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을 부르는 길





본문말씀 : 레위기 20장 1-9절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또 이르라 그가 이스라엘 자손이든지 이스라엘에 거류하는 거류민이든지 그의 자식을 몰렉에게 주면 반드시 죽이되 그 지방 사람이 돌로 칠 것이요 3 나도 그 사람에게 진노하여 그를 그의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이는 그가 그의 자식을 몰렉에게 주어서 내 성소를 더럽히고 내 성호를 욕되게 하였음이라 4 그가 그의 자식을 몰렉에게 주는 것을 그 지방 사람이 못 본 체하고 그를 죽이지 아니하면 5 내가 그 사람과 그의 권속에게 진노하여 그와 그를 본받아 몰렉을 음란하게 섬기는 모든 사람을 그들의 백성 중에서 끊으리라 6 접신한 자와 박수무당을 음란하게 따르는 자에게는 내가 진노하여 그를 그의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7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8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이니라 9 만일 누구든지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 그가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였은즉 그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1. 자발적으로 헌신하라

 하나님은 자기 자식을 몰렉에게 주면 반드시 돌로 쳐서 죽이라고 했다(1-2절). 당시 가나안 땅에 몰렉 숭배가 퍼진 이유는 헌신의 의미를 오해했기 때문이다. 즉 짐승을 번제로 바쳐도 대속의 은혜를 입는데 사랑하는 자식을 번제로 바치면 더욱 큰 대속의 은혜를 입는다는 몰렉 숭배자의 미혹 때문이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위선과 겉멋에 사로잡힌 이단 교주의 헌신 선동에 미혹되었기 때문이다. 이단의 헌신은 보통 교회의 헌신보다 겉으로는 더 대단하게 보이지만 아무리 대단하게 보이는 헌신도 비윤리적이고 강요되면 이단적인 것이다.

 자발적 헌신과 강요된 헌신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다. 예를 들어 옛날에는 성 추행이 몇 년씩 감옥에 갈 정도의 문제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점차 성 인지 감수성이 중시되면서 성 추행이 큰 문제란 인식이 생겼지만 아직도 그런 인식이 부족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남녀 사이에 매일 무수히 벌어지는 혼전자나 혼외자의 깊은 성적인 관계 사례도 범죄가 아닌데 그보다 훨씬 성적인 접촉 강도가 덜한 성적인 추행 사례가 무엇이 그리 큰 범죄냐고 생각한다.

 두 사례는 자발적인 행위인가 아니면 강제적인 행위인가의 차이로 범죄 유무가 갈린다. 비록 도덕적으로 잘못된 깊은 성적인 관계라도 자발적인 행위는 범죄가 아니지만 옅은 성적인 추행이라도 강제적인 행위는 범죄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법정에서도 “자발적인 행위냐? 강제적인 행위냐?”라는 문제로 공방을 벌인다. 그때 거짓말을 해서 무고를 성 범죄로 몰아도 안 되고 성 범죄를 무고로 몰아도 안 된다.

 미국에서는 고화질과 고해상도의 수백 만 건의 포르노 사진과 디스크가 길거리 상점에서 버젓이 팔리는데 그보다 훨씬 화질과 해상도가 떨어지는 몰카는 범죄로 취급해서 몰카를 찍거나 유포하면 몇 년씩 징역을 살린다. 왜 그런 차이가 생기는가? 자발적으로 찍은 것이냐 아니면 강제적으로 찍힌 것이냐의 차이 때문이다. 그런 사례들은 자발적인 것과 강제적인 것이 얼마나 큰 판단 기준의 차이를 낳는지를 깨닫게 한다.

 헌신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자발적인 헌신은 내게도 기쁨이 되고 교회와 하나님께도 기쁨이 되지만 강요된 헌신은 기쁨이 되기보다 마음을 찜찜하게 만들고 나중에 정신을 차리면 영혼과 정신이 추행당한 기분이다. 그래서 부흥사의 강요적인 헌신 분위기에 휩쓸려 집을 팔아 건축헌금을 했다가 나중에 정신을 차린 후 부부 갈등이 생기고 재정 압박으로 믿음생활에 갈등과 회의가 생기면서 후유증에 시달리는 교회와 교인이 많다.

 강요된 헌신은 대단할수록 나중에 정신을 차리면 영혼과 정신이 더 털린 기분이 들어 무의식적인 좌절감이 더 커지고 하나님도 기뻐하시기보다는 아파하신다. 이단 교주가 뱀 같은 혀로 강요하는 헌신에 미혹되면 영혼과 정신과 물질을 다 털릴 정도로 헌신한다. 그러면 이단 신자가 일반 교인보다 더 대단하게 헌신하는 것 같지만 사실상 강요적인 헌신은 대단할수록 이단 교주만 속으로 쾌재를 부르지 하나님은 더 마음 아파하신다.

