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육신하신 예수님처럼 살라



본문말씀 : 누가복음 7장 33-35절

33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34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35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성육신하신 예수님처럼 살라 (누가복음 7장 33-35절)


< 작은 자의 친구가 되라 >

 닭이나 돼지 한 마리에 바이러스가 발견되면 반경 몇 킬로미터의 수십만 마리의 닭과 돼지를 몰살시킨다. 너무 잔인하지만 어쩔 수 없다. 동물에게 마스크를 끼우거나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른다. 또한 바이러스에 걸린 생물 하나 때문에 그 전파를 막으려고 무수한 생명체를 죽여야 하는 모습은 작은 존재 하나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한다. “나 하나쯤이야.”라고 하지 말고 “나 하나도 중요해.”라고 하라. 나 한 사람을 통해 전체가 망할 수도 있고 흥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내가 작고 초라해도 나를 중시하고 더 나아가 내 주변의 작고 초라한 사람도 무시하지 말라. 가난 때문에 사람을 무시하지 말라. 열심히 책임적으로 살았어도 부의 기회를 잡지 못했거나 양보하고 나누며 살았기에 가난했다면 하나님의 넘치는 보상이 있을 것이다. 아이도 무시하지 말라. 어른도 다 아이 시절을 지나왔다. 여성도 무시하지 말라. 모든 남성은 여성이 낳고 여성의 손길 아래 보호받고 자랐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무시할 사람이 없다.

 현재 작은 자로 있다고 해서 계속 작은 자로 머물러 있지 말라. 지금은 작은 자라도 앞으로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큰 자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라. 예수님은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작은 자로 태어나셨지만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자가 되셨다.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나 작은 자다. 그런 인식을 바탕으로 앞으로 크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작은 자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

 또한 당시 교권주의자들은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금욕 생활을 하니까 감동하기보다는 귀신 들렸다고 비난했다(33절). 반면에 예수님은 세례 요한과 달리 금욕하기보다 진리 안에서 자유롭게 사시니까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라고 비난했다(34절). 그들의 비난은 예수님이 어떻게 사셨는지를 유추하게 만든다. 예수님은 소외된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기를 즐겨하셨다. 그처럼 작은 자의 친구가 될 때 큰 자가 된다.

 작은 자의 친구가 되려면 무엇보다 이해심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성육신에는 “네 마음과 처지를 이해한다.”라고 하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 메시지가 큰 안도감을 준다. 어떤 일로 인해 속상해도 조금 더 힘을 내라. 하나님은 나의 형편을 다 아신다. 나의 서러움과 상처도 아신다. 힘든 일을 당해도 너무 서러워하거나 낙심하지 말라.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 고난 중에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이다.

 예수님의 성육신의 핵심 메시지가 ‘이해’임을 기억하고 상대를 조금 더 이해하라. 사랑은 내편보다 상대편에서 보고 이해하려는 것이고 그 이해의 깊이가 사랑의 척도다. 어딘가 바쁘게 가야 할 때 같이 갈 사람이 느리게 행동하면 짜증나는 말이 나오기 쉽다. 그때 참고 기다리는 것도 성육신의 마음이다. 그때 속으로 기도하라. “하나님! 제가 이것도 참지 못하고 성도라고 하겠습니까? 잘 참게 하소서.” 그런 생활 속의 기도가 환경과 관계를 변화시킨다.

 누군가가 자존심을 내세울 때도 성육신의 마음을 가지고 이해해주라. 상대의 자존심을 꺾고 명예를 짓밟고 행복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반대로 상대의 자존심과 명예를 조금만 높여주면 사람은 의외로 다루기 쉬운 존재다. 왜 사람의 변화가 쉽지 않은가? 의지력 부족도 문제지만 이해심 부족도 문제다. 가끔 누군가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할 때 속이 터진다고 가슴을 치지 말고 가슴을 열고 일단 이해해 보려고 하라.

 질책도 함부로 하지 말고 정당한 명령과 권위에 의도적으로 거역할 때만 하라. 속이 터진다고 감정적으로 질책하면 상처를 남긴다. 실수나 연약함 때문에 잘못된 행동을 할 때 답답해서 속이 터진다는 듯이 혹은 귀찮다는 듯이 짜증내며 질책하지 말라. 한 번 더 생각하고 한 번 더 이해하라. 예수님의 성육신은 작은 자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라는 메시지이고 성탄절은 이해의 폭을 넓히자고 새롭게 다짐하는 날이다. 이해의 폭을 넓힐 때 은혜의 폭도 넓어진다.

<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라 >

 예수님을 영접한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때 예수님도 사람들로부터 높여진다(35절).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려면 무엇보다 필요한 삶이 낮아지는 삶이다. 성육신이 주는 핵심 교훈은 낮아지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강력한 왕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지 않은 것은 높은 위치에 있어도 낮아지고 강한 힘이 있어도 약해지라는 메시지다. 하나님 안에서는 낮아질 때 높아지고 약해질 때 강해진다.

 사도 바울이 뇌전증(간질)으로 추정되는 자기 육체의 가시를 없애달라고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 하나님의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해진다는 진리는 예수님의 성육신이 잘 보여주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제자들은 “어떻게 메시아가 저렇게 허무하게 죽는가?” 하고 절망했지만 그들은 그 죽음이 사탄과 사망에게 카운터펀치였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예수님의 죽음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부활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예수님의 죽음은 능력의 최대 원천이 되었다. 능력과 복의 개념을 수정하라. 간증에는 육신의 병을 고친 간증은 많지만 마음의 병을 고친 간증은 별로 없다. 돈을 많이 번 간증은 많지만 돈이 없어도 행복하게 사는 간증은 별로 없다. 높아지고 유명해진 간증은 많지만 소리 없이 크게 헌신하면서도 범사에 감사하며 겸손하게 사는 간증은 별로 없다. 그러나 참된 능력과 축복은 높은 삶에 있기보다 낮아질 줄 아는 삶에 있다.

