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성한 이해심을 가지라
본문말씀 : 마태복음 5장 17-20절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말씀대로 살려고 힘쓰라 >
성경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다. 볼테르는 자신의 이성적인 사상과 책의 영향으로 성경은 한 세기 안에 자취를 감출 것이라고 호언했다. 그러나 오늘날 볼테르의 책은 헌 책방에서도 찾기 힘들지만 대영박물관이나 바티칸에 소장된 성경 사본은 가치가 무한대이다. 세상 학문과 철학은 시대를 따라 무수히 변하면서 어제의 진리가 오늘은 거짓이 되지만 성경말씀은 일점일획도 변함없는 온전한 진리다(18절).
옛날에 한 왕이 죽을 날이 되면서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을 가져오는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했다. 얼마 후 맏아들은 흔들기만 하면 대군이 생기는 부채를 가져왔고, 둘째 아들은 돌리기만 하면 돈이 쏟아지는 맷돌을 가져왔고, 셋째 아들은 진리가 담긴 지혜서를 가져왔다. 그때 왕은 사람이나 나라나 진리 안에 있어야 잘되는 줄 알고 셋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맏아들은 힘을 중시했다. 그러나 칼을 쓰면 칼로 망한다. 말씀도 없이 힘만 있으면 평화는 줄고 싸움이 많아진다. 둘째 아들은 돈을 중시했다. 그러나 돈을 의지하면 언젠가 돈에게 꼭 배신당한다. 반면에 돈을 의지하지 않고 말씀 안에 있으면 결국 돈도 따라온다. 말씀이 없는 삶은 기둥이 없는 삶과 같다. 기둥이 무너지면 집이 무너지듯이 소유가 많아도 말씀이 없으면 인생은 곧 무너진다. 반면에 소유가 적어도 말씀대로 살면 곧 길이 열린다.
말씀 안에 사는 성도가 진짜 부자다. 최고로 잘사는 길은 말씀 안에 있다. 말씀을 떠나면 망한다. 말씀 속에 힘과 능력이 있고 길과 답이 있다. 말씀을 떠나면 지혜도 잃고 길도 잃는다. 성경에는 모든 원리와 대답이 다 있다. 성경에는 망하는 원인도 나오고 잘되는 방법도 나온다. 성경은 일점일획이 다 진리의 말씀이다.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말씀대로 살 때 말씀이 약속한 무수한 축복도 그의 것이 된다.
< 풍성한 이해심을 가지라 >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의롭지 않으면 천국에 결코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다(20절). 인간적인 의는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도달할 수 없고 외적인 형식과 타이틀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심지어는 목사나 장로란 타이틀도 천국을 보증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진실이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다. 하나님은 마음의 진실을 보신다.
타이틀보다 마음의 진실과 중심이 중요하다. 요새 비주얼(visual, 보이는 겉모습)에 많이 이끌린다. 인간의 본능이다. 그것을 무시할 수 없다. 형식과 외모도 중요하다. 외모도 힘껏 가꾸라. 외모도 일종의 경쟁력이다. 그러나 최종적인 승리는 역시 진실한 사람의 것이다. 재능은 조금 부족해도 괜찮다. 어떤 재능이 부족하면 다른 재능이 반드시 있다. 그 재능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 전제조건에 ‘진실’이 있어야 한다.
바리새인이 율법을 철저히 지키려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지만 그들에게는 2가지 큰 잘못이 있었다. 하나는 ‘율법을 지키는 삶을 자랑한 것’이다. ‘사랑’의 반대말은 ‘자랑’이다. 형식을 지키는 것을 자랑하면 그때부터 그 형식은 외식이 된다. 또 하나 바리새인의 잘못은 ‘자신을 기준으로 남을 판단한 것’이다. 생각은 자유지만 자기 생각이 절대기준은 아니다. 사람은 다양하다.
이해력은 딸려도 이해심은 풍성해야 한다. 세상을 자기 기준으로 보면 바리새인이 된다. 결국 율법에 사랑이 빠지면 그 율법은 껍데기만 남는다. 율법은 억압을 위해 주어지지 않고 사랑과 자유와 평화를 위해 주어졌다. 율법 부여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고 율법 준수는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사랑의 표현이다. 법을 지킬 때나 법을 지키라고 할 때는 늘 그 바탕에 사랑의 정신이 깔려 있게 하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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