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온전히 붙잡으라

 

[ 루카스 크라나흐 : 선한 목자 ]


본문말씀 : 갈라디아서 3장 10-11절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 율법주의자가 되지 말라 >

 불교에서는 윤회설 때문에 살생을 금지한다. 어떤 극단적인 불교 종파는 빗자루로 길을 쓸고 다닌다. 걷다가 발에 벌레가 밟혀 죽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그런 식으로 법을 지키겠다고 하면 파생되는 모순적인 문제가 많이 생긴다. 어떤 스님은 병원에서 항생제를 맞는데 사실상 항생제도 맞지 말아야 한다. 사후에 다른 생명이 된다는 윤회설에 따르면 소나 돼지처럼 큰 생명이 될 수도 있지만 세균처럼 작은 생명이 될 수도 있는데 항생제로 작은 생명체인 세균을 대량으로 죽이면 윤회설을 배척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너무 법을 강조하며 살면 모순 상황에 처할 때가 많다. 사람이 세운 법에는 모순적인 점이나 허점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완벽하게 세운 법이라도 그 법을 완벽하게 지키지 못한다. 구약 율법도 마찬가지다. 사실상 율법의 목적은 완벽하게 율법을 지키라는 것에 있지 않다. 왜 율법이 필요한가? 율법이 있어야 죄가 드러난다. 율법의 임무는 죄를 드러내는 것, 즉 죄인을 붙드는 검찰 역할을 하는 것이다.

 율법의 필요를 아는 사람은 죄를 짓고 “이게 죄구나! 내가 몹쓸 짓을 했구나. 내게 회개가 필요하고 주님이 필요하구나.”라고 하지만 율법을 무시하는 사람은 절실한 회개가 없다. 대개 율법이 살아있는 교회에서 회개운동이 일어나고 율법이 죽은 교회에서는 회개운동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그처럼 율법이 필요하지만 “율법이 구원을 준다.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면 된다.”라고 주장하는 율법주의자는 되지 말라.

 율법의 목적은 지키는 데에 있기도 하지만 율법이 존재하는 더욱 큰 목적은 사람은 율법을 완벽히 지킬 수 없음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 깨달음이 있으면 어떤 행동이 나오는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함을 절감하면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깨닫는다.

< 하나님을 온전히 붙잡으라 >

 사도 바울은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다고 했다(10절). 율법 잘 지키려는 행위가 저주 받을 행위란 말이 아니다. 다만 율법을 다 지킬 수 없기에 결과적으로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저주 아래 있는 셈이란 말이다. 또한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이 저주 아래에 있다는 말씀은 은혜의 필요성과 믿음의 필요성을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사람 앞에서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없다(11절).

 사람이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큰 복이다.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다.”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율법주의자들은 대개 저주를 특히 두려워한다. 마귀, 시험, 저주 등의 말을 많이 쓰는 사람은 대개 율법주의자다. 또한 율법주의자는 믿음과 은혜 가운데 살지 않기에 무엇이든지 잘 참지 못하고 조급하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다. 결국 율법주의자는 참된 사랑이 결핍된 존재다. 율법주의자의 사랑은 대개 육신적인 에로스의 사랑이지 영적인 아가페의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다. 물론 그 말씀이 죄악을 용납한다는 말씀은 아니다. 죄악을 극복해서 최선의 상태로 만들려고 십자가의 희생을 하며 오래 참는 것이 사랑이다. 은혜를 모르고 믿음이 없는 율법주의자는 참고 기다리는 삶이 부족하고 조급하다. 내게 물리적인 힘이 충분히 있어도 그 힘을 동원하면 참된 사랑과 은혜와 믿음의 가치가 훼손되기에 오래 참으며 희생하는 것이 하나님을 온전히 붙잡고 하나님께 온전히 붙잡힌 삶이다.

 하나님은 율법의 행위를 내세운 에로스적인 사랑이 아닌 믿음과 은혜를 내세운 아가페적인 사랑을 기뻐하신다. 그 사랑을 얻도록 늘 예수님의 십자가만 꼭 붙들고 예수님을 인생의 머릿돌로 삼고 나아가라. 옛날에 집을 건축할 때 머릿돌, 즉 모퉁이 돌이 제일 중요했다. 집의 기초인 머릿돌이 든든해야 집이 든든해진다. 더 잘 되는 것과 더 가지는 것에 관심을 두기보다 하나님 앞에 어떤 위치에 설까를 생각하며 예수님을 삶과 가정의 머릿돌로 삼음으로 더욱 의미 있는 내일의 축복을 예비하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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