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를 경외하는 삶


 


본문말씀 : 잠언 14장 19-25절

19 악인은 선인 앞에 엎드리고 불의한 자는 의인의 문에 엎드리느니라 20 가난한 자는 이웃에게도 미움을 받게 되나 부요한 자는 친구가 많으니라 21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 22 악을 도모하는 자는 잘못 가는 것이 아니냐 선을 도모하는 자에게는 인자와 진리가 있으리라 23 모든 수고에는 이익이 있어도 입술의 말은 궁핍을 이룰 뿐이니라 24 지혜로운 자의 재물은 그의 면류관이요 미련한 자의 소유는 다만 미련한 것이니라 25 진실한 증인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여도 거짓말을 뱉는 사람은 속이느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 (잠언 14장 19-25절)

<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 >

 내가 하나님을 높이면 하나님은 나를 더 높여주시고 내가 하나님을 경외하면 하나님은 나를 더 경이로운 존재로 삼아주실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어떤 삶인가?

1. 선을 도모하는 삶

 일시적으로는 악인과 불의한 자가 승리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선인과 의인이 승리한다(19절). 계획과 전략을 세심하게 선을 바탕으로 세우라(22절). 악을 도모하면 잘못된 길이 열리고 선을 도모하면 인자와 진리가 따른다. 선을 추구하는 마음의 원천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랑이다. 경외하는 사랑은 언행을 조심하게 만든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 서면 나의 존재가 작아지기도 하지만 나의 말수가 적어지기도 한다. 사랑이 깊어지면 말수는 조금 줄어도 말에 깊이와 지혜는 더해지고 유머는 더 고급스러워진다. 하나님의 뜻과 마음에 젖어 말하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랑이 넘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선을 도모하기에 다른 영혼을 배불리는 일에 관심이 깊어진다. 결국 성도에게 선을 도모하는 삶의 핵심 요체는 복음 전파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후 “내 양을 먹이라.”라고 하셨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영혼을 먹이는 일에 관심을 가진다. <월간새벽기도> 사역은 “내 양을 먹이라.”라는 예수님이 주신 사명에 대한 응답의 산물이다.

 영혼을 말씀으로 북돋워 주는 일에 일조하겠다는 마음을 가지라. 북돋워 준다는 말은 힘내라고 북을 쳐준다는 말이 아니다. 북은 뿌리를 덮은 흙을 뜻한다. 결국 북돋워준다는 말은 식물이 잘 자라도록 뿌리에 흙을 덮어준다는 말이다. 힘들어하고 방황하는 영혼이 잘 자라도록 말씀과 격려로 덮어주며 선을 도모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랑이고 그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이 드러나고 마음의 소원도 이뤄질 것이다.

2. 이웃을 섬기는 삶

 사람은 본능적으로 가난한 자를 멀리하지만 부요한 자는 가까이 한다(20절). 그런 현실을 인식하고 게으름으로 인한 가난이 없게 하라. 또한 힘써 재화를 창출하되 재화가 있다고 이웃을 업신여기지 말라. 이웃을 업신여기는 것은 범죄이고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복이다(21절). 복 받는 원리는 어렵지 않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고 섬기면 복을 받는다.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핵심 표식이다.

 이웃 사랑과 섬김을 일회성으로 끝내지 말라. 풋사랑과 참사랑의 차이는 시간을 통해 나타난다. 좋은 것이 진짜 좋게 평가되려면 ‘시간’이란 도구로 검증받아야 한다. 일시적으로 잘 섬기는 것은 평범한 것이고 오래 꾸준히 잘 섬기는 것이 비범한 것이다. 교회 중직 자리에는 교회를 오래 꾸준히 잘 섬긴 사람을 세우는 것이 좋다. 장기간의 섬김은 거룩한 직분을 맡기게 하는 핵심 요소다. 너무 일찍 쉽게 중직을 맡기는 직분 인플레는 바람직하지 않다.

