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가지 기적의 통로
본문말씀 : 사도행전 3장 1-10절
1.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본문에는 나면서 못 걷게 된 걸인이 40여 세에 기적적으로 일어서는 장면이 나온다. 40여년의 장애를 극복한 걸인의 얘기는 하나님의 사명 이행과 복음 전파를 위해 필요하다면 인생에서 극복하지 못할 단점이 없다는 도전을 준다. 본문의 기적은 사도들이 처음 행한 기적인데 그 놀라운 기적의 통로는 무엇인가?
1. 정기적인 기도
유대인들은 하루 세 번 정기적으로 기도했다. 그 시간은 3시, 6시, 9시로서 오늘날의 오전 9시, 정오, 오후 3시다. 베드로와 요한은 오늘날의 오후 3시인 제9시 기도 시간에 성전에 올라갔다(1절). 그것은 그들이 정기기도를 중시했고 기도를 생활화했다는 암시다. 생활화된 기도는 기적의 핵심 통로다. 다니엘의 지혜의 원천은 무엇인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정기적으로 하루에 세 번 기도한 삶이었다(단 6:10).
기도는 하나님과의 영적 대화이고 영혼의 호흡이기에 항상 기도하면서 특히 정기기도 시간을 가지라. 정기기도를 꾸준히 드리면 누구보다 능력 있는 기도자가 된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언제 하늘의 불을 끌어내렸는가? 제단에 물을 붓고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기다린 후 간절히 기도했을 때다(왕상 18:36). 왜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기다렸는가? 그때는 이스라엘의 저녁 정기기도 시간 때다. 엘리야가 다른 모든 준비를 마치고 정기기도 때까지 기다렸다가 기도한 것은 정기기도의 중요성을 암시한다.
정기적인 기도를 드리는 것은 기도를 생활화하고 있다는 표시다. 문제나 기도제목이 생길 때만 기도하지 말고 기도를 생활화하라. 기도를 생활화하라는 말은 사람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가급적 덜 보이라는 뜻도 있다. 사람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나타내려고 하면 기도의 생활화나 기도 응답의 역사가 멀어진다. 기도는 하나님과 내밀하게 작전계획을 짜는 시간이다. 그 시간이 승리와 기적의 최대 원천이다.
2. 화합하는 마음
제9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에 올라갔다(1절). 그들은 당시에 이미 예수님을 믿고 성령까지 받았다. 그래도 유대인의 기도 관습은 물론 유대인의 성전도 외면하지 않았다. 그것도 훌륭한 점이다.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기존 스타일을 잘 깨는 것을 영성으로 오해하면 특권의식과 비판을 앞세운 이단 교주의 미혹에 넘어가기 쉽다. 한국 교회가 썩었다는 이단 교주의 비판은 대개 기성교회를 깨고 자기 단체로 영혼을 빼앗으려는 것이 목적이기에 문제가 심각하다.
예수님의 이름을 내세운다고 다 믿지 말라. 이적을 행하는 것으로도 믿지 말라.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들도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도 행한다고 했다(마 7:22). 한국 교인은 체험과 현상에 아주 취약한 편이다. 체험과 현상을 무조건 신뢰의 근거로 삼지 말고 그 체험과 현상이 정말 성경적인 것인가를 살피라. 또한 신기한 성경해석도 다 믿지 말고 그런 해석도 성경을 보고 인터넷 검색도 하면서 잘 분별하려고 하라.
화려한 논리보다 중요한 것은 교회의 화합을 위해 애쓰면서 바르고 진실하게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단 교주는 교리 문제보다 윤리 문제로 비난받을 때도 많다. 교인 빼앗기를 일삼고 기본적인 화합 자세가 없다면 아무리 그럴듯한 진리를 내세워도 그 진리는 헛된 진리일 뿐이다. 늘 화합 정신으로 무장하라. 본문의 주인공인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들 중 가장 성격이 극과 극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극과 극이 하나 되면 그들이 속한 공동체는 더욱 능력 있는 공동체가 된다. 그것이 화합의 힘이다.
