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기보다 주기를 힘쓰라

 

[ 렘브란트 : 동방박사의 경배 ]


본문말씀 : 마태복음 2장 9-12절


9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10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12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 사람이 되신 예수님 >

 어느 날 한 사람이 화재로 아버지를 잃고 자신도 큰 화상을 입었다. 그때부터 마음도 화상을 입어 자신을 저주 받은 존재로 여기고 침묵하며 아무도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성형수술을 하면 원래 얼굴을 거의 회복한다고 해도 그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거의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설득해도 안 되자 얼마 후 아내가 의사에게 말했다. “선생님! 제 얼굴도 남편처럼 망가뜨려 주세요. 남편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나누면 남편도 원래대로 돌아올 겁니다.” 그 말을 의사가 전해주자 비로소 남편이 마음 문을 열었다.

 누군가의 아픔을 이해하려면 그를 위해 무엇인가를 하기 전에 그와 같이 되려고 하라. 사람의 영혼과 마음을 얻고 환경과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려면 ‘무엇을 하는 것’보다 ‘무엇이 되는 것’이 우선이다. 예수님은 죄로 망가진 인간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고 사람과 하나 되려고 스스로의 위치를 잠시 망가뜨리고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신 것으로 끝나지 않고 사람의 친구가 되어 주셨다. 예수님의 대적들은 예수님을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경멸적으로 호칭했지만 예수님은 그 호칭을 거룩하게 만드셨다. 예수님은 회개하는 세리를 바리새인보다 더 하늘나라에 가깝게 여겼고 멸시받던 사마리아인에게 따뜻한 애정을 드러내셨다. 그런 성육신의 삶을 통해 기득권을 존중하면서도 극복하는 삶의 희망을 품게 하셨다. 그러므로 절망 중에도 희망을 품고 예수님처럼 낮은 데로 가서 누군가의 친구가 되어 주라.

< 3종류의 사람 >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좋은 역할과 나쁜 역할을 했던 여러 인간 군상이 나온다. 그들을 3종류로 나누면 각각 어떤 사람인가?

1. 헤롯과 같은 사람

 예수님은 헤롯 대왕 때 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1절). 헤롯은 힘 지상주의와 물질주의와 특권의식에 빠졌고 편집증도 심했다. 심지어는 자신의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둘째 부인 마리암과 두 아들과 첫째 부인의 장남인 안티파터 2세까지 죽였다. 그런 편집증으로 예수님이 만왕의 왕으로 태어난 소식을 듣고 군대를 동원해 베들레헴 경내의 두 살 이하의 남자들을 다 학살했다. 예수님은 그런 어두운 시대에 태어나 빛을 비추며 사셨다.

 시대가 어둡다고 탓하거나 “내가 왜 이런 환경에서 태어났나?”라고 원망하지 말라. 거기에는 하나님의 오묘한 뜻이 있다. 그 뜻을 발견하고 어려운 때라고 느낄수록 ‘악을 탓하기’보다 ‘선을 힘쓰기’에 나서라. 에스더 4장 14절을 보면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말했다.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나님이 나를 이 시대에 지금 섬기는 교회로 보내신 목적이 있고 현재의 가족과 교우를 주신 목적이 있음을 깨닫고 환경을 탓하지 말고 현실 속에서 최선의 결과를 만들라.

2. 교권주의자와 같은 사람

 헤롯 말년의 어느 날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는다고 했다(2절). 그 말을 듣고 헤롯이 메시야의 태어날 장소를 묻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은 금방 그곳이 유대 땅 베들레헴이라고 말해주었다. 당시 교권주의자들은 메시야에 대한 성경 지식은 있었지만 실제로는 기득권을 빼앗길까봐 메시야가 오는 것을 싫어했다. 그처럼 형식적인 믿음과 영성을 내세워 남을 정죄하는 교권주의자의 모습을 버리라.

 믿음이 커지고 영성이 깊어지면 자랑은 줄어들기에 영성과 능력을 자랑하는 사람은 힘써 멀리하라. 인격에 흠이 많고 성공과 성장을 위해 학력도 속이고 치유의 능력도 속이고 40일 아침 한 끼 금식을 하고 40일 금식을 했다고 속이면서 영성을 자랑하는 사람을 따라가는 것은 불나방이 불에 뛰어드는 것처럼 위험한 행동이다. 추종자가 많다고 무조건 따르지 말라. ‘군중 속의 고독’이란 말이 있다. 믿음 문제에서는 ‘군중 속의 고통’이 펼쳐질 수 있다. 치유를 원하면 ‘예수님’을 찾고 ‘치유를 준다는 사람’을 찾지 말라.

3. 동방박사와 같은 사람

 헤롯은 동방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아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자기에게 알려서 자기도 경배하게 하라고 했다(8절). 박사들이 떠나자 다시 그들을 인도했던 별이 나타나서 아기 있는 곳에 머물러 섰다(9절). 그들은 집에 들어가 아기 예수께 경배하고 값비싼 예물을 드렸다. 동방박사의 경배 장면은 예배와 관련된 4가지 중요한 자세를 교훈한다.

