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4대 사명

 

[ 김옥순 수녀님 성화 : 하늘에서 내려 온 생명의 빵 ]



본문말씀 : 누가복음 4장 38-44절

38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39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40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41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 42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44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성도의 4대 사명 (누가복음 4장 38-44절)

1. 예수님을 섬기라

 본문 38절 전반부를 보라.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지라.” 시몬의 장모라는 표현은 시몬 베드로가 결혼했다는 뜻이다.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의 아내는 베드로보다 먼저 순교했다. 카톨릭교회에서는 신부들이 결혼하지 않지만 그들이 1대 교황으로 여기는 베드로는 결혼했다. 독신보다 결혼이 더 나은 것이라고 여기지 말고 반대로 결혼보다 독신이 더 성스러운 것이라고 여기지도 말라.

 나의 만족보다 상대의 완성을 지향하는 결혼만큼 성스러운 것은 없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나 무관심보다는 오히려 자아다. 자아를 잘 극복하면 얼마든지 복된 결혼이 가능하다. 카톨릭교회 신부의 독신 교리는 성경적인 것이 아니다. 그들이 초대 교황으로 여기는 베드로는 결혼했고 더 나아가 중한 열병을 앓는 장모를 자기 집에 모신 것을 볼 때 베드로는 가정적이고 효심이 있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또한 사람들이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이 낫기를 예수님께 구한 것을 보면 베드로는 친화력도 좋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람들이 장모의 중한 열병이 낫도록 예수님께 구하자 예수님이 그녀에게 가까이 가서 열병을 꾸짖으셨다. 그러자 병이 떠나고 그녀가 곧 일어나 예수님 일행에게 수종들었다(39절). 중한 열병에서 시달리다가 막 치유된 사람이 어떻게 바로 예수님 일행을 수종들 수 있었는가? 2가지 가능성이 있다. 열병이 떠나가면서 기력도 온전히 회복되는 기적도 일어났을 가능성과 병에서 치유된 후 힘든 상태에서도 감사하며 바로 수종에 나섰을 가능성이다.

 베드로의 장모는 치유받고 끝나지 않고 치유를 섬김으로 승화시켰다. 그처럼 받은 은혜를 헌신으로 승화시키라. 은혜를 잊지 않는 삶은 인격 형성의 최대 기초로서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만든다. 은혜는 갚으려고 할 때 진짜 은혜가 되고 새로운 은혜도 입는다. 구원의 은혜를 십자가의 헌신으로 갚으려고 할 때 영원한 보람도 얻고 위대한 승리도 얻는다. 십자가를 생략하면서 최후 승리를 기대하지 말라. 예수님을 섬기는 마음을 가지고 교회를 섬기는 것을 삶의 최대 목적으로 삼으라. 그러면 잘 섬길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질 것이다.

2. 예수님을 높이라

 예수님이 치유를 주신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오자 예수님이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어서 고치셨다(40절). 그렇게 안수하자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하자 예수님이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셨다. 귀신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41절). 이 말씀은 2가지 사실을 암시한다. 하나는 귀신이 사람보다 지식이 탁월하다는 사실과 예수님은 불의한 존재가 예수님을 높이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다.

 그때 더러운 귀신들이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소리친 것은 믿음의 고백이 아니었다. 오히려 예수님의 정체를 사람들에게 공개함으로 예수님의 길과 사역을 막기 위한 모략이었다. 그 사실은 지식이 믿음을 주는 것이 아님을 교훈하고 또한 좋은 말도 때로는 절제해야 함을 교훈한다. 말을 통해 사탄이 역사할 때가 많다. 심지어는 웃기자고 한 유머가 본의 아니게 듣는 사람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교만한 말이다.

 하나님은 교만한 악인이 하나님을 높이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성도다운 삶도 없고 교만하게 영성 자랑을 하면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예배할 수 없다. 참된 예배자가 되려면 먼저 겸손한 의인이 되도록 낮아지기를 힘쓰라. 그러면 더 추락할 염려가 없다. 낮아질 때 하나님이 친히 높여주시는 은혜가 있고 인생길의 선한 안내자가 되어 주신다. 스스로 겸손하다고 생각하지도 말라. 스스로 겸손하다고 생각했던 것도 교만임을 아는 것이 진짜 겸손이다.

 예전까지는 어떤 성도가 어떤 일을 잘하면 필자의 입에서 칭찬이 저절로 바로 나왔다. 그렇지만 요새는 칭찬을 절제하면서 때에 맞게 하려는 편이다. 너무 지나치게 칭찬하기보다 때에 맞춰 적절하게 칭찬하는 것이 좋은 인성 형성에 좋다. 누군가가 칭찬을 듣고 마음이 높아질 것 같으면 그를 칭찬하고 싶어도 잠시 참으라. 반대로 누군가의 칭찬을 들으면 기뻐하며 감사하면서도 마음은 더 낮추라. 언제 어디서든지 나를 낮추고 예수님을 높이려고 할 때 하나님의 높여주시는 은혜가 따른다.

3. 예수님을 닮으라
 
 날이 밝아지자 예수님은 시몬의 집에서 나와 한적한 곳에 가셔서 새벽 기도를 하셨다. 그때 무리가 찾다가 예수님을 만나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했다(42절). 당시 예수님은 매우 바쁜 상황에서도 새벽 기도 생활을 꾸준히 하셨다. 그것이 예수님의 능력 있는 사역의 비결이었다. 능력 있는 삶을 원하면 한적한 곳에서의 새벽 기도는 필수적이다. 예수님이 바쁜 중에 새벽 기도를 생활화하셨다면 성도는 더욱 새벽 기도를 생활화해야 한다.

