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된 헌금의 원리
본문말씀 : 누가복음 21장 1-4절
1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2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3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 헌금 문제도 중요하다 >
사람이 돈을 어디에 쓰는지를 보면 그의 관심이 어디에 있고 가치관과 인격이 어떤지를 잘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사람이 한 끼 식사에 거액을 지출하면서 소액의 헌금을 아까워한다면 그의 사랑의 진실성을 의심할 수 있다. 믿음 생활에서 헌금은 현재의 믿음 상태를 진단하고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는 핵심 표식이다.
고린도후서 8장을 보면 예루살렘 모 교회가 흉년과 핍박으로 매우 어렵다는 소식이 들리자 유럽의 마게도냐 교회들이 힘써 자원해 거액의 헌금을 모아 예루살렘 교회로 보냈다(1-5절). 그 소식을 전한 후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권면했다.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7절).” 바울이 말한 ‘이 은혜’란 헌금을 뜻한다.
사도 바울은 믿음과 말과 지식과 간절함과 사랑에만 풍성하지 말고 헌금하는 은혜에도 풍성하라고 권면했다. 그러면서 명령은 아니지만 예루살렘 모 교회의 어려운 소식을 들었으면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도록 헌금에 동참하라고 했다(8절). 거리낌 없이 헌금 얘기를 하는 바울을 보라. 꼭 필요한 얘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사가 순수한 마음과 절제된 언행으로 헌금을 도전하면 “왜 돈 얘기를 하지?”라고 거부감을 갖지 말고 성숙한 믿음으로 넉넉히 이해하라.
성경에는 돈과 관련된 말씀이 많다. 특히 복음서에 많다. 예수님도 돈 문제와 관련된 말씀을 많이 하셨다. 그만큼 돈 관리 및 헌금 문제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래도 많은 목사들이 시험에 들까봐 헌금 설교를 피하는 편이다. 필자도 본문 설교를 여러 번 미루다가 누가복음 전체 강해를 끝내야 하기에 결국 뒤늦게 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미룬 것은 직접적인 헌금 설교를 가급적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헌금 문제는 믿음 문제나 사랑 문제와 직결된 중요한 문제로서 피하지 말아야 할 주제다.
< 복된 헌금의 원리 >
어떻게 복된 헌금 생활을 할 수 있는가? 헌금 자체도 중요하지만 헌금 자세도 중요하다. 본문에 언급된 과부의 두 렙돈 헌금이 교훈하는 복된 헌금의 원리는 무엇인가?
1. 자발적으로 드리라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대속할 유월절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며칠 전 성전은 사방에서 유월절 절기를 지키려고 몰려온 순례자들로 넘쳤다. 그때 장사꾼들은 제사 관련 물건들을 팔아 막대한 이익을 챙겼고 그 이익의 일부를 교권주의자들에게 뇌물로 바쳤다. 그때 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꾼을 몰아내는 성전 청소를 하심으로 예수님과 교권주의자들 사이에 긴장이 높아진 상황에서 예수님의 눈에 두 장면이 보였다. 헌금함에 부자들이 헌금 넣는 장면과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장면이었다(1-2절).
성전의 ‘여자의 뜰’에서 ‘유대인의 뜰’로 들어서는 지점에 있는 헌금함에 가난한 과부가 넣은 두 렙돈은 한 고드란트였고(막 12:42), 당시 네 고드란트는 한 앗사리온이고 열여섯 앗사리온은 노동자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이었다. 결국 두 렙돈은 하루 품삯의 64분의 1 금액으로 지금 돈으로는 약 2천 원 정도다. 그때 왜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에 감격하셨는가?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자발적으로 드렸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9장 7절에서 헌금 자세에 대해 권면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바울은 헌금 생활에서 두 가지를 삼가라고 했다. 인색하게 헌금하는 것과 억지로 헌금하는 것이다. 헌금할 때 드리면 더 받는다는 계산적인 마음으로도 하지 말라. 기도가 응답되면 헌금하겠다는 약속도 삼가라. 그저 순수하게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자발적으로 헌금할 때 문제 해결의 은혜도 받고 기도 응답과 비전 성취와 삶의 능력 가능성도 커진다.
2. 소리 없이 드리라
당시 성전 헌금함에 부자들은 습관적으로 생활비의 일부를 넣었지만 가난한 과부는 생활비 전부를 바치면서도 그 사실을 알리며 남을 감동시키려고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냈다. 헌금은 남이 알아주기를 원하는 자랑 수단이 아니고 나의 위치에 걸맞게 드리는 체면치레도 아니다. 참된 헌금은 나의 전 존재를 드리는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헌신하면 어떤 시련과 역경에도 시험에 들지 않는다.
헌금은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내가 인심 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은혜에 대한 행위 간증이다. 나의 봉사도 나의 의를 내세우는 수단이 되면 안 된다. 봉사란 아무 것도 받은 것이 없고 앞으로 받을 것도 기대하지 않고 도와주는 것인데 나는 하나님 앞에 받은 것도 많고 나중에 영생 천국까지 받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위해 봉사한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 나의 봉사가 하나님 앞에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진짜 봉사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 하셨고 지금도 나를 위해 봉사하고 계신다.
