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일꾼이 되는 길


 


본문말씀 : 누가복음 11장 14-26절


14 예수께서 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놀랍게 여겼으나 15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16 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3)표적을 구하니 17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23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24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25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26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 자기 일을 즐기며 하라 >

 사명이 큰 것보다 사명에 충실한 것이 더 중요하다. 사명을 따라 자기 맡은 자리에서 자기 일을 할 때는 즐겁게 하라. 어떤 사람은 짜증내지 않고 맡은 일을 취미처럼 즐겁게 한다. 그런 사람이 결국 인정과 사랑을 받는다. 억울한 일이 있어도 그 일에 연연하지 말고 즐겁게 살면서 내게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면 하나님이 나의 모든 한과 상처를 씻어 주시고 문제도 해결해 주시고 더 큰 축복도 안겨 주실 것이다.

 몇 년에 걸쳐 매주 2회 방영되는 대하 역사 드라마를 위해 매주 원고지 약 200매 분량의 대본을 써야 한다. 일반인은 “매주 어떻게 그 많은 분량의 대본을 쓸까? 스트레스가 엄청나겠다.”라고 생각하지만 탁월한 드라마 작가는 그 일을 즐기며 한다. 필자도 <성경전권강해>를 완성하려면 매주 원고지 약 200매 분량의 말씀 원고를 한 주도 빠짐없이 30년을 써야 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가끔 묻는다. “목사님! 스트레스가 심하지 않나요?” 그러나 즐기면서 하니까 큰 어려움 없이 지금까지 약 85%를 완성할 수 있었다.

 매달 <월간새벽기도> 한 권 집필도 쉬운 일만은 아니다. 그런데 말씀을 통해 독자들이 힘을 얻는 얘기를 들으면 힘이 난다. 또한 후원금을 보내면서 “말씀에 감사해요.”라는 글을 보내오면 역시 기쁨과 보람을 느끼고 힘이 나면서 즐겁다. 자기 일을 즐기면서 하라. 사람들은 자기 일을 즐기면서 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맡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은 더 좋아한다. 더 나아가 남이 피하는 일을 기꺼이 꾸준히 감당하는 사람은 가장 좋아한다.

< 좋은 일꾼이 되는 길 >

 좋은 일꾼으로 잘 준비된 사람을 깊은 만남의 대상으로 삼고 자신부터 잘 준비된 사람이 되라. 좋은 일꾼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표적 신앙을 버리라

 예수님이 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자  무리들이 놀랐다(14절). 그때 몇몇 사람이 예수님의 능력을 비하하며 말했다.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15절).” 그때 다른 몇몇 사람은 예수님을 시험해서 하늘로부터 오는 화려한 표적을 구했다(16절). 그것은 그들이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낸 예수님의 기적을 하찮게 여겼다는 암시다. 또한 당시 예수님의 대적들도 귀신을 쫓아내는 기적을 행했다. 그것은 귀신을 쫓아내는 행위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증거나 표식이 아님을 잘 말해준다. 그래서 표적 중심적인 믿음은 위험하다.

 예전에 한 대형교회 지교회에서 대형교회 담임인 A 목사가 부흥회를 할 때 많은 동네 사람이 몰려왔다. 그때 한 교인이 특송으로 가곡을 하자 A 목사가 수많은 교인이 지켜보는 데서 지교회 목사 뺨을 무섭게 때렸다. 그때 A 목사 주위로 7-8명의 우람한 경호원이 있었고 뺨을 맞은 지교회 목사는 무릎을 탁 꿇었다. 그 모습을 보고 수많은 교인이 상처를 입고 환멸을 느꼈다. 절대 왕조의 왕 같은 모습 때문이었다. 그때 한 성도가 말했다. “아무리 기적을 일으켜 준다고 해도 저는 그분에게서 안수 받지 않겠습니다.”

