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바다로 나아가라
본문말씀 : 출애굽기 8장 25-28절
25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 26 모세가 이르되 그리함은 부당하니이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것은 애굽 사람이 싫어하는 바인즉 우리가 만일 애굽 사람의 목전에서 제사를 드리면 그들이 그것을 미워하여 우리를 돌로 치지 아니하리이까 27 우리가 사흘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되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대로 하려 하나이다 28 바로가 이르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제사를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간구하라
< 타협에 넘어가지 말라 >
애굽에 4번의 재앙이 연속해서 펼쳐지자 바로가 견디다 못해서 모세와 아론을 불러 “멀리 가지 말고 애굽 땅에서 제사를 드리라!”고 1차 타협안을 제시했다(25절). 그러자 모세는 사흘 길쯤 광야로 멀리 가게 해달라고 했다. 그때 다시 바로가 2차 타협안을 내놓았다. “내가 너희를 보내겠다.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희생을 드리라. 그러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28절).”
바로는 모세를 계속 회유하며 적당한 타협안을 제시했다. 지금도 그런 마귀의 회유책이 많다. 복 없는 사람의 큰 문제는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타협적인 자세를 가지는 것이다. 타협은 평화와 화해를 추구하는 자세로 오해되어 그 치명성이 감춰질 수 있다. 그러므로 잘못된 타협에 빠지지 않도록 늘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살라.
4부류의 교인이 있다. 첫째, 발목만 은혜의 강물에 담가놓고 믿는 교인들이다. 그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교회만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한다. 둘째, 무릎까지 은혜의 강물에 담그고 믿는 교인들이다. 그들은 어렵고 힘들면 무릎 꿇고 기도하며 응답도 곧잘 받지만 가치관의 변화는 없다.
셋째, 가슴까지 은혜의 강물에 담그고 믿는 교인들이다. 그들은 감동을 잘 받고 헌신도 곧잘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께 삶을 온전히 맡기지 못한다. 넷째, 온 몸을 은혜의 강물에 담그고 믿는 교인들이다. 그들이 진짜 성도다. 마귀는 오늘도 협박한다. “너무 멀리 가지 말라. 멀리가면 빠져 죽는다.” 그 타협안에 넘어가면 무력해진다. 빠져 죽는 한이 있어도 은혜의 강물에 온 몸을 담글 때 역사가 일어난다.
< 은혜의 바다로 나아가라 >
한국교회가 왜 이렇게 무력해졌는가? 예수는 믿되 멀리가지 않으려는 사람들로 교회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왜 교회가 세상을 바꾸지 못하는가? 너무 멀리가지 말라는 바로의 타협안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왜 천만 교인이 있어도 사회가 어두운가? 은혜의 바다로 멀리 나가 과감히 그 은혜의 바다로 뛰어드는 사람들이 적기 때문이다.
“미친놈이 곰을 잡는다.”는 말이 있다. 뭔가에 미친 사람이 세상을 뒤집는다. 예수님에 미친 사람이 마귀를 때려잡고 세상을 뒤집는다. 멀리 가지 않으려는 사람들로 넘치면 교회는 희망이 없지만 기꺼이 멀리 가려는 헌신적인 사람들이 넘치면 교회는 제 구실을 하고 거룩한 가치관은 회복되고 결국 그들이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체험하게 된다.
요새 현대 교인의 가장 큰 문제는 타협에 의한 ‘신식 예수 믿는 법’을 받아들여 온전히 헌신하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도 바로와 같은 사람은 끊임없이 신실한 성도를 충동질한다. “믿으려면 적당히 믿어라! 주일만 예배드리면 되지 수요예배까지 드리고 더 나아가 새벽예배까지 드리면 언제 가정을 돌볼 거냐?”
또 어떤 사람은 말한다. “예수 믿고 교회는 다니되 너무 유별나게 믿지는 말라. 신앙생활은 하되 광신자는 되지 말라. 너무 티를 내는 것은 꼴불견이다. 믿는다고 술을 끊고 주일날 가게 문을 닫고 예배시간이나 기도시간에 은혜 받았다고 울고 왜 새벽예배까지 참석하며 야단법석을 떠느냐? 너무 그러지 말라!” 그런 말들 중에 수용할 말은 수용하되 어떤 말이 마귀의 타협안으로 여겨진다면 단호하게 멀리하고 더욱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라. 동시에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거룩한 상식을 깨지 않는 지혜를 발휘하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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