 한국 교회에서는 60세쯤 되면 장로 경쟁이 치열해진다. 교단의 장로 피택 제한 연령이 대개 65세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속한 기독교선교연맹(C&MA)은 그런 나이 제한이 없다. 각 교회가 정관으로 정해도 되지만 교단적인 기준은 없기에 80세가 넘어도 장로로 세울 수 있다. 그래서 빨리 장로가 되려고 치열하게 로비하고 헌금하고 안내 봉사 같은 드러나는 봉사만 선호할 필요가 없다. 오래 꾸준히 신실하게 봉사한 사람이 적절한 나이가 된 상태에서 장로가 되는 것이 좋다. 오랜 섬김의 시간을 통해 봉사의 진정성과 영성이 평가되기 때문이다.

 이웃 사랑을 조용히 실천하라. 이웃 사랑은 예수님의 삶의 핵심이다. 힘을 기르되 앞세우지는 말라. 힘을 앞세우면 하나님은 슬쩍 뒤로 물러서시면서 절망의 기운이 커지지만 힘을 가지고도 섬기면 절망의 기운을 희망의 기운이 압도한다. 절망적인 세상에 희망의 씨를 뿌리라. 때로는 연약한 들풀이 아스팔트길을 뚫고 올라오기도 한다. 권력의 힘보다 약해보이는 희망이 힘이 실제로는 더 강한 것이다. 내일은 희망을 가진 사람의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이웃 사랑을 실천하면 희망도 커지고 세상은 조금 더 밝아질 것이다.

3. 힘써 수고하는 삶

 땀은 배반이 없다. 수고의 땀이 없이 말만 있으면 삶이 궁핍해진다(23절). 땀 흘려 얻은 지혜로운 자의 재물은 영광스러운 것이지만 땀도 없이 얻은 재물은 사람을 미련하게 만든다(24절). 좋은 것을 지속시키려면 인내와 기다림과 더불어 수고도 필요하다. 사람이 보지 않으면 더 수고하라. 사람이 보는 봉사는 사람의 칭찬을 받는 것으로 끝나지만 사람이 보지 않는 봉사는 천국 은행 잔고에 계속 축적된다.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묵묵히 봉사하면 하나님이 다 기억해주시고 사람의 상상을 초월해서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실 것이다.

 어느 교회에 한 떼의 무리가 몰려와서 등록한 후 7개월 만에 기존 성도들까지 몰고 교회를 떠났다. 그때 1여선교회 회장과 2여선교회 회장도 떠났다. 표면적으로는 떼로 움직이는 사람들의 말에 미혹된 것이었지만 내면적으로는 교인이 크게 줄어드니까 여 선교회 회원들이 주일 식사 준비에 더 부담을 느낀 것도 교회를 떠난 이유 중 하나였다. 그 전에도 주일 식사 준비 문제로 여선교회 회원들이 힘들어한다는 얘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시련 후 담임목사는 주일 식사 교제를 없애는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았지만 그렇게 하면 주일성수의 의미가 퇴색될 것 같았다. 성경을 보면 예배 후에 성도간의 식사 교제를 하는 것도 주일성수의 내재적인 의미에 포함된 것으로 볼 여지가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주일 식사의 존폐 문제로 담임목사가 고민할 때 두 권사가 식사 봉사를 맡겠다고 나섰다. 그들의 수고로 그 후 몇 년 간 주일 식사 교제가 잘 유지되었다. 두 권사들은 그렇게 수고하면서도 “왜 우리만 시켜? 젊은 교인들은 뭐해?”라고 전혀 불평하지 않았다.

 몇 년 동안 주일 아침 7시쯤 되면 두 권사 중 하나가 교회에 일찍 와서 식사 준비를 했다. 담임목사는 그 모습을 뒤에서 소리 없이 지켜보면서 속으로 그 봉사에 대해 어떻게 보답할까에 대해 생각했다. 소리 없는 봉사에 인간 목사도 보답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은 얼마나 넘치게 보상하시겠는가? 누군가의 인생과 가문과 후대가 잘 된다면 그런 은혜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그의 소리 없는 수고일 것이다. 소리 없는 수고로 나타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내일의 복을 예비하는 초석이다.

