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행동하라

본문말씀 : 요나 3장 7-10절

7 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이르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8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9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10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 참된 부흥을 추구하라 >

 사람이 유명해지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유명해지면 같은 잘못을 저질러도 더 비난받는다. 그런 상황을 이용해서 여론을 업고 유명인을 부당하게 공격하는 경우도 많다. 유명인에게 부당하게 혜택을 주어도 안 되지만 부당하게 비난을 해도 안 된다. 사람들은 유명인에게서 어떤 죄와 허물이 노출되면 자기도 같은 죄와 허물이 있으면서 유명인을 무섭게 비난하거나 비난에 동참하는 경우가 있다. 복된 태도가 아니다.

 유명한 젊은 연예인들이 죽음을 선택하는 원인 중 하나가 인터넷과 핸드폰을 통해 전파되는 악플 때문이다. 인기인들은 악플이 숙명인 줄 알지만 계속 악플에 시달리면 살 힘을 잃고 우울증에 걸릴 수 있다. 악플러가 도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면 그때는 응답과 설명이 사실상 의미가 없다. 문제 제기의 목적이 도발을 통해 자기 존재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악플러를 요즘 언어로 ‘관종’이라고 한다. ‘관심 종자’란 말의 준말이다. 가장 큰 문제는 거짓 정보를 내세워 도발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이다.

 관종이 도발을 통해 적의를 불러일으키면 사회의 분노 지수는 올라간다. 그처럼 거짓 정보로 사회의 분노 지수를 올리며 정신 승리를 노리는 사람을 ‘진짜 왕따’란 의미로 ‘진따’라고도 한다. 진짜가 아닌 진따가 사회를 휘저으면 분노와 증오가 만연해짐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각종 마음의 병이 생겨서 점차 육신도 약해진다. 또한 사회의 혼란으로 사건과 사고 가능성도 커지면서 그 사회의 평균 수명도 낮아진다. 관종이나 진따는 그런 상황을 안타까워하기보다 계속 뒤에서 분탕질을 하면서 웃고 즐긴다.

 SNS로 분탕질 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정의의 사자처럼 여기고 그럴 때가 많다. 그런 분탕질에 말려들면 열정, 시간, 정신, 그리고 인생이 낭비되고 사회적인 역량도 약화된다. 그처럼 악플과 말꼬리 잡기를 즐기는 관심 종자의 수법에 말려들지 않으려면 무관심한 것이 좋은데 그것이 쉽지 않다. 요새 부쩍 많아진 악플 고소도 필요하지만 악플과 거짓 정보 퍼 나르기를 절제하는 문화 운동 확산이 더 필요하다. 그러나 그런 자발적인 절제가 쉽지 않기에 책임적인 댓글을 달도록 포털 사이트에서의 댓글 실명제 도입도 필요하다.

 어떤 사람은 특정 게시판에 상주하면서 도발적인 글과 악플로 분탕질 한다. 심지어는 개인 사이트의 게시판에서까지 그런 도발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런 도발적인 글과 영상을 계속 보면 뇌의 정상 기능이 저하되고 심해지면 뇌가 오작동을 일으켜 편향성이 심해지고 판단력을 잃는다. 결국 그런 글과 악플에 계속 자신을 노출시키고 반응하면 이단 교주의 말에 세뇌되면서 영혼이 황폐화되는 과정과 유사한 상황이 펼쳐진다.

 때로는 먹고 살려고 도발적인 언행을 남발하는 생계형 관종도 있다. 그 폐해는 더 심하다. 결국 악플러도 문제지만 황색 언론도 문제다. 유명인에 대해 도발적인 기사를 써서 클릭 수를 늘림으로 자기 배를 채우려고 자극적인 기사나 거짓 기사로 논란거리를 확대 재생산하면 사회는 난장판이 되고 한 개인의 존엄성은 짓밟히고 그것을 견디지 못하는 유명인, 특히 젊은 연예인은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그런 자살은 타살에 가깝다.