 복된 존재가 되려면 능력은 키우되 자세는 낮추라. 열심히 일해서 돈도 많이 벌고 지위도 높아지라. 대기업 회장도 될 수 있다면 되라. 그 후에 대기업 회장으로서 교회에서 운전 봉사와 청소 봉사를 즐겁게 하라. 그런 모습이 하나님께 얼마나 영광이 되겠는가? 뿐만 아니라 그런 소문이 조용히 널리 퍼지면 수많은 사람에게 참된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일깨우면서 감동을 준다. 얼마나 멋진 삶인가? 사람은 겸손해질수록 멋지게 된다.

 예수님이 나신 소식을 천사가 제일 먼저 알려준 사람은 부자나 권력자가 아니라 밤에 양떼를 지키던 비천한 목자들이었다(눅 2:8-14).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찾아오신다. 천국은 심령이 가난한 자의 것이다. 가난해도 영적으로 교만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고 부자라도 하나님이 없으면 못 사는 줄 알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자랑을 감춤으로 하나님의 자랑거리가 되고 늘 겸손함을 잃지 않음으로 은혜도 잃지 말라.

< 성육신하신 예수님처럼 살라 >

 낮아질 때는 마음만 낮아지지 말고 몸으로도 낮아지기를 힘쓰라. 하나님은 몸으로도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다. 사랑의 정수는 몸으로도 누군가와 함께 하다가 아예 그 사람처럼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몸으로 함께 하시려고 하늘의 영광스런 지위와 초월적인 능력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영생의 길을 열어주셨다. 그 은혜에 진정으로 감사하면 성육신하신 예수님처럼 내 힘이 필요한 누군가를 붙들어주고 안아주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스스로 온전히 이룰 수 있지만 대개 사람을 통해 이루기를 기뻐하신다. 사람에게 할 일을 주고 그 일의 수행 과정을 통해 삶의 의미도 주고 최종적으로는 상급도 주시기 위해서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도 나의 손길을 필요로 하신다. 예수님이 이 땅에 아기로 오셔서 강보에 싸이셨을 때는 사람이 돌봐주어야 살 수 있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사람의 돕는 손길을 필요로 한 것이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돕는 손길만 좋아하지만 강보에 싸인 예수님은 “네 도움이 필요하다.”라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준다.

 하나님의 돕는 손길을 체험했으면 하나님을 돕는 손길이 되라.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다 해주시는 것은 축복이 아니다. 참된 축복은 하나님의 사명과 비전에 나도 동참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은혜 받는 것도 축복이지만 은혜 받고 봉사하는 것은 더 큰 축복이다. 세상에서 돈을 잘 버는 것도 축복이지만 거룩한 비전을 위해 돈을 잘 쓰는 것은 더 큰 축복이다.

 행복을 원하면 나로 인해 행복해지는 사람이 많아지게 하라. 또한 헌신할 때는 가급적이면 은밀히 해서 누군가의 시기와 질투가 없게 하라. 내가 열심히 일했는데 엉뚱한 사람이 이익을 보면 이런 소리가 나온다. “괜히 남 좋은 일만 했네.” 그러나 남 좋은 일 하면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갚아주심으로 언젠가 내게 더 좋은 일이 생긴다. <월간새벽기도> 사역으로 남 좋은 일 하니까 수시로 신비한 은혜의 손길도 체험하고 기쁨과 보람도 넘치게 되었다.

 늘 누군가를 돕는 일에 몸과 마음과 물질로 동참하라. 하나님은 나를 필요로 하신다. 강보에 싸인 예수님을 생각하며 “나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비전을 멋지게 이뤄드리겠다.”라고 다짐하고 힘쓰라. 아기 예수님을 강보로 덮듯이 나의 따뜻한 마음의 체온으로 하나님의 뜻을 품고 낮아지기를 힘쓸 때 참된 은혜와 축복을 체험할 것이다. 성탄절은 낮은 데로 오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낮은 곳으로 새롭게 시선을 돌리는 날이다. 그때 예수님의 따뜻한 미소를 영안으로 보고 영감으로 느끼면서 깊은 평안과 안식을 얻을 것이다.

 복음성가 중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축복송이 있다. 그 축복송이 진짜 축복송이 되게 하려면 ‘나는 사랑 주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도 생각하라. 특히 힘들어하는 약자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주라. 사람을 무시하지 말고 자기를 최고로 여기는 교만한 사람 외에는 모든 사람을 소중히 여기라. 미운 사람도 사랑하라. 나도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자주 밉게 행동하는가? 그래도 하나님이 여전히 나를 사랑하심을 기억하라.

 도저히 용서하기 힘들고 미운 사람도 그에게 임할 미래의 불행을 안타깝게 여기며 불쌍히 여기라. 전략적인 사랑의 외면 외에 어느 누구도 무시하거나 경시하지 말라. 어린아이를 존중하고 어른을 존경하고 가난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장애인을 천사처럼 대하고 성격이 괴팍한 사람도 “요새는 저렇게 개성 있는 사람도 필요해.”라고 인정하며 긍휼한 마음을 가지라. 그처럼 성육신의 삶을 통해 세상의 빛과 희망이 되고 새로운 은혜와 축복을 예비하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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