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성수에 감춰진 메시지
[이미지출처: 기독일보 오피니언 "예배에 성공하는 법"]
< 안식일의 참된 의미 >
이단은 정당하게 진리와 진실과 실력으로 승부하기보다 기존 교회를 공격하는 그럴듯한 논리를 주로 앞세워 기존 교인을 미혹한다. “왜 교회는 안식일 대신 주일을 지키는가? 왜 성경에 없는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는가? 왜 성령의 은사와 기적을 무시하는가?” 그런 주장들로 교묘하게 접근하고 미혹해서 사람들의 재산과 노동력을 짧은 시간에 털어먹고 자기 세력을 불린다.
어떤 이단은 수요예배에 대해서도 따진다. “성경 어디에 수요예배를 드리라는 말씀이 있느냐?” 물론 성경에 수요예배를 드리라는 말씀은 없다. 그래도 고난과 핍박이 심했고 지금처럼 다양하게 말씀을 접할 매체가 없었던 시절에 주중에 하루를 정해 예배를 드리면서 생긴 전통까지 잘못된 것처럼 공격하는 것은 그 의도가 선하지 않다. 그런 식으로 이단은 성경을 내세워 기존 교회를 공격하고 기존 성도들을 미혹할 때가 많다.
안식일 논쟁도 마찬가지다. 오래 전 창조 시대의 안식일이 지금의 토요일이라는 증거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일주일의 하루를 안식일로 구별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로 삼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토요일로 삼았고 기독교에서는 안식일을 예수님이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인 주일로 삼았다. 결국 구약 시대에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신약 시대에 주일을 지키는 것은 본질적인 의미와 속성은 같다.
그런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외면하고 주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이 잘못되었고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자기들이 더 바른 진리의 길을 따른다고 하면서 기존 교인을 미혹하는 경우도 얼마나 많은가? 그런 미혹에 넘어가지 말라. 중요한 것은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알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다. 안식일은 일주일의 한 날을 정해서 하나님을 정기적으로 예배하는 날로 삼는 것이다. 그 한 날을 교회에서는 신약 성경의 원리를 따라 주일을 안식하고 예배하는 날로 정한 것이다. 안식일의 중요한 가치는 ‘날짜 자체’에 있지 않고 ‘예배 자체’에 있다.
< 주일성수에 감춰진 메시지 >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일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일도 예배다. 교회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다. 예배는 삶의 활력과 믿음의 능력을 증대시킨다. 예배의 회복은 인생과 가정의 회복을 낳고 사회와 국가의 회복도 낳는다. 결국 주일성수는 ‘쉬는 날(the rest day)’을 ‘최상의 날(the best day)’로 만드는 비결이다. 주일성수에 감춰진 핵심 메시지는 무엇인가?
1. 하나님을 사랑하라
왜 성도가 주일을 지키는가? 주일이란 날짜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왜 자녀에게 주일성수를 가르치는가?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필자는 가정에서 목회자처럼 보이려고 하지 않고 일반인처럼 살려고 했다. 특히 자녀에게 목회자의 자녀라는 굴레를 씌워 극기와 절제의 삶을 살도록 강요하지 않으려고 했다. 새벽기도나 성경읽기도 강요하지 않았고 “네가 목사 딸인데 어떻게 그렇게 행동하니?”라는 말은 일체 하지 않았다. 다만 단 한 가지 요구한 것이 주일성수였다.
얼마 전에 성적이 좋고 모범생이었던 한 여고생이 성적이 떨어진 것을 비관해서 자살을 암시하는 글을 남기고 가출했다. 그 학생을 CCTV에 찍힌 정보들을 취합한 경찰의 공조수사로 몇 백 킬로미터 떨어진 타도에서 며칠 만에 찾아내어 자살사이트를 통해 만난 사람과 동반자살을 꾀하기 직전에 극적으로 구했다. 그 딸의 어머니가 말했다. “이제까지는 좋은 일이 있는 것이 행복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아무 일도 없는 것이 행복이었음을 깨달았어요.”
