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는 길밖에 없다
본문말씀 : 갈라디아서 4장 1-7절
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 은혜 아래에 있으라 >
남을 실족시키는 5종류의 사람, 즉 대장 되려는 사람, 나 없으면 되나 보자는 사람, 남 잘하는 것이 꼴 보기 싫은 사람, 인기정책을 쓰는 사람, 물질에 집착하는 사람에게 어떤 공통점이 있는가? 은혜로운 삶이 부족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란 의식보다는 율법 아래 놓인 종처럼 생활한다는 점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철저한 의식을 가져야 한다.
사도 바울은 율법을 ‘후견인’이나 ‘청지기’라고 표현했다(1-2절). 예수님을 믿고 상속자가 되었어도 율법에 매인 것은 종과 다름이 없는 상태이기에 율법을 넘어서는 은혜를 통해 참된 자유를 온전히 누려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일정 기간까지는 율법의 후견인과 청지기에게 마치 종처럼 가르침을 받고 배우지만 어느 정도 성장하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유업을 온전히 얻는다.
고려 태조 왕건이 어릴 때는 사부로부터 학문과 무술을 배우지만 성년이 되면 사부를 휘하에 거느리게 된다. 그런 역사를 이루도록 예수님이 율법 아래 나시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지불해야 할 죄의 값을 대신 치러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셨다(4-5절). 그러므로 성도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는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6-7절).
바울은 유대 지역에서는 유대인처럼 살았고 헬라 지역에서는 헬라인처럼 살았고 로마 지역에서는 로마인처럼 살았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었는가? 율법을 존중했지만 율법 아래에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율법에 붙잡힌 ‘헛된 자아(ego)’를 버렸고 은혜에 붙잡힌 ‘참된 자신(self)’을 찾았다. 율법 아래에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는 자유 영혼에 신적인 창조성이 덧입혀졌기에 바울은 기독교 초기에 복음의 틀 형성에 핵심 역할을 할 수 있었다.
< 내가 죽는 길밖에 없다 >
어떻게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죗값을 치러 아들의 명분을 얻을 수 있었는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율법의 저주 아래에서 해방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율법의 저주’란 표현은 율법이 저주를 준다는 뜻이 아니라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기에 율법의 저주 아래 놓였다는 뜻이다.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심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은혜를 한 시도 잊지 말라.
영원히 마르지 말아야 할 감격의 샘터가 십자가의 샘터다. 성도는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십자가를 자발적으로 지려고까지 해야 한다. 십자가를 지는 삶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인가? 자기 변화를 우선하는 삶이다. 살면서 자신의 모습이 어떤지를 깨닫지 못하고 “저 사람은 좀 이렇게 변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런 생각을 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변하려고 하라.
어느 날 한 목회자가 말썽을 부리는 교인 때문에 너무 고통스러워서 단단히 결심했다. “내가 그를 변화시켜 새 사람을 만들리라. 아니면 추방하리라.” 그리고 기도했다. “주님! 그를 변화시켜 주소서. 아니면 다른 데로 보내소서.” 그때 이런 감동이 왔다. “나도 그를 고칠 능력이 없어서 죽었다. 고칠 능력은 없었지만 죽을 능력은 있지? 그를 고치는 것보다 네가 죽는 것이 쉽고 빠르단다.”
그 음성을 듣고 그는 기도를 바꾸었다. “주님! 저를 변화시켜 주소서.” 그때부터 목회에 은혜가 넘쳤다. 교인을 변화시키려고 할 때는 괴로웠지만 스스로를 죽이려고 하니까 문제가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고 새롭게 전진할 수 있었다. 나의 변화는 빼놓고 남만 변화시키려고 하면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다. 내가 죽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 십자가의 진리다. 결국 나를 죽이는 기도가 천하를 얻는 기도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