 균형 잡힌 바른 기사는 대중의 시선을 크게 끌지 못한다. 그러면 기사의 클릭 수에 따라 포털에서 돈이 나오니까 수입도 줄어든다. 결국 확증 편향을 자극하지 않으면 돈도 벌기 힘들고 사람의 이목도 끌기 힘들기에 계속 자극적이고 편향적인 기사를 쓰면서 지지자의 클릭과 반대자의 클릭을 동시에 유도한다. 개인 유튜버가 아닌 기성 언론까지 남은 죽어도 나는 돈만 벌면 된다는 식으로 보도하면 아무리 구독자가 늘고 돈을 벌어도 언젠가 추락의 때는 반드시 오고 사후에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을 것이다.

 불의한 성장 추구는 위험한 것이다. 진실성과 창조성을 앞세워 늦더라도 바른 성장을 추구하라. 그것이 쉽지 않다. 세상은 욕망의 정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宗敎, 최고의 가르침)’의 역할이 중요하다. 거짓이 섞인 가르침은 어떤 것도 종교가 될 수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독교다. 교회마저 타락해서 거짓된 약속과 거짓된 언사와 거짓된 정보로 영혼을 미혹해 성장을 추구하면 하나님의 저주가 쌓인다. 또한 기적과 종말과 영성을 내세운 자극적인 말만 앞세워 성장에 집착하는 것도 결코 복된 모습이 아니다.

 분노와 증오 대신 평화와 평안을 주는 균형 잡힌 바른 말씀은 밋밋해서 대중의 시선을 잘 끌지 못한다. 그래서 그런 말씀으로는 성장이 더딜 수 있지만 사실상 그런 말씀이 영혼을 진짜로 살린다. 교회가 균형 잡힌 바른 말씀으로 수많은 대중을 이끌지는 못해도 한 사람이라도 위대한 인물을 만들면 외적인 성장은 이루지 못해도 사실상 참된 부흥은 이룬 셈이 된다. 바른 인물 한 사람을 통해 나중에 큰 역사가 이뤄지기 때문이다. 결국 성장한 것은 부흥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부흥한 것은 성장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는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한다. 과정이 좋으면 단기적인 성장은 더딜지라도 최종적으로는 선한 결과가 나타나고 참된 성장도 이뤄진다. 과정에 충실하기 위해서라면 작아져도 좋다고 여기라. 바른 길을 따라감으로 작아진 것은 계속 작은 것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작은 곳에 있으면서 덜 인정받고 덜 재미있어도 뜨겁게 타오르라. 큰 불길에서 뜨겁게 타오르는 것보다 작은 불길에서 뜨겁게 타오르면 외적인 성장은 더딘 것 같아도 내적인 부흥은 착착 이뤄가는 셈이다. 그런 참된 부흥을 추구하라.

< 깊이 회개하라 >

 니느웨 부흥 운동이 어떻게 일어났는가? 요나가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라고 한 선포를 듣고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했기 때문이다. 그때 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었다(5절). 그 소식을 니느웨 왕도 듣고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았다(6절). 그리고 니느웨 왕과 대신들은 회개를 촉구하는 조서를 내렸다. 결국 요나의 단 하루의 전도로 니느웨를 휩쓴 회개의 역사는 사람은 물론 짐승들까지 금식시키고 굵은 베옷을 입게 했다(7-8절).

 국가와 교회에 위기가 닥칠 때 가장 앞세워야 할 것은 분석이나 핑계가 아닌 회개다. 회개할 때는 깊이 회개하라. 끊어야 할 것은 끊는 것도 회개지만 정죄와 판단을 버리고 사랑과 용서를 다짐하는 것도 회개다. 어떤 사람은 요나를 ‘요놈의 나’라고 풀이했다. 부흥을 막는 핵심 요소가 ‘요놈의 나’인 줄 알고 나부터 바꾸라.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철천지원수인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회개를 선포하게 하셨는가? 원수에 대한 증오를 넘어선 참된 회개가 있어야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인생 건축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사람의 창조성을 가장 저해하는 것은 증오다. 증오는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고 영혼의 마약처럼 영적인 시야를 혼미하고 어둡게 만든다. 그 증오를 제거해야 참된 의미의 축복이 가능함을 알고 하나님은 증오를 극복하고 참된 회개를 이루라는 의미에서 요나를 가장 원한이 서린 니느웨로 가서 회개를 선포하게 하셨을 것이다.

