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는 헌신할 때 생긴다
본문말씀 : 누가복음 19장 33-36절
33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34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35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 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 권위는 헌신할 때 생긴다 >
본문에서 나귀 새끼가 주님을 태우고 갈 때 사람들은 자기 겉옷을 벗어 길에 펴 드린 것은 헌신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일은 헌신할 때 이뤄지고 성도는 헌신할 때 존귀해진다. 그때 권위도 생긴다. 돈과 자리도 권위를 주고 나이도 권위를 주고 실력과 재능도 권위를 주지만 가장 크게 권위를 주는 것은 헌신이다. 왜 세월이 갈수록 어머니는 가치가 올라간다는 옛말이 있는가?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삶 때문이다.
오래 전에 서울에 최고 명문대를 나온 한 며느리가 있었다. 그녀는 못 배운 시어머니가 어떤 일을 시키면 자주 대꾸했다. “어머니! 그건 상식과 이치에 안 맞아요. 그건 위생적으로 안 맞아요.” 그래도 시어머니는 권위로 눌렀다. “뭐가 안 맞아? 그냥 해.” 그래서 항상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하루는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다투고 너무 속상해서 친구 집에 갔다. 친구는 시어머니가 “얘야, 이래라.”라고 하면 이치에 맞지 않는 일도 “예, 알았어요.”하고 무조건 그대로 순종했다. 그러자 그녀가 친구에게 말했다. “야, 너는 주관도 없냐? 어떻게 말도 안 되는 그런 소리에 ‘예, 알았어요.’라고 하니?”
친구가 대답했다. “이치에 맞아서가 아니라 어머님께 순종하는 것을 하늘의 이치로 알고 순종하는 거야.” 그녀가 말했다. “너 언제부터 이렇게 됐냐?” 친구가 위대하게 보이고 20년 전에 학교에서 놀던 때와는 얼굴빛부터 전혀 달라서 또 말했다. “너 언제부터 하늘의 이치라는 말을 썼어?” 친구가 말했다. “나 요새 교회 다녀.”
그 말을 듣고 그녀는 감탄했다. “교회 다니면 사람이 이렇게 달라지는구나.” 그 친구를 보면서 초등학교도 못나온 시어머니와 맨 날 싸우는 자신이 너무 천하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친구는 “예!” 하고 시어머니 말에 순종해서 시어머니 위에 올라가 있었다. 시어머니를 하늘처럼 받드니까 자신도 하늘처럼 존귀해진 것이다. 결국 친구의 모습을 보고 그녀도 교회를 다니면서 그때부터 시어머니를 어머니처럼 모시고 행복하게 살았다.
헌신은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내 생각에 안 맞아도 하늘의 이치로 알고 순종한다.”라는 말이 얼마나 위대한 말인가? ‘위대한 것’과 ‘성공한 것’은 다르다. 성공이란 대개 명예와 물질과 권세와 인기가 있다는 소유와 관계된 것이지만 위대하다는 것은 인격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유’보다 ‘우리의 인격’에 관심이 많으시다. “내가 무엇을 얻느냐?”보다 “내가 어떤 존재가 되느냐?”가 중요하다.
하나님은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지만 축복이 없어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을 힘써 보호해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그렇게 아니하셔도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라는 고백을 가지고 살라. 항상 이렇게 고백하라. “하나님은 나를 보호해시고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아니하셔도 괜찮습니다.” 그런 고백을 가지고 살 때 그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과 능력과 참된 축복이 나타날 것이다.
사람들은 만사형통과 성공을 좋아하지만 하나님은 나의 성공보다 나의 변화를 더 원하신다. 권능과 기적을 행해도 자신이 변화되지 않고 방언은 천사처럼 해도 믿음 없는 부정적인 말만 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아니하셔도”라는 영적인 언어를 가지는 것이다. 실패해도 낙심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라. 삶의 목적이 이 땅의 성공에 있지 않다. 사업에 실패해도 믿는 일에서 실패하지 않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목적에서 실패하지 않거나 헌신하는 일에서 실패하지 않으면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니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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