부모는 성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가르쳐야 한다. 필자는 아이들의 학교 성적표를 이제까지 한 번도 보지 않았다. 무관심해서가 아니었다. 성적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실제로 체감시키기 위해서였다. 그처럼 한국 부모들이 중시하는 성적조차 전혀 보지 않으면서 한 가지만 꼭 하라고 요구한 것이 바로 주일성수였다. 성적에 부모가 집착하면 자녀가 “부모님은 나보다 성적이 더 보셔.”라고 생각하면서 무언의 상처가 남는다. 반면에 주일성수를 꼭 하라고 하면 상처가 안 된다. “우리 부모님은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해서 그렇게 하셔.”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2. 이웃을 사랑하라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이 공격할 틈을 엿보는 상황에서도 안식일에 수종병자를 데려다가 고쳐 보내셨다. 그 예수님의 행위와 교훈에는 안식일이 어떤 날인지에 대한 감춰진 의미가 있다. 즉 안식일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날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람과 생명을 사랑하는 날이기도 하다는 의미다. 안식일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이면서 사랑의 교제도 하는 날이다. 그 안식일의 삶을 이웃 사랑으로 발전시켜 더 큰 안식을 예비하라. 남을 위해 불편함과 귀찮음을 기꺼이 감수함으로 생명력이 충만해지는 것이 궁극적인 안식이다.
육체적인 쉼을 통해서도 안식을 얻지만 힘들어하는 사람의 필요를 채워줄 때도 안식을 얻는다. 즉 하나님 사랑을 이웃 사랑으로 나타내어 누군가의 필요에 응답하면 더 큰 안식을 누릴 수 있다. 또한 안식일에는 종이나 동물도 쉬게 했다. 안식일은 이웃 사랑은 물론 생명 사랑과 자연 사랑을 새롭게 일깨우는 날이기도 하다. 결국 안식일의 의미를 일상에서 잘 적용하려면 자연도 힘써 보호하려고 해야 한다. 환경 파괴는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삶의 터전을 파괴하는 것이고 자연에 내재된 하나님의 은총을 무시하는 것이며 결국 사람까지 파괴하는 것이다.
자연 사랑은 사람의 인격과 시대정신과 신앙심을 어느 정도 알려준다. 작은 들풀과 벌레를 보면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라. 자연은 하나님의 일반계시의 통로다. 자연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 때도 많다. 만물은 저마다 하나님을 드러내는 무언의 메아리다.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과 자연 사랑으로 발전해 나타난다. 타자에게 유익을 주면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도 유익을 얻는다. 자연을 해치지 말고 약자를 괴롭히지 말고 이웃 사랑을 힘써 실천하라. 그런 삶을 새롭게 다짐하는 날로 삼으라는 것이 주일성수의 또 다른 의미다.
3. 자기를 사랑하라
주일성수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메시지도 있지만 “자기를 사랑하라.”는 메시지도 있다. 자기를 사랑하려면 자기를 잘 관리해야 한다. 주일성수는 자기 관리를 위한 대표적인 삶이다. 자기 관리는 시간 관리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 틈새 시간의 여백을 창조적으로 잘 관리하라. 삶의 여백이 삶을 다채롭고 아름답게 만든다. 특히 주일성수를 통해 그 빈틈과 여백에 하나님이 비집고 들어오시게 만들면 그 영혼은 더욱 견고해진다.
가끔 보면 어떤 부흥사는 설교를 2-3시간 한다. 조리도 없고 논리도 없이 사람을 웃게 만들고 감동을 많이 주는 스토리들을 자기 설교에 취해 죽 열거하니까 그렇게 시간이 많이 가는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하는 것을 적확한 설교를 잘 준비하지 못한 수치로 여기기보다 설교 잘하는 것으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그런 긴 설교로 도식적인 웃음과 감동을 주는 것을 “은혜 받았다.”라고 표현한다면 그런 가벼운 은혜가 얼마나 오래 가겠는가? 시간 관리와 말 관리는 여백의 삶을 위한 중요한 실천 덕목이다.
