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 못 박을 것 3가지
본문말씀 : 갈라디아서 5장 24절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 십자가에 못 박을 것 3가지 >
수시로 40일 금식기도를 해도 불평과 원망과 비판과 시기가 많다면 그것은 성령 충만이 아닌 자기 충만의 모습이다. 어떤 사람이 예언한다면서 영적인 우월의식을 가지고 남을 우습게 여긴다면 그것도 역시 성령 충만이 아닌 자기 충만의 모습이다. 성령의 열매가 없으면 신기한 능력도 하나님의 능력이나 성령 충만의 증거가 아니다. 성령 충만한 삶을 살려면 3가지를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어야 한다. 그 3가지가 무엇인가?
1. 육체
본문에 언급된 ‘육체’와 비슷한 성경적인 용어는 옛 사람 혹은 겉 사람이란 용어다. 옛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있는 존재이고 새 사람은 거듭남으로 있게 된 존재다. 옛 사람은 죄를 짓기 원하고 새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한다. 성도에게는 옛 사람과 새 사람의 싸움이 있다. 그 싸움에서 옛 사람(육체)를 죽이고 예수님의 성품을 가지라.
어느 날 해외 빈민촌에서 선교와 구제 사역을 하는 신실한 선교사에게 누군가가 물었다. “어떻게 빈민촌에서 사랑으로 영혼을 살리는 사역을 하게 되었나요?” 그가 대답했다. “내 안에 사람을 무자비하게 죽이는 히틀러가 존재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동문서답 같지만 깊은 진리가 담긴 역설적인 대답이다. 사람 내면에 존재하는 육체적인 옛 사람을 못 박지 않으면 나는 어느 누구보다 잔인한 나가 될 수 있다.
2. 정욕
정욕이 나쁜 것인가? 정욕의 원천인 정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정이 바른 질서 안에서 표출되면 일을 이루게 하고 인간관계를 깊게 한다. 그러나 정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때로 정 때문에 소중한 일을 그르친다. 예를 들어, 어머니의 정 때문에 자녀 교육에 실패할 때가 많다. 친구의 정 때문에 친구 따라 강남 가듯이 군중심리에 휩쓸릴 수 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은 감정적인 사랑이 아닌 의지적인 사랑이다.
꿀벌들이 여왕벌을 따라 높이 비상하듯이 성도의 사랑은 감각적인 차원에서 의지적인 차원으로 비상할 때 참된 사랑이 이뤄진다. 사랑의 비상이 이뤄지려면 날개를 열심히 파닥거리는 엄청난 의지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감각적인 사랑은 쉽게 흔들리지만 의지적인 사랑은 잘 흔들리지 않는다. 사랑하면 외모와 상관없이 상대를 누구보다 더 아름답게 여긴다. 그처럼 감각적인 정욕 이상의 의지적인 사랑을 통해 세상은 점차 아름다워진다.
3. 탐심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말은 나눔과 헌신의 삶을 살라는 뜻이다. 나의 삶이 유리 뒷면에 욕심이 발라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맑고 투명한 유리 같이 되게 하라. 그래서 거울 앞에 선 사람처럼 나만 쳐다보지 말고 맑고 순수한 영혼으로 창문 너머를 바라보라. 낭비와 헌신의 차이를 구분하려면 “그 드림의 대상이 하나님인가? 그 드림이 거룩한 일을 위한 드림인가?”를 보라.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위해 드리는 낭비는 최상의 헌신이 된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 길이 놓여 있다. 쾌락의 길과 헌신의 길이다. 어느 길을 따라야 하는지는 명백하다. 쾌락에는 늘 쾌락 이상의 강도를 가진 후유증이 뒤따른다. 즉 쾌락이 크고 짜릿할수록 정신적인 고통이나 심리적인 공허 같은 후유증도 크다. 반면에 헌신에는 늘 헌신 이상의 축복과 열매가 따른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려고 자기 것을 드리는 헌신적인 삶이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이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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