 몰렉 숭배자들은 자식을 바칠 정도로 대단하게 헌신해서 더 복을 받을 줄 알지만 그것은 큰 착각이다. 잘못된 헌신이나 강요적인 헌신은 아무리 대단해도 하나님의 마음을 더 아프게만 한다. 자기 것을 다 드리고도 교주의 배만 불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면 그것처럼 불행은 없다. 이 땅에 살면서 다른 불행은 다 맞이해도 이단 교주에게 미혹되는 불행만은 없도록 간절히 기도하며 자기 영혼을 힘써 지키라. 헌신은 자발적이어야 한다.

2. 하나님을 명예롭게 하라

 자식을 몰렉에게 준 몰렉 숭배자를 죽일 때는 그 지방 사람이 돌로 치라고 했다(2절). 그런 행위를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히고 하나님의 성호를 욕되게 한 행위로 여기셨기 때문이다(3절). 만약 자기 자식을 몰렉에게 주는 것을 그 지방 사람이 못 본 체하고 그를 죽이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 사람과 그의 권속에게 진노하여 그와 그를 본받아 몰렉을 음란하게 섬기는 모든 사람을 그들의 백성 중에서 끊겠다고 하셨다(4-5절). 이렇게 엄중한 징벌을 내리신 것은 자기 영성과 헌신의 과시가 얼마나 주의해야 할 것인지를 잘 교훈한다.

 사람이 높아지면 하나님이 낮아진다. 사람이 억지와 위선으로 칭찬 받으려는 행위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행위다. 또한 상식적으로 헌신한다는 명목으로 진짜 자기 자식을 죽여서 몰렉 신에게 바치는 것은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도 상식에 벗어난 범죄다. 하나님은 상식에 벗어나고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잘못된 행위를 헌신이나 훈련이란 명목으로 행하는 것을 하나님의 성소와 이름을 더럽히는 것으로 여기셨다.

 담대함을 가르친다면서 술집에서 소리치며 전도하다가 욕먹기, 인분 먹기 훈련 등을 하고 또한 가정에 얽매이지 말라면서 부모 뺨을 때리기 훈련 등을 하는 것은 훈련이란 명목으로 하나님의 성소와 이름을 욕되게 하는 행위로서 구약 시대에는 죽여야 할 죄였다. 기독교는 보편적인 상식과 윤리와 도덕을 말살하지 않고 존중하는 종교다. 헌신과 훈련이란 명목으로 보편적 상식과 윤리와 도덕을 말살하면서 “예수 이름으로 귀신아 물러가라.”라고 하는 것도 예수님의 이름과 교회를 더럽히는 반 기독교적인 이단 행위다.

 성도는 상식과 도덕과 윤리보다 더 높은 기준의 삶을 살려고 해야 한다. 위선을 부리지 않으면서도 체면도 차릴 줄 알고 염치도 있어야 한다. 불신자 앞에서 내가 잘못된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라. 부끄러운 행동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거짓말과 거짓 행동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전도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은 바른 믿음이 아닌 이단적인 믿음이다. 욕심에 젖어 살면서 ‘오직 예수’를 자기 영성 과시의 구호로 삼으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지 말고 진실하고 충성된 삶으로 믿는 사람답다는 말을 들으며 하나님을 명예롭게 하라.

3. 스스로를 깨끗하게 하라

 하나님은 몰렉을 숭배하는 것도 가증이 여겼지만 신비주의 신앙도 가증이 여기셨다. 그래서 접신한 자와 박수무당을 음란하게 따르는 자에게 진노해서 그를 그의 백성 중에서 끊겠다고 하셨다(6절). 하나님은 신비주의 이단 교주를 따르지 말고 스스로 깨끗하게 해서 거룩하라고 하셨다(7절). 왜 하나님이 규례와 말씀을 주셨는가? 성도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선택된 백성을 말씀으로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다(8절).

 말씀을 남을 비추는 거울이 아닌 나를 비추는 거울로 삼으라. 말씀으로 남을 함부로 비판하지 말라. 남의 도덕성 비판도 주의하라. 그 비판은 부메랑이 되어 내게 돌아온다. 내가 남을 공격한 말이 나중에는 올무가 되어 나를 얽어맨다. 가끔 방송 프로그램에 나온 토론 패널들이 남에 대해 비판하는데 어떤 때는 수위가 너무 높아서 나중에 틀린 사실로 밝혀져 명예 훼손으로 고소당하면 어떡하려고 저렇게 말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요새 정치를 보면 여야가 똑같이 누군가를 좌표로 찍고 그의 과거를 탈탈 터는 식으로 공격한다. 나와 가족의 오래 전 일까지 탈탈 털어 흠이 없을 사람은 없다. 그래서 남에 대해 비판을 많이 하면 나중에 나도 똑같이 털리고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심판 때는 더욱 샅샅이 털린다. 완벽한 잣대나 이중 잣대를 들이대어 남을 비판하면 나도 똑같이 당할 날이 온다. 남을 탈탈 털면 언젠가 혹은 최후의 심판대에서 나도 탈탈 털린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살라.