2-3시간 설교를 20-30분 설교로 줄여 똑같은 메시지와 감동을 주려는 땀과 기도의 흔적이 없다면 깊은 말씀을 통한 깊은 삶도 없게 된다. 마음의 빈틈에 하나님이 임할 공간을 제공하기보다 매번 쓰는 부흥 설교 레퍼토리대로 자기 생각과 스토리와 유머로 가득 채워놓는 것을 은혜 받았다고 여기는 것이 오늘날 많은 교인들을 기복적이고 미성숙하게 만든 요인 중의 하나다. 매주일에 듣는 자기 담임목사의 순박한 설교가 잠깐 와서 전하는 부흥사의 화려하고 긴 설교보다 실제로는 영혼을 더 살찌운다. 쉴 틈과 여백도 없이 너무 아등바등 살지 말라.
여백과 침묵을 위한 삶의 공간을 힘써 마련하라. 그런 삶을 위한 가장 좋은 훈련과목이 주일성수다. 주일성수는 깊은 영적인 세계로의 여행과도 같다. 또한 세상적인 삶과 일과 생각과 말에서 잠깐 벗어나 거룩한 합죽이가 되는 통로다. 마음의 빈틈에 하나님을 모시는 주일성수를 중심으로 삶을 재편하고 단순화시키라. 주일성수를 통해 깊이 있는 삶을 추구하라. 그런 깊이 있는 삶을 통해 수준 높은 삶도 펼쳐지고 믿음과 행복도 견고해진다.
< 주일성수에 목숨을 걸라 >
시간을 잘 관리하고 요긴하게 쓰라. 사마천은 역적을 변호했다고 거세를 당했지만 한 맺힌 상태로 살지 않고 그 시간에 책을 썼다. 그것이 130권의 방대한 <사기>다. 존 번연은 12년의 옥고를 치르면서 불후의 명작인 <천로역정>을 썼다. 그런 작업이 자투리 시간을 선용해서 얻은 결과다. 부스러기 시간도 소중히 여겨 선용하는 탁월한 시간 관리자가 되라. 그런 시간 관리의 교과서와 같은 삶이 바로 주일성수다.
주일성수는 모든 좋은 삶의 뿌리와도 같다. 인생에서 약속이 얼마나 중요한가? 작은 약속을 지키는 것은 사람의 싹수를 잘 보여준다. 성도에게 주일성수는 가장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약속으로서 내일의 축복과 행복을 약속하는 예언적인 싹수다. 주일성수의 싹수가 노랗게 되지 않고 파랗게 되게 하라.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주일성수를 하지 못할 형편일 때도 돈에 지지 않고 과감히 주일성수를 앞세우려고 하는 것은 가장 복된 결정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돈에 집착하지 않는 훈련을 다방면으로 힘써 하라. 특히 주일성수를 통해 돈을 극복하는 훈련을 꾸준히 하고 좋은 일에 드리고 나누고 베푸는 삶을 조금씩 훈련하면 그 삶이 얼마나 윤택해지는가? 돈과 성공에 끌려 다니는 이유는 내면의 공허 때문인 경우가 많다. 내면이 든든하면 웬만한 세상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 그런 내면을 갖추려면 가끔 침묵도 하고 자연도 찾아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는 것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주일성수다.
물질에 너무 집착해서 주일성수도 어기고 나눔도 실천하지 못한다면 큰 불행이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려고 하되 주일을 범하거나 가정을 외면하면서까지 돈을 벌려고 하지는 말라. 또한 가정을 돌본다는 명목으로 주일에 교회 대신 교외로 가지 말라. 하나님의 은혜가 진정으로 필요함을 절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주일성수에 목숨을 걸라. 주일성수를 삶의 기초로 삼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면 인물 성도의 삶이 그렇게 멀지 않을 것이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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