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하면 된다

[ 지거 쾨더 : 부활절 아침의 호숫가 ]



본문말씀 : 출애굽기 7장 20-22절


20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행하여 바로와 그의 신하의 목전에서 지팡이를 들어 나일 강을 치니 그 물이 다 피로 변하고 21 나일 강의 고기가 죽고 그 물에서는 악취가 나니 애굽 사람들이 나일 강 물을 마시지 못하며 애굽 온 땅에는 피가 있으나 22 애굽 요술사들도 자기들의 요술로 그와 같이 행하므로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 무속신앙을 멀리하라 >

 애굽에 내린 10가지 재앙 중에 첫 재앙인 나일 강이 피로 변하는 재앙이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모세와 아론이 지팡이로 나일 강을 치자 강물이 다 피로 변했다(20-21절). 그런데 애굽 요술사들도 요술로 똑같이 물을 피로 만들었다(22절). 그들은 눈속임이나 약품 사용 및 사탄의 능력으로 소량의 나일 강물을 피로 변하게 했을 것이다. 이 장면을 보면 왜 점과 각종 거짓 사술을 버려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깨닫게 된다.

 어떤 분이 결혼 일 년 만에 6.25 전쟁이 났다. 전쟁 후 남편의 생사도 모르고 애 하나를 안고 앞으로 어떻게 살지 막막했다. 그러자 점집을 찾아 무슨 소리라도 들어야 마음이 편해졌다. 그렇게 수시로 점집을 찾다가 교회를 다니면서 하나님이 점치는 것을 무섭게 심판하는 것을 깨닫고 점집을 끊었다. 그때 점쟁이는 그 집안에 줄초상이 나고 자녀도 단명한다고 저주를 퍼주었다. 그러나 그 집안에 줄초상은 없었고 나중에 그녀의 아들이 훌륭한 목회자가 되어 모친의 설움과 상처를 씻어주었다.

 사람들이 미래를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운명론과 연관이 깊다. 운명론이란 자신에게 규정된 운명을 거부할 수 없고 미래는 자신의 노력과 상관없이 이미 결정되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운명은 하나님 안에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예수님은 운명을 바꿔주려고 오셨다. 그러므로 운명론에 매이지 말고 예수님 안에서 운명을 바꾸라. 인생은 운명이 결정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과의 인격관계가 운명을 결정하게 된다.

 왜 사람들이 무속신앙과 신비주의에 빠지는가? 영성을 과시하고 신비한 것을 추구하려는 본능 때문이다. 신앙생활에서 제일 주의할 것은 영성을 과시하는 것이다. 신앙이란 하나님을 앞세우는 것이기에 영성의 과시와는 본질적으로 반대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성을 과시하면 가장 영성이 없게 된다. 반대로 늘 자신의 부족한 영성을 안타까워하면 가장 영성이 좋게 되고 하나님의 축복은 결국 그런 사람에게 임한다.

< 바로 하면 된다 >

 요새 어떤 이단 단체의 영성훈련 프로그램을 보면 여러 가지 무속신앙으로 미혹한다. 그 훈련을 받으면 입신을 잘하고, 성령의 9가지 은사를 다 받고, 미래를 보는 예언과 투시 능력이 생기고, 사람 마음을 읽는 투심 능력이 생겨 사람을 척 보면 그 마음을 읽는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을 영성이 높은 일급 성도로 여기지만 그것은 영성을 크게 오해하는 것이다.

 영성(靈性)이란 ‘자기를 영(zero)으로 만드는 성품’이다. 자기를 영으로 만들수록 영성은 높아지고 자기를 높이고 내세울수록 교만과 영적 만성질병에 빠져서 고치기 힘들게 된다. 물론 그런 영적 질병도 죽을 때는 다 고쳐지지만 중요한 것은 죽기 전에 자기를 잘 죽이는 것이다. 자기를 잘 죽이면 고통도 그만큼 죽고 자기가 펄펄 살아있으면 고통도 그만큼 커진다. 그러므로 잘 살려면 먼저 잘 죽을 줄 알아야 한다.

 왜 균형 잡힌 신앙이 중요한가? ‘성장 문제’보다 ‘바른 진리 문제’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전체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의 성장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으면 자기 공동체는 커져도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닫게 만든다. 무조건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라고 하면 영혼을 오도할 가능성도 있다. 예레미야 당시 많은 거짓 선지자들은 “우리는 바벨론을 이길 수 있다. 국제정세를 잘 이용하면 된다.”고 수많은 희망적인 말들을 만들어냈다. 그러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거짓 선지자들에게 몰려갔다.

 반면에 예레미야는 “이러면 망한다.”고 했다. 그처럼 인기 없는 말만 하니까 당시에 예레미야의 편은 거의 없었다. 오늘날로 말하면 예레미야는 교인도 거의 없는 처절한 왕따였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이 예레미야의 편이 되어 주시겠다고 했다(렘 15:11).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과 긍정적인 사고를 일깨우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오도되면 안 된다. 윤리의식과 화합정신이 없이 자기만 성공하려는 무조건적인 긍정주의를 버리고 “바로 해보자! 바로 하면 된다!”라고 하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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