 기적 중심적인 신앙을 추구하다가 더욱 중요한 것을 놓치지 말라. 목사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목사의 타인 감수성과 인간성도 중요하다. 외적인 것만 보고 사람을 우상화하지 말고 먼저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영혼의 시력을 좋게 만들라. 보이는 표적에 휩쓸리지 말라. 사탄은 표적으로 예수님도 미혹했다. 보지 않고도 진실하게 믿는 것이 훨씬 복됨을 깨닫고 교회를 섬길 때도 화려하게 섬기기보다 은밀하게 섬기기를 즐기라.

2. 예수님 편에 확실히 서라

 본문 23절을 보라.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과 사탄 사이에서 중립적 자리는 없다는 암시다. 사람간의 정치적 주장에서는 절대 선과 절대 악이 없기에 각자가 조금 더 선하고 바르게 여기는 편을 선택한다. 또한 오늘은 이쪽 편이라도 내일은 저쪽 편을 선택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님과 사탄 사이에서 선택할 때는 예수님 편에 확실히 서라.

 예수님 편에 확실히 서는 것이 사탄 편에 선 사람을 무조건 배척하거나 진멸하라는 뜻은 아니다. 사탄이 진멸 대상이지 사탄 편에 선 사람이 진멸 대상은 아니다. 사탄 세력의 앞잡이와 사탄 세력에 미혹당해 사로잡힌 영혼은 다르다. 사탄에 사로잡힌 사람은 죽기 전에 얼마든지 예수님 편으로 돌아올 수 있기에 극단주의를 버리고 조금의 회개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진멸하기보다 회개시키려고 하라.

 영어에서 파트(part)는 ‘일부’란 뜻이고 파티(party)란 ‘일부 무리’ 혹은 ‘일부 무리가 모인 것’이란 뜻이다. 모두가 다 어울릴 수 없기에 일부 뜻이 맞는 사람끼리 어울려 지낼 수 있다. 그러나 파티가 극단화되어 우리 외에 남들은 다 열등하거나 나쁘다고 여기는 같은 어원의 파쇼(fascio), 파시스트(fascist), 파티잔(partisan,빨치산)은 되지 말라. 극단주의는 교만의 산물이다. 삶의 극단주의는 피하되 구원의 진리 문제에서는 예수님 편에 확실히 서라. 인간관계에서도 좋은 친구라고 확신하면 그 친구 편에 확실히 서 주라.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명백한 상황에서 “둘 다 좋아요.”라고 하는 것은 폭넓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불의도 품는 것이 아니다. 좋은 친구 편에 확실히 서려고 다른 친구를 어쩔 수 없이 멀리해야 하면 멀리하되 그 멀리하는 친구를 경시하거나 미워하지 말라. 시련 중에 남들이 다 떠날 때 찾아와주는 친구는 가까이하고 외면하는 친구는 더 이상 연연해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지 말라. 어쩔 수 없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는 과감히 바른 편을 선택하라. 그처럼 예수님 편에 확실히 서라.

3. 모으려는 태도를 가지라

 예수님은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라고 말씀하셨다(23절). 이 말씀에서 ‘헤친다’는 말은 ‘해를 입힌다(해친다)’는 말이 아니라 ‘흩어놓는다’는 말이다. 예수님께로 사람을 모으는 태도가 없는 것은 결국 흩으려는 태도다. 내가 선택한 공동체가 바른 편에 있는 공동체라고 확신하고 선택했으면 최대한 흩으려는 태도를 버리고 모으려는 태도를 가지라. 그래서 공동체 선택은 처음부터 신중하게 하라.

 어떤 사람이 신중하게 교회를 선택했다. 선택해 보니까 잘 선택한 것 같았다. 교회가 완벽하지는 않고 약점과 허물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바른 길로 가는 것이 분명했고 교회 및 담임목사의 비전과 철학도 잘 맞는 것 같았다. 그래서 열심히 모으려는 태도를 가지고 20년 이상 교회를 섬겼다. 그런데 후임 목사가 와서 바른 길로 가는 것 같지 않아 자신에게서 조금씩 흩으려는 태도가 나왔다. 결국 깊은 고민과 기도 끝에 모으려는 태도를 새롭게 가지려고 교회를 옮긴다면 그 선택을 하나님은 좋게 여겨 주실 것이다.