3. 유연함과 온유함
베드로와 요한이 미문으로 성전에 들어갈 때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구걸했다(3절). 그때 그들은 정기기도 시간에 맞춰 성전에 왔기에 지체할 시간이 없었지만 걸인의 구걸에 반응했다. 그 모습은 그들의 유연함을 잘 보여준다. 너무 치우친 경직된 모습이 없도록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않는 유연함을 가지고 가나안을 정복하라. 법과 질서를 잘 지키면서도 자비와 온유도 잃지 말라. 유연함과 온유함은 사랑의 중요한 표식이다.
유연하고 온유하게 살면 손해 볼 때도 많지만 그 손해가 앞날의 더 큰 아픔과 상처를 미연에 방지해준다. 반대로 경직된 채 악착같이 살면 손해를 덜 볼 것 같지만 언젠가 큰 일이 터지면 순식간에 추락하고 부러진다. 버들가지 같은 사람은 바람을 많이 타지만 그 성향을 잘 활용하면 잘 순종해서 고목나무 같은 사람보다 더 귀하게 쓰임 받는다. 좋은 의미에서 적절한 흔들림은 필요하다. 예전에 63빌딩 59층 연회장에 갔을 때 건물이 흔들려 놀랐는데 고층건물은 그런 흔들림이 있어야 오히려 무너지지 않는다고 한다.
너무 딱딱하게 살지 말고 목표를 세워 전진할 때도 목표 위주보다 사람 위주로 일하라. 베드로와 요한에게 힘없는 걸인은 그들 사역에 거의 도움이 안 되는 존재였겠지만 그들은 그의 구걸에 바쁜 걸음을 멈췄다. 힘없는 사람 앞에서 때로는 힘찬 발걸음을 멈출 줄 아는 온유함을 훈련하라. 사명 이행에 큰 도움이 안 되더라도 어떤 감동이 생기면 누군가를 위해 가던 걸음을 멈추거나 늦추라. 그런 유연함과 온유함이 있는 곳에 치유의 역사도 있다.
4. 거룩한 자존심
베드로와 요한은 걸인이 구걸에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함께 주목한 후 베드로가 “우리를 보라.”고 말했다(4절). 거룩한 자존심과 권세를 가지고 “그를 보라.”고 하지 말고 “우리를 보라. 나를 보라.”고 할 정도로 나를 귀하게 여기라. 또한 나의 거룩한 자존심도 지키면서 전체 교회와 교인의 자존심도 지켜주라. 교인이 가장 하지 말아야 할 말은 “믿는다면서 왜 그래? 교인이 더 나빠.”라는 말이다. 가끔 어떤 교인이 나를 실망시켜도 전반적으로는 교인이 더 좋고 또한 더 좋게 되려는 마음과 의식이라도 있다는 사실을 소중히 여기라.
“교인이 더 문제야.”라는 말로 자기 정체성과 거룩한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것은 교양도 아니고 반성도 아니다. 다른 교인의 잘못을 보면 더 각성해서 “나를 보라.”고 하기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힘쓰라. 아무리 속상해도 “교인이 더 나빠. 교인이 왜 그래?”라는 말을 하는 것은 나의 현재의 정체성과 지나온 삶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성도가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라. 잘못된 어떤 교인 때문에 성도의 소중한 가치에 대해 회의를 품지 말라.
남이 가진 것이나 남의 형편을 너무 부러워하지 말라. 남이 나를 불쌍하게 보면 이렇게 말하라. “생각해주셔서 감사하지만 저는 괜찮아요. 지금도 행복해요.” 남이 나를 부러워할지언정 나는 남을 부러워할 것이 없다는 거룩한 자존심으로 살라. 물론 아무 것도 없이 자존심만 내세워 살면 안 되지만 실제로 성도는 가진 것이 많다. 나를 사랑하는 예수님을 가졌기 때문이다. 요새 많은 사람이 상류사회를 추구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신실한 성도가 진짜 상류사회의 일원이다.