 말로만 “하나님! 회개해요.”라고 한다고 회개한 것이 아니다. 원수에 대한 증오를 극복하는 참된 회개를 이루는 것은 수천 알의 영양제를 먹는 것보다도 건강에 좋다. 아무리 힘든 시련을 당해도 나의 허물에 비해 적은 시련을 당했다고 여기고 감사하면서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하며 나아가는 것이 참된 회개의 열매다. 회개하고 편한 다시스로 가려고 하지 않고 불편한 니느웨로 가려고 하면 어디선가 신비하게 회복과 성공과 부흥의 역사도 시작될 것이다.  

< 믿음으로 행동하라 >

 니느웨 왕은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고 진노를 그치고 멸망하지 않게 하실 것을 기대하고 회개를 선포했다(9절).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이 실제로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뜻을 돌이키셔서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10절). 내가 진심으로 돌아서면 하나님은 나보다 더 신속하게 돌이키신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 말라. 나의 믿음이 부족하다고 여기면 좋은 믿음의 동료를 내 곁에 두려고 힘쓰라.

 현재의 모습이 보잘 것 없어도 위축되지 말라. 믿음으로 일어서서 각종 장벽과 한계를 깨뜨리라. 하나님의 약속은 큰 틀에서 이미 이뤄졌다.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된다. 여리고 성을 돌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침묵은 믿음의 표식이다. 그때 7일 동안 13번 여리고 성을 돈 것은 인내의 상징이다. 그 인내도 믿음의 산물이다. 믿음의 행동에는 반드시 보상이 있다. 그 보상은 내가 상상하지 못하는 형태로 알게 모르게 펼쳐지고 언젠가 그 보상의 열매가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한 아들이 결혼을 앞두었다. 그때 오래 전에 은퇴해서 넉넉하지 않은 부친이 결혼 비용 문제를 고민하자 아들이 말했다. “아버님, 이제까지 키워주신 것도 감사한데 결혼 비용까지 부담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저에게는 한 푼도 주지 마시고 저에게 주실 돈이 있으면 아버님이 쓰십시오. 저는 없는 상태에서 출발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그 부친은 한 푼도 돕지 못했다. 그러나 아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결국 10여년이 지난 후 그 부친이 천국에 가면서 남은 재산을 다른 형제가 아닌 그 아들에게 몰아주었다.

 때로는 당연히 내게 쥐어져야 할 것을 가지지 못할 때도 있다. 그때도 속상해하지 않고 “하나님이 이제까지 살려주신 것도 감사한데 이것을 못 가져도 괜찮다. 오히려 하나님께 더 드리며 살자.”라고 하면 하나님이 그 마음을 기억하고 언젠가 넘치게 축복을 몰아주신다. 그리고 축복 전의 자세도 중요하지만 축복 후의 자세도 중요하다. 축복 받은 후에 “드리니까 더 받아.”라고 하면서 은근히 믿음과 영성과 헌신을 자랑삼아 말하지 말라. 그러면 받기 위해 계산적으로 드리려는 부작용도 생긴다.

 믿음도 없이 계산적으로 드리면 받지 못할 때 믿음에 회의를 품게 되고 “하나님! 저는 열심히 드렸는데 왜 이렇게 받지 못하고 어려운가요?”라는 불평이 생길 수 있다. 축복 받은 후에는 자랑하지 말고 드리고 나누고 베푸는 삶을 새롭게 다짐하고 조용히 실천하라. 그래야 넘치게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계속된다. 받는 데 관심이 없이 순수하게 헌신하면 나중에 더 받게 되는 삶이 믿음의 삶이다. 항상 심은 대로 거둔다는 사실을 깨닫고 행동하는 믿음을 통해 큰 부흥의 역사를 체험하라.

ⓒ 이한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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