4. 진실한 증인의 삶

 거짓말로 남을 속이지도 말고 남에게 속지도 말라(25절). 치유를 과시하는 어떤 목회자는 “예수 이름으로 나았습니다.”라는 말을 아주 쉽게 한다. 그러다 낫지 않으면 예수님의 이름을 내세워 공개적으로 거짓말을 한 번이라도 한 것을 수치로 여기고 목회의 지속 여부를 심각히 고민해야 정상이다. 그런데 아무런 수치심도 없이 다음에도 또 비슷한 거짓말을 한다. 그런 거짓말로 교회는 성장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동으로 여기실 것이다.

 어설픈 말보다 단호한 말은 확신을 전달하기에 사람을 끄는 힘이 있다. 단호하게 말하지 않고 어설프게 말하면 사람을 열정으로 이끌기 힘들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쳐야 열성 추종자를 많이 얻는다. 왜 이단이 거짓된 줄 느끼면서도 추종자가 생기는가? 거짓말을 단호하게 하기 때문이다. 치우침 없이 온유하게 말하면 열정적인 추종자가 잘 생기지 않는다. 그래도 기본적으로 말의 밑바탕에 온유함을 갖추라. 단호한 말은 카타르시스도 주고 매력적이게 보여 마음을 사로잡는 장점도 있지만 거짓말이 될 위험성도 크다.

 확인된 사실이 아니면 말에 힘이 없게 느껴져도 정직을 우선해야 하는데 확신도 못하면서 단호한 언어로 남을 믿게 했다가 거짓말로 판명나면 결과적으로 거짓말을 한 셈이 된다. 그래도 이단 교주는 단호한 언어를 남용한다. 거짓에 대한 의식과 양심도 없이 거짓말이 상습적이기 때문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종교인은 공적으로 공표된 거짓말을 한번이라도 했다면 심히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 단호한 언어를 쓰면 사람 낚시 및 공동체 성장에 도움이 되어도 확신하지 못하면 단호한 언어를 주의하라. 단호한 말은 거짓의 가능성을 키우기 때문이다.

 단호한 말을 남용하지 말라. 또한 남용된 단호한 말에 쉽게 마음이 이끌리지 말라. 잘 분별하라. 사실로 확인된 것이 아니면 확신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덜 매력적이라도 정직한 것이다. 화려한 단호함보다 순박한 정직함을 가치 있게 여기라. 다수나 성공이나 치유나 특별 선택의 신화에 빠져 양심의 소리를 거부하고 거짓말을 쉽게 하는 사람에게 영혼이 사로잡히면 결국 삶이 파멸된다. 어떤 종교인이 단호한 말로 어떤 사실을 말했을 때 그것이 거짓으로 판명되는 일이 세 번쯤 되면 상습적인 거짓말쟁이거나 이단 교주로 여기고 단호하게 그를 떠나라.

 믿음의 말과 거짓말은 다른 것이다. 잘 분별하라. 거짓말을 믿음의 말로 포장하는 것도 주의하고 또한 믿음이 말을 한다는 것이 결과적인 거짓말이 되는 일이 없도록 지극히 주의하라. 거짓말이 상습적인 것을 카리스마적인 믿음의 말인 것으로 오해하면 미래는 파멸뿐이다. 물론 사람이 완벽하게 진실할 수는 없다. 다 부족하다. 그래도 공개적으로 명백한 거짓말을 상습적으로 하면서 “아니면 말고” 라는 식의 언행을 보이는 것은 하나님이 결코 기뻐하시지 않는다. 최대한 진실하기를 힘써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훼손되지 않게 하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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