5. 순수하고 굳건한 믿음
베드로가 “우리를 보라.”고 하자 걸인은 무엇을 얻을까 하면서 그들을 바라보았다(5절). 그때 베드로가 말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6절).” 곧 걸인이 일어났다. 기적은 예수님의 이름이 높여지는 곳에서 믿음을 통해 생겨난다. 요즘은 은금이 넘쳐도 “일어나 걸으라.”는 능력은 오히려 사라진 시대다. 언뜻 보면 믿음의 말과 고백이 곳곳에 넘치는 것 같지만 긍정적인 사고방식의 가르침에 의해 유도된 믿음의 말과 고백은 넘쳐도 진짜 믿음과 말과 고백은 오히려 사라진 것이 문제다.
20세기부터 치유기도를 할 때 베드로처럼 기도하는 것이 유행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병마야 썩 물러가라.” 그런 선포로 인해 이단 교주의 거짓 기적과 기적 선전과 그로 인한 기복적인 교인만 늘어나지 실제 기적은 오히려 잘 일어나지 않는다. 참된 믿음과 긍휼도 없이 습관적으로 베드로의 치유 선포만 모방하지 말라. 베드로는 치유 능력을 과시하려고 습관적으로나 모방적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선포하지 않았다. 학자에게는 논문 표절이 가장 나쁜 것이지만 성도에게는 신앙 모방이 가장 나쁜 것이다.
당시 베드로의 귀에는 예수님이 다락방 강화에서 하신 유언의 말씀이 늘 맴돌았을 것이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 그 말씀을 생각하면서 순수하고 담대한 믿음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선포했기에 놀라운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다. 순수하고 굳건한 믿음이 놀라운 기적의 통로다.
6. 응답 후의 헌신
베드로가 걸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자 그가 발과 발목에 곧 힘을 얻었다(7절). 40여 년의 장애가 극복된 것이다. 그 다음에 그가 어떻게 했는가? 뛰어 서서 걸으며 성전 밖으로 나가지 않고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했다(8절). 그 모습에 모든 백성이 심히 놀랐다(9-10절). 기적을 기적으로 끝나게 하지 말고 다음 단계의 증거와 헌신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까지 있게 하라. 아무리 큰 기적을 체험해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과 헌신으로 승화되지 않으면 복된 기적이 아니다.
고난 중의 성도의 삶은 4백 미터 계주와 같다. 처음 주자는 ‘고난’이다. 그렇게 고난이 생기면 ‘기도’라는 다음 주자에게 바통을 넘기라. 그러면 적절한 때에 ‘응답’이란 주자에게 바통이 넘어간다. 그때 거기서 계주를 멈추지 말고 응답 후에는 ‘헌신’이란 주자로 바통을 넘기라. 그때 비로소 그 인생이 복된 인생이 된다. 응답받은 단계에서 계주를 끝내지 말라. 응답으로 인생 계주를 끝내면 그 다음에는 응답이 순조롭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런 상태에서 응답이 순조롭게 주어지면 영성과 인성이 더 나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응답 받고 그 은혜를 헌신으로 승화시킬 때 그 다음 기도 제목에도 기쁘게 응답하신다. 4백 미터 인생 계주를 잘 완주하는 인내와 헌신을 보이라. 고통을 기도로 잘 연결되게 하고 응답을 헌신으로 잘 연결되게 하라. 응답 받고도 헌신이 없는 것은 400미터 계주를 300미터만 뛰고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100미터만 뛰고 포기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기도 응답과 축복을 ‘헌신’이란 다음 주자에게 잘 연결시키라. 그때 기적과 축복도 저절로 따라온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