의 한 무덤에 있는 주검이 “아이, 더워 죽겠네.”라고 하자 옆 무덤에서 대답했다. “야 인마, 너 벌써 죽었어.”
사람이 죄와 율법을 극복하기 위해 아무리 죽으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다. 루터도 죄를 이겨보려고 무섭게 사투했지만 죄를 이길 수 없었다. 그러나 성도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이미 죽은 존재다. 그 사실에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원리가 담겨 있다. 그 원리를 잊으면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바리새인처럼 전락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죄로 인해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지 않게 하라. 성도는 죄에 대해 이겨 놓고 죄와 싸우는 존재다. 이미 확정된 승리를 믿음으로 먼저 마음에서 받아들이면 곧 현실에서도 승리의 역사가 나타난다.
<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까이하라 >
그때 예수님의 좌우편에 있던 두 행악자 중 하나가 구원을 받았다.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있어서 믿음의 고백을 한 것 하나 때문이었다. 구레네 시몬은 얼떨결에 십자가를 졌다가 가문 전체가 큰 축복을 받았다. 그것은 십자가를 가까이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잘 나타낸다. 나의 고통을 하나님이 지워주신 십자가로 알라. 그러면 그 고통의 십자가는 조만간 축복으로 연결된다. 어떤 사건이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을 십자가로 알고 잘 소화하면 놀라운 반전의 역사가 조만간 나타난다.
하나님의 역사에 우연은 없고 필연만 있다. 우연 같은 것도 하나님의 필연의 한 수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자신을 더 이상 하나님으로 여기지 말라. 물론 사람들은 아무도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실제로는 마치 자신이 하나님처럼 모든 일을 처리하려고 한다. 원수도 스스로 처리하려고 할 때가 많다. 그래서 미움과 원한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한다. 미움과 원한과 상처도 하나님께 토로해서 맡기고 원수 갚는 일도 하나님의 손길에 맡기라. 스스로 원수를 갚으려는 태도는 자신을 하나님처럼 여기는 태도다.
선악과 진리 문제에 대해서도 너무 시비하며 싸우지 말라. 사람은 온전한 분별력이 없다. 하나님 편에 서려고 힘쓰고 당장 내가 생각하는 좋은 일을 못해도 일단 사랑과 화평을 앞세우라.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을 찾아가라. 하나님을 찾아가지 않고 인간적인 해결책을 찾으면 문제도 해결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도 되지 않는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거나 원수를 갚으려고 하지 말라. 먼저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온전히 따르려고 하라. 나를 구원하신 구원의 하나님은 나의 매 순간도 인도하시는 섭리의 하나님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의를 위한 손해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상징적인 도구이고 또한 구원의 역사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렸음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도구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사람은 자기 행위와 상관없이 극명히 나눠진다. 예수님의 좌우편 강도가 행위와 상관없이 극명히 나눠진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구원의 역사도 행위와 상관없이 펼쳐진다. 때로는 가족이나 부부 간에도 행위와 상관없는 엄청난 분리와 변화가 일어난다.
어느 날 목회자가 한 부부를 심방했다. 남편은 정신과 의사였고 아내는 변호사였다. 그런 똑똑한 부부는 일반적으로는 예수님을 믿기가 매우 힘들다. 그 부부에게 목회자가 말씀을 전할 때 성령님이 남편에게 역사해서 남편은 자기 죄를 고백하고 통곡했는데 아내는 실실 웃고 있었다. 목회자가 그 모습을 보고 구원은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다.
구원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구원의 문제는 물론 어떤 문제도 온전히 해결할 수 없다. 사람의 힘으로는 술 담배조차 멀리하기 힘들다. 모든 일을 혼자 하려고 하지 말라. 혼자 하려고 하면 속만 더 상한다. 어떤 부인은 교회에 나오지 않고 속만 썩이는 남편을 바꾸지 못해 속썩어한다. 그때 너무 속썩어하지 말라. 나를 바꾸기도 힘든 사람이 어떻게 남을 바꾸겠는가? 사람은 사람을 바꾸지 못한다. 그러나 성령님이 역사하시면 순식간에 오랫동안 속 썩이던 문제가 시간과 돈도 들지 않고 해결된다.
강도의 극적인 변화를 생각하며 인내와 소망을 잃지 말라. 사람은 사람을 바꾸지 못해도 성령님은 바꾸실 수 있다. 성령님이 역사하면 눈물 한번 없었던 냉혈한 지식인도 은혜에 감격해 눈물을 흘린다. 사람의 사상은 콩깍지와 같다. 콩깍지를 먹으면 영혼이 배부르지 않다. 말씀의 완두콩을 먹으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살 때 영혼이 풍성해진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사는 한 명이 이익만 좇아 사는 만 명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한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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