 내가 한 말이 나중에는 올무가 되어 나를 얽어매기에 비판을 꼭 해야 하면 신중하고 지혜롭게 하고 비판 전에는 꼭 기도하라. “하나님! 잘 비판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고 저의 비판이 잘 수용되는 건설적인 비판이 되도록 상대의 마음도 열어주소서.” 특히 비판이 나의 질투심에서 나온 비판이 되지 않도록 내적인 이중 삼중의 제동장치를 잘 작동시키라. 남이 잘 되는 것이나 나를 앞선 것에 대한 질투심 때문에 비판한다면 너무나 못난 모습이다. 남에게 깨끗하게 살라는 말은 절제하되 내게 깨끗하게 살라는 자기 명령은 단호하게 하라.

4. 부모를 저주하지 말라

 하나님은 부모를 저주하면 반드시 죽이라고 했다(9절). 부모를 저주하고 버리면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 죽는 형벌이 따르지만 부모를 축복하고 섬기면 복이 자기에게로 돌아가 최고의 보상이 따른다. 심은 대로 거둔다. 효자가 효자를 낳는다. 효의 씨를 뿌리면 이 땅에서도 열매를 거두고 하늘에서의 상급은 더욱 찬란할 것이다. 역사상 존경 받는 인물들은 대개 어머니의 깊은 사랑을 받고 자랐다. 그처럼 부모의 사랑을 받는 것도 복된 일이지만 더욱 복된 일은 부모를 사랑으로 섬기는 일이다. 만약 부모가 없다면 하나님과 교회를 부모처럼 사랑하고 섬기라.

 십계명의 5계명에서 부모를 공경하면 잘 되고 장수한다고 했다. 쉽게 말하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사업 성공과 건강 유지의 비결이란 뜻이다. 부모를 어떻게 공경해야 하는가? 기본적으로 부모의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라. 그리고 감사하라. 세월이 흐르면 점차 부모가 힘이 약해지고 실수도 많아지고 생각도 짧아지고 마음도 편협해지면서 급변하는 세상에서 잘 적응하지 못해 힘들어할 것이다. 그런 부모를 불쌍히 여기면서 감사한 마음을 끝까지 잃지 말라.

 부모의 기억력과 창조력과 적응력이 점차 약화되는 것도 잘 이해하고 행동하라. 내가 어렸을 때 부모가 나의 손을 붙잡아 주었듯이 이제는 내가 부모의 손을 붙잡아 드리라. 나중에 부모가 거동을 못하게 되면 그때는 최상의 효도를 할 기회다. 세상에서 제일 복된 일은 자식으로부터 공경 받고 사랑 받는 일이고 제일 저주스런 일은 자식으로부터 공격 받고 설움 받는 일이다. 나의 진실한 공경과 사랑으로 나의 부모를 지구상에서 가장 복된 존재가 되게 하라.

 앞으로 효도할 수 있는 기회는 점차 줄어들 것이다. 부모가 살아있고 기억력이 있을 때 잘해 드리라. 나중에 부모가 기억을 점차 잃을 수도 있다. 그때도 잘 해 드리라. 나의 섬김을 부모는 기억하지 못해도 하나님은 기억해주신다. 모든 계명은 끝까지 잘 지킬 수 있는 기회가 있지만 5계명인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언젠가는 이 땅에서 지키려고 해도 지킬 수 없을 때가 온다. 그때가 되기 전에 최선을 다해 부모를 기쁘게 해 드리라.

 무엇보다 부모가 나로 인해 하나님께 가까워지게 하라. 신실하게 하나님을 잘 믿는 모습을 보여줌으로 부모에게 힘과 기쁨과 보람을 주고 더 나아가 부모가 신앙생활도 기쁘게 하고 교회도 잘 섬기는 기회를 많이 마련해 드리고 또한 헌금도 많이 하는 뿌듯함을 누리도록 용돈도 많이 드리라. 성경과 역사를 보면 부모를 잘 섬긴 사람은 한결같이 축복 받았다. 효자가 못 되는 일이 없고 불효자가 잘 되는 일이 없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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