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 묵상 17-20편
[ 라디슬라프 자보르스키 (Ladislav Záborský) ]
본문말씀 : 요한복음 14장 16-17절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성령님 묵상(17) 진리의 성령님(요 14:16-17)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말씀을 경험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꿈이나 환상보다 말씀의 우월성을 분명히 이해하라. 예레미야 23장 28-29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꿈을 꾼 선지자는 꿈을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겨가 어찌 알곡과 같겠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꿈은 겨에 지나지 않고, 말씀은 알곡이라고 했다. 진정 성도를 자라게 하는 영양가를 주는 것은 말씀이다. 알곡과 같은 말씀을 겨와 같은 꿈으로 대치해 버린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영적으로 굶어죽을 것이다.
성령님 묵상(18) 지혜의 성령님(요 16:12-13)
하나님의 인도가 있다는 사실을 성도는 누구나 인정한다. 문제는 왜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나를 이 지경에 처하게 만드시는가 하는 문제다. 그때 성령님께서 다음과 같은 지혜를 주신다.
첫째, 그 지경은 나의 불신앙이나 불순종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심으로 영적 자유함을 주신다. 둘째, 그 지경에서도 살만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심으로 용기를 주신다. 셋째, 그 지경이 최종결과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심으로 인내하게 하신다. 영화를 중간까지만 보고 속단하지 말라. 삶은 진행형이다. 넷째, 그 지경은 나의 삶에 열정을 타오르게 하는 수단임을 깨닫게 함으로 내게 거룩한 꿈을 향한 자극을 주신다. 비뚤어진 자아는 포기되어야 하지만 하나님 안에서 거룩한 성공을 위한 열정은 결코 포기되어서는 안 된다.
성령님 묵상(19) 위로하시는 성령님(행 9:31)
모든 어려움은 성령님과 동행하는 사람에게는 축복의 전조다. 슬픔 중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다고 믿는다면 그 슬픔은 곧 어떤 빛보다도 찬란한 빛이 된다. 그러므로 모든 상황을 기쁨으로 계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계산한다는 용어는 시적인 용어나 감정적인 용어가 아니다. 냉철하고 정확한 셈과 관련한 용어다. 계산서 위쪽에는 슬픔, 유혹, 난관, 반대, 좌절 등이 채워지겠지만 계산서 아래쪽에는 하나님의 기쁨, 약속, 보상이 채워진다. 각 항목을 합산해 보면 사도 바울처럼 이런 고백이 나올 것이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주어진 환경은 기쁘게 보이지 않아도 위로하시는 성령님을 염두에 두고 계산할 때 나의 인생은 결코 적자 인생이 아니다.
성령님 묵상(20) 성령님 안에서 행하는 삶 4가지(갈 5:25-26)
성령님 안에서 행하는 삶이란 어떤 삶인가? 첫째, 항상 성령님의 임재를 인식하는 삶이다. 성령님의 임재에 대해서 진지하게 접근하는가? “성령이여 오소서.”라는 소원이 감정풀이가 되지 않게 하라. 둘째, 성령님을 항상 나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으로 인식하는 삶이다. 성령의 다른 명칭 ‘보혜사’는 성도가 항상 불러서 찾을 수 있는 분을 의미하는 단어다.
셋째, 성령님을 항상 논의 상대로 삼는 삶이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일에서는 성령님을 논의 상대로 삼는다. 그러나 쉬운 일에서도 성령님을 논의 상대로 삼으라.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쉬운 일에서 넘어지기 때문이다. 넷째, 항상 성령님과 보조를 맞추면서 가는 삶이다. 한 발자국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그 한 발자국이 뒤쳐짐으로 나중에 만회할 수 없는 엄청난 거리와 차이가 생겨날 수 있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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