하나님 앞에서 봉사한다는 개념보다는 오직 충성만 해야 한다. 그렇게 충성된 사람은 내 것 의식이 없기에 나 자신, 나의 자산, 나의 자녀도 다 하나님의 것으로 여긴다. 그러면 크게 헌신해도 칭찬을 기대하지 않기에 잘 시험에 들지 않는다. 내 것을 드린다고 여기면 남이 알아주기를 원하고 헌금할 때도 인심 쓴다고 여기지만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린다고 여기면 감사패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처럼 드릴 때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공로 의식도 없고 소리도 없이 드리라.
3. 최선을 다해 드리라
본문의 과부처럼 자기의 생활비 전부를 드리는 심정으로 최선을 다해 드리라. 하나님의 일은 내가 드리는 물질을 잘 사용해 멋지게 이뤄진다. 그러므로 사명감을 가지고 물질을 벌어 그것을 하나님의 일을 위한 거룩한 도구로 삼으라. 성도의 핵심 사명은 천국을 확장시키는 것이다. 그 사명이 왜 후퇴되는가?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인색하기 때문이다. 인색하면 아무리 장점이 많아도 후퇴하는 인생이 된다. 받아야 할 때는 받을 줄도 알고 내야 할 때는 낼 줄도 알라.
받을 줄도 모르고 낼 줄도 모르면 복된 인간관계를 할 수 없다. 돈 문제에 인색하면 심리적으로 비뚤어지고 위축되어 점차 후퇴한다. 어려워도 내야 할 때는 당당하게 내고 풍족해도 아껴야 할 때는 힘써 아끼라. 자녀에게 너무 많은 용돈을 주어도 안 되지만 너무 인색하게 길러도 안 된다. 내야 할 때 내지 않으면 남들로부터 계산적인 사람으로 여겨져 소외된다. 많은 소외가 스스로 자초한 인색함의 열매다.
믿음 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헌금에 인색하면 믿음 생활을 잘 하기 힘들다. 복을 탐심 때문에 차버리지 말고 복을 나눔으로 행복한 인생을 만들라. 참된 행복은 하나님께 드리고 사람과 나눌 때 얻는다. 소유하거나 받을 때 생기는 기쁨은 작은 기쁨이지만 드리고 나눌 때 생기는 기쁨은 가슴 벅찬 기쁨이다. ‘소유욕의 소외’는 있어도 ‘소유욕의 행복’은 없다. 참된 행복은 드리고 나누고 베푸는 ‘드나베’의 삶을 통해 주어진다. 기복적인 종교는 ‘소유의 행복’을 추구하지만 참된 기독교는 ‘드림의 행복’을 추구한다.
4. 믿음으로 드리라
가난한 과부가 생활비 전부를 넣은 것은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지?”라는 걱정을 믿음으로 극복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하나님이 자신의 내일의 필요도 채워주실 것을 믿었기에 두 렙돈을 과감히 헌금함에 넣을 수 있었다. 인색한 헌금 생활은 믿음의 부족 때문이고 진실하고 풍성한 헌금 생활은 믿음의 표식이고 믿음의 고백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 믿음으로 내 것을 힘써 드리고 교회에서의 헌금 책임도 회피하지 말라. 헌금은 구체적인 감사 표현으로써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내게는 복의 씨앗이 되면서 영성에 탄력도 준다. 안타까운 사실은 많은 교회가 헌금하는 문제, 헌금을 잘 쓰는 문제, 헌금이 부족한 문제, 헌금을 강요하는 문제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내가 섬기는 교회가 그 문제에서 자유롭게 되도록 신실하고 바람직한 헌금 생활의 모범이 되라.
왜 믿음으로 넉넉하게 드릴 수 있는가? 하나님이 지금까지 지켜 주신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내면에 있기 때문이다. 그처럼 하나님이 앞으로도 지켜 주실 것을 믿고 드리는 삶이 후퇴되지 않게 하라.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인가? 나는 하나님께 드리고 싶어도 영이신 하나님은 내가 드리는 물질을 실제로 받으실 수 없다. 결국 내가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내가 이렇게 많이 받았습니다.”라는 감사 고백을 담아 하나님의 교회와 사역과 비전을 위해 드리는 것이다.
어느 날 한 집사가 마음에 감동이 생겨 새로운 사업 자금으로 쓰려고 비축한 돈을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바쳤다. 목회자가 감동되면서도 인간적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어 말했다. “성도님! 그렇게 바치면 성도님의 비전은 어떡하지요?” 그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목사님! 은혜 받았습니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 그저 소리 없는 감동만 둘 사이에 흐를 뿐이다. 하나님도 그 장면을 감동 가운데 지켜보셨을 것이다. 형식적인 헌금 생활이 아니라 은혜 받은 자로써 힘써 드리는 신실한 헌금 생활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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