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을 위해 필요한 것





< 성숙을 위해 필요한 것 >

 성도에게 성숙이란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완전함’ 혹은 ‘온전함’이란 표현은 성숙함을 뜻한다. 목회자에게 좋은 교회와 좋은 교인과 좋은 사역이 있는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가장 감사한 일은 성도가 성숙해지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목회의 핵심 목표도 교인을 예수님처럼 만드는 것이다. 성숙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1. 구원

 예수님을 영접해야 죄 사함을 얻고 구원받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1-2절). 죄 사함을 통한 구원은 성장을 위한 기초 씨앗이다. 중생이 없다면 영적인 성장도 없다. 구원이 그처럼 중요한 것이지만 절대적인 것이나 전부는 아니다. 구원파는 구원을 거의 절대시한다. 그들이 가장 중시하는 질문은 “구원받았습니까? 구원을 확신합니까?”라는 질문이다. 구원을 확신하면 구원받은 날짜도 생일처럼 분명히 알아야 한다면서 “언제 구원받았습니까?”라고 묻는다. 그처럼 구원을 중시하지만 구원 이후의 성도다운 삶은 크게 중시하지 않는다.

 구원파의 논리는 초대 교회 때 사도 요한이 가장 주의시켰던 영지주의와 속성이 유사하다. 영지주의는 영적인 지식을 통해 구원받으면 죄와 분리된다고 여겼다. 영지주의자에게는 2개 파가 있었다. 구원받으면 육신을 초월한 존재가 되어 죄를 지을 수 없는 완전인이 된다는 ‘완전파’와 구원받으면 죄가 육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초월인이 된다는 ‘초월파’다. 그들 모두 구원 이후의 성도다운 삶을 경시했기에 윤리성과 도덕성이 약했다.

 한때 구원파가 ‘구원의 확신’을 내세워 스스로를 1등 신자인양 여기며 극성스럽게 전도했기에 그 영향을 받아 구원파가 아닌 교인 중에도 “기독교는 도덕이나 윤리가 아니다. 구원에 대한 강조가 없는 설교는 윤리적인 설교다.”라고 말하며 마치 기독교가 도덕, 윤리, 상식을 경시해도 되는 줄 아는 경우가 꽤 많다. 구원이 전부인 것처럼 기독교를 잘못 알면 구원파가 나오고 사회적인 책임성과 윤리성과 도덕성도 떨어지면서 성숙한 성도의 모습을 상실한다. 구원도 중요하지만 구원 이후의 삶도 중시해야 더욱 성숙해질 수 있다.

2. 순종

 본문 3-6절은 말씀을 지키는 삶의 중요성을 반복해 강조한다. 말씀을 읽고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까지 있어야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바른 지식은 바른 삶을 수반한다. 아무리 입술로 “오직 예수야!”라고 말하고 천사처럼 찬양해도 성숙한 행위가 없다면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행동하고 순종하는 믿음이 중요하다. 미국의 열정적인 찬양과 경배 모임을 보면 많은 은사들이 나타나지만 문제는 집회 후에 성도다운 삶으로 잘 연결되지 않는 것이다.

 불신자들은 성도의 찬양하는 모습보다 사는 모습을 보고 감동하고 존중한다. 삶이 따르지 않고 빛이 드러나지 않으면 선한 영향력도 없다. 초대 교회에는 찬양과 경배와 치유도 있었지만 자기 소유를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고 나눔으로 행동하는 사랑도 넘쳤다. 그런 나눔과 교제로 백성들의 칭송을 받아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이 더해졌다. 영성과 더불어 책임적이고 실제적인 삶의 능력이 있어야 한다. 할 수 없는 일에 대해 너무 염려하지 말라. 할 수 있는 좋은 일을 발견해서 그 일을 하면 얼마든지 복된 삶을 살 수 있다.

 말씀에 순종하려고 힘쓰라. 사람은 ‘기발한 방법’을 찾지만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을 찾는다. 순종이 가장 중요한 가치 중의 하나다. 고난과 문제도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을 주시려고 있게 하셨다고 믿으라.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죽도록 일해도 성공은 자신을 쉽게 기다려주지 않는다. 밤새 수고하는 삶보다 말씀에 의지하는 삶이 먼저다.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따라 십자가를 지고 죽을 각오를 하면 사는 길과 복된 길과 성숙의 길이 펼쳐질 것이다.

3. 시간

 성숙함이란 평생 과정이다. 가시덤불은 40일이면 무성하게 자라지만 참나무는 40년이 되어야 무성하게 자란다. 성숙은 단시일에 이뤄지지 않는다. 응답에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아도 초조해하지 말라. 많은 시간은 많은 인생 경험도 준다. 믿음 생활을 오래 했던 경험도 무시하지 못한다. 오랜 믿음생활을 통해 다양한 체험을 하면서 분별력도 커진다. 쓴 맛의 경험도 중요하다. 그 경험을 통해 사람의 의도와 동기를 파악하는 능력도 커진다. 그런 분별력은 성숙한 성도가 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다.

 어떤 교인은 자기 담임목사를 매우 존경한다. 그때 이단이 신령한 척 말한다. “성도님! 사람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세요.” 말 자체는 신령한 말 같지만 사실상 그 말을 하는 사람의 평소 언행과 의도도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말이 자신의 영성을 드러내려고 하는 말일 때도 많고 교회생활을 잘하는 교인을 그 교회에서 혹은 담임목사에게서 마음을 멀어지게 하려는 말일 때도 많기 때문이다. 이단들은 겉으로는 신령한 말을 하는 척 하면서 사람의 마음을 기존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할 때가 많다.

 분별력은 오랜 신앙생활을 통해 이단의 미혹으로부터 쓴 맛도 경험해본 사람에게 생긴다. 영적인 능력보다 영적인 노련함과 분별력이 더 중요할 때가 많다. 일을 빨리 이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할 때 사고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왜 자동차 보험사들이 청년에게 더 보험료를 많이 내게 하는가? 힘과 스피드와 반응성은 청년이 좋지만 노련함이 부족해서 더 자동차 사고가 많이 나기 때문이다. 노망, 노회, 노파심 등은 좋지 않은 단어지만 노련은 좋은 단어다. 성도는 더욱 성숙해짐으로 영적인 노련미를 갖춰야 한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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