 첫째, 외모를 보지 말라. 동방박사들이 왕의 탄생을 알리는 별을 힘써 좇아왔더니 그곳은 왕궁이 아닌 초라한 집이었다. 그 장면을 보고 처음에는 약간 실망했을 것이다. “내가 이런 초라한 곳에 오려고 그토록 먼 길을 달려왔던가? 분명히 왕이 나실 별이었는데.” 그러나 그들은 곧 마음을 가다듬고 집에 들어가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준비한 예물을 정성스럽게 드렸다. 많은 사람이 외적인 화려함에 이끌려 웅장한 예배 장소를 찾지만 초라한 예배 장소로 인도받아도 감사와 찬송과 헌신이 흔들리지 말라.

 둘째, 예배에 생명을 걸라. 왜 동방박사들이 먼 길을 달려왔는가?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였다. 예배란 종교 의식이 아닌 생명을 바쳐 하나님을 만나는 결단과 헌신이다. 결국 예배에서 깨닫게 하는 말씀만큼 중요한 것이 예배드리는 태도다. 예수님과 교회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기쁨과 설렘 가운데 드리는 예배는 비전 성취와 은혜를 가져다주는 최대의 축복 통로다.  

 셋째, 예물을 힘써 준비하라. 그때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11절). 동방박사가 세 명이란 것은 그 예물 숫자로 추정한 것이다. 이 장면은 물질적 헌신도 예배의 중요한 요소임을 잘 말해준다. 예배는 ‘복 받으려고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드리는 것’이다. 인생의 큰 기쁨과 보람이 언제 주어지는가? 받을 때보다 줄 때다. 항상 드리고 나누고 베푸는 ‘드나베의 삶’을 힘써 실천하라.

 넷째, 삶으로 예배를 드리라. 무엇인가를 드릴 때 최고로 드릴 것이 있다. 바로 ‘자기’다. 자신을 감추고 낮추고 드리면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성공적인 예배자가 되기 위한 필수과정이다. 동방박사는 예수님을 경배하고 돌아가면서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해서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갔다(12절). 그처럼 주일에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예배 후에 교회에서 떠나는 순간부터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려는 ‘삶으로 드리는 예배’가 있어야 한다. 축복은 순종적인 성품이 있느냐에 의해 좌우된다.

< 받기보다 주기를 힘쓰라 >

 당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오래 메시아를 기다려왔으면서 왜 예수님을 외면했는가? 순종의 영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메시아를 실제로 기다리기보다는 메시야 사상을 이용해 자기들의 종파 유지에 급급했다. 그들은 종교로 먹고사는 사람들이었고 진리가 아닌 종교적 기득권을 지키려는 사람들이었다. 왜 예수님 당시의 종교인들이 성전 의식과 율법 토론에만 몰두하며 정죄하는 선수가 되었는가? 형식주의와 물질주의 때문이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의 재산은 국가 재산보다도 많았다. 그런 호화판 종교 기득권의 틀에서 아기 예수님은 말구유로 쫓겨났다. 그처럼 예수님을 골방으로 밀어낸 모습이 한국 교회와 교인 속에 있는 것은 아닌지 늘 진지하게 성찰해서 힘을 내세우는 헤롯의 삶과 가식적인 종교인의 삶을 버리라. 그리고 진실하게 예배한 후 삶으로 예배를 드렸던 동방박사의 삶을 추구하라. 무엇보다 ‘받으려는 나’을 ‘주려는 나’로 변화시키라.

 받으려고만 하면 마음이 추해지지만 남을 생각해주고 뭔가 주려고 하면 마음이 아름다워진다. 아름다운 마음은 아름다운 인생을 낳는다. 교회가 구제에 인색하다고 비판하면서 정작 본인은 나눌 줄 모른다면 그 비판은 정당성이 없어진다. 정의감은 사랑으로 드리고 나누는 삶을 바탕으로 해야 빛을 발한다. 사회 혼란을 누가 안정시키는가? 자기 존재와 소유를 드릴 줄 아는 사람이다.

 나는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이면서 더 나아가 사랑을 주기 위해 태어난 존재다. 그런 인식을 가질 때 예수님의 성육신의 증표가 나타난다. 나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렇다면 나는 엄청난 것을 이미 받은 존재다. 그런 존재로서 나의 남은 인생이 받은 것을 되돌려 드리는 인생이 되도록 내가 누군가의 선물이 되게 하라.

 무엇인가를 가진 사람에 비해 나는 가지지 못한 것이 많다. 그런 상황에서도 나의 존재와 소유를 누군가에게 선물로 줄 수 있다면 그것이 믿음의 표식이고 성령의 열매다. 저렴한 물건을 찾는 일은 최대한 힘쓰되 책정된 물건 값을 깎는 일은 최대한 삼가라. 매매 활동도 드림의 정신이 기초가 되게 하라. 누군가 하나님을 찾으려는 공허함을 가진 사람에게 하나님의 현존을 나의 ‘드나베의 삶’을 통해 보여 주면서 성육신에 담긴 하나님의 뜻대로 받기보다 주기에 힘써서 궁극적으로 더 받는 존재가 되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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