 사람이 가장 약해질 때는 잠잘 때다. 그때는 무방비 상태가 된다. 그처럼 수많은 무방비 상태를 지나오면서 지금까지 살아있다. 하나님이 은혜로 지켜주셨기 때문이다. 사람이 가장 약해진 수면 순간을 지나 새벽에 잠에서 깨면서 하루를 겸손함이 없이는 출발할 수 없음을 깨닫고 말씀과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 삶처럼 복된 삶은 없다. 그렇게 겸손한 모습으로 하루를 시작하면 그날 하루를 건강하고 안전하고 복되게 살아낼 수 있다.

 왜 사람에게 여백의 삶이나 새벽기도 시간이 필요한가?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다. 꾸준히 기도하면서 얻는 진짜 축복은 문제 해결의 축복보다는 예수님과의 깊은 만남을 통해 예수님을 닮는 축복이다. 예수님을 더욱 닮도록 하루의 첫 시간을 말씀과 기도 시간으로 구별해 두고 점차 삶 자체가 기도가 되게 하라. 일과 사명을 향해 나아가기 전에 늘 먼저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가라.

 어린아이가 잠에서 깨면 눈을 비비고 엄마아빠 침대로 오듯이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가라. 하나님은 신비한 잠을 통해 상처와 피로를 씻어주고 욕심을 제거해 빈 마음으로 만드신다. 새벽 시간은 하나님과 대화하기가 가장 좋고 하나님의 뜻과 주파수를 맞추기도 쉽다. 아침에 이슬과 함께 풀을 뜯게 하면 소가 튼튼해지듯이 새벽에 하나님께 나아가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붙들면 영혼도 강건해지고 지혜도 생긴다.

 기도를 사모하고 기도하는 삶을 체질화시키라. 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기도문을 가르쳐달라고 했는가? 당시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모습이 너무 진지하고 아름다워서 제자들에게 기도에 대한 목마름이 생겼을 것이다. 그런 목마름을 가지고 기도를 나의 호흡과 사상과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기라. 기도의 능력은 크고 기도의 영향력은 끝이 없고 기도의 신비는 깊다. 삶의 무한한 동력원인 기도를 생활화함으로 더욱 예수님 닮은 모습이 나타나게 하라.

4. 예수님을 전하라

 새벽에 한적한 곳에서 무리가 예수님을 찾고서 예수님을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할 때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43절).” 그리고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셨다(44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핵심 목적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이 땅에 존재하는 핵심 목적도 천국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복음 전파에 나서라. 공부하는 것도 복음 전파를 잘하기 위해서 공부하고 사업하는 것도 복음 전파를 잘하기 위해서 사업하라.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활용해서 복음 전파에 힘쓰라. 복음 전파를 위해서라면 참고 양보하고 협력하려고 하라. 비난과 집단 이기주의를 앞세우면 하나님이 꿈꾸시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지 못한다. 분리는 사탄만 좋아한다. 복음 전파를 위해서라면 서로 받아 주고 살펴 주고 높여 주라.

 최근에 한 교단 카톡방이 몇 가지 윤리적인 이슈와 정치적인 이슈로 폐쇄되면서 밴드로만 소통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카톡방에서 어떤 이슈로 의견이 갈라지니까 목회자들이 점잖고 부드럽게 문자를 해도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남겼다. 그렇게 서로 옳다는 얘기로 상처를 주고받으니까 지켜보는 사람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아마 그때 사탄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복음 전파와 세계 선교를 위해서라면 배타와 차별을 힘써 버리라. 애국심이나 민족적인 자부심이 지나쳐 타국민이나 타민족을 깔보지 말라. 나와 다른 계층, 지역, 사상을 가진 사람도 무조건 배타하지 말라. 선은 좋은 것이지만 독선은 좋은 것이 아니다. 열심이 달리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독주하는 것은 좋은 것만이 아니다. 좋은 일에 대해 뚝심이 있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힘으로 무조건 밀어붙이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 바른 방법을 따라 복음 전파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내가 지금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이다.

 지난 10월 한 달은 필자의 일생에서 가장 바쁜 한 달이었다. 매월 한 권씩 <월간새벽기도>를 쓰는데 그때는 <365가지 오늘의 묵상> 단행본의 최종 탈고까지 해야 했기에 <월간새벽기도> 3권을 쓰는 분량을 한 달 안에 끝내야 했다. 마감일에 임박해서는 깊은 묵상과 고도의 정신 집중을 위해 10분 쉬고 50분간 글 쓰는 일을 24시간 내내 하기도 했다. 몸은 많이 지쳤지만 코로나 시대에 다른 전도 방법들이 위축된 상태에서 필자가 쓴 책으로 한 영혼이라도 더 예수님을 믿고 변화되면 좋겠다는 마음과 생각이 몸의 피로를 극복하게 해 주었다.

 복음 전파를 상상만 해도 활력과 기쁨이 샘솟게 되는 삶을 추구하라. 예수님도 “나는 복음 전파를 위해 보내심을 받았다.”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받은 나도 지금 이 땅에 존재하고 어떤 일을 하는 목적이 궁극적으로 복음 전파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늘 자기 사명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섬기고, 예수님을 높이고, 예수님을 닮고, 예수님을 전함으로 하늘나라 확장에 귀하게 쓰임 받으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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