 교회를 자주 옮겨 다니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계속해서 모으려는 태도를 가지려고 기도하고 노력해도 본의 아니게 자꾸만 흩으려는 태도가 나오면 깊은 고민과 성찰 끝에 모으려는 태도가 나오게 되는 교회로 옮겨도 된다. 그 결정에 대해 남도 정죄하면 안 되고 나도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현재 내가 신중하게 선택한 공동체에서 모으려는 태도를 힘써 실천하는 것이다.

 교회 생활에서 모으려는 태도를 바탕으로 공적인 모임을 사적인 모임보다 앞세우라. 교단에서도 마찬가지다. 교단에서 힘 있는 목사가 총회에는 잘 참석하지 않으면서 공감과 소통을 위해 다른 기도 모임을 따로 만들자는 것은 본의 아니게 흩으려는 태도가 될 수 있다. 교회 야유회는 가지 않고 개별 산행 모임을 따로 만들거나 주일성수는 하지 않고 개별 기도 모임을 따로 만들지 말라. 기본적으로 공동체에서 모으려는 태도를 삶의 틀로 삼으라.

4. 성령 충만을 사모하라

 불신자에게 귀신이 쫓겨나간 것은 영구적인 상황이 아니기에 귀신은 언제나 불신자에게 다시 들어올 수 있다(24절). 그러므로 일시적으로 귀신이 쫓겨나갔다고 안심하거나 교만하지 말라. 오히려 깨끗하게 청소된 심령에 성령으로 충만해지지 않으면 나간 귀신보다 더 악한 일곱 귀신이 들어가 나중 형편이 이전 형편보다 더 나빠질 수 있다(26절).

 불교에서는 비우는 것을 중시한다. 그러나 성도는 나쁜 것을 비우는 것도 잘해야 하지만 좋은 것을 채우는 것은 더 잘해야 한다. 무엇이든지 빈 곳에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채워지게 되어 있다. 권력도 좋은 권력이 무책임하게 자리를 내놓으면 나쁜 권력이 그 자리를 차지해 나쁜 일을 벌인다. 그러므로 좋은 리더가 권력을 얻도록 다니엘처럼 기도하고 성도답게 행동하라. 늘 깨어 경성해서 좋은 것을 영혼과 공동체에 채우라. 영혼과 공동체를 깨끗하게 비워 놓고만 있으면 나쁜 힘이 들어와 지배당한다.

 가만히 넋 놓고 있지만 말고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악과 싸우고 선을 채우라. 무엇보다 성령 충만을 간절히 사모하라. 다만 은사가 나타나고 병을 고치는 것을 다 성령 충만의 표식으로 오해하지 말라. 마태복음 24장 24절을 보면 말세에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성도들을 미혹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말세에 가까워질수록 표적과 기사를 선전하고 과시하는 것을 지극히 주의하고 이단 교주를 잘 분별해 내도록 성령 충만의 증거를 표적과 기사에 두지 말라.

 참된 성령 충만은 힘써 복음을 전하면서 고난에도 위축되지 않고 감사가 넘치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기뻐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사람은 가는 곳마다 화해의 역사도 일으키고 분위기도 밝게 만든다. 또한 교회와 교우에게 기쁨을 주려고 소리 없이 헌신하기에 아름답게 보이고 심지어는 불신자도 아름답게 본다. 잘사는 것과 잘 사는 것은 다르다. 돈이 많으면 잘사는 것이지만 많은 영혼을 구원하고 변화시키면 잘 사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마음을 얻고 교회를 신실하게 섬기면서 잘 사는 성령 충만한 성도가 되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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