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실한 예배자의 자세
본문말씀 : 역대상 16장 1-4절
1 하나님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그것을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에 두고 번제와 화목제를 하나님께 드리니라 2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3 이스라엘 무리 중 남녀를 막론하고 각 사람에게 떡 한 덩이와 야자열매로 만든 과자와 건포도로 만든 과자 하나씩을 나누어 주었더라 4 또 레위 사람을 세워 여호와의 궤 앞에서 섬기며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칭송하고 감사하며 찬양하게 하였으니...
< 신실한 예배자의 자세 >
한때 유행했던 찬양과 경배 모임에서는 음악을 매우 중시했다. 그러나 아무리 찬양과 경배 음악이 감동적이어도 십자가의 희생도 없다면 공허한 예배가 된다. 가끔 보면 예배 인도자가 인기 스타 같다. 하나님은 탁월한 예배 인도자(worship leader)보다 신실한 예배자(worshipper)를 더 기뻐하신다. 신실한 예배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라
한때 블레셋에 빼앗겼던 법궤가 여러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다윗 성에 도착하자 다윗은 법궤를 왕궁을 지을 때 옆에 세운 장막의 지성소에 두고 번제와 화목제를 하나님께 드렸다(1절). 제사를 드릴 때 제물을 드리는 것은 자신을 드리는 의미로 드렸다. 그처럼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것이 예배다. 구약 시대에 제물을 드리고 신약 시대에 헌금을 드리는 것도 자신을 드리는 의미가 내포된 것이다. 하나님께 나를 드리면 하나님이 나를 더 좋게 만들어 주시고 더 큰 은혜로 함께하신다.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면 영이신 하나님은 그 헌금을 직접 쓰실 수 없다. 대신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나라를 이루는 사역비로 쓰게 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의 생활비로도 쓰게 하신다. 결국 나의 헌금은 내게 더 큰 기쁨과 보람과 은혜와 축복을 가져다준다. 더 나아가 체질화된 헌금생활은 인간성의 차원도 높여 준다. 즉 내가 드리는 헌금은 나를 넉넉하고 너그럽고 복된 존재로 체질화시키는 복도 준다.
예를 들어 1년에 천만 원을 헌금하는 경우에 그 정도의 돈을 누군가가 사기를 쳐서 빼앗아 가면 생각만 해도 이가 갈릴 것이다. 나의 본성이 물질의 손익 때문에 쉽게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넉넉한 재정 능력이 있기를 소원하라. 더 나아가 재정 능력은 부족해도 돈 문제로 쉽게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성품을 구하라. 그런 믿음과 성품 훈련에 큰 도움을 주는 것이 평소의 넉넉한 헌금 훈련이다. 하나님 앞에 1년에 천만 원을 드리면 불신자의 계산으로는 1년에 천만 원씩 손해를 보는 것인데도 이가 갈리기보다 오히려 기쁨과 보람이 넘친다면 보통 큰 행복이 아니다.
헌금 생활이 잘 훈련되면 사회에서 큰 손해를 봐도 “그럴 바에야 차라리 하나님께 드릴 걸...” 하면서 손해에 집착해서 이를 갈고 정신을 잃을 가능성이 크게 낮아진다. 결국 내일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건강도 잃지 않고 하나님이 그 믿음을 통해 잃은 것 이상을 새롭게 주신다. 그것이 넉넉한 헌금 생활을 통해 드리고 나누고 베푸는 사람으로 변화된 복의 결과다. 결국 드리고 나누고 베푸는 삶은 결과적으로 더 많이 얻게 한다.
교회 성장을 위해 좋은 리더, 좋은 교인, 주차장 있는 건물, 다양한 친교 모임, 쉽고 재미있는 설교 등이 필요하다지만 역시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예배자의 존재다. 최근의 찬양과 경배 모임은 예배의 주인공이 하나님보다는 찬양 리더와 팔로워인 것처럼 보이는 측면도 있다. 나를 제단 위에서 펄펄 뛰어다니는 제물로 여기기보다 진짜 제물처럼 죽은 듯이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존재가 되게 하라. 예배 때 하나님께 나를 드리는 삶을 새롭게 다짐하고 세상에서 예배자답게 살 때 참된 복이 넘치게 될 것이다.
2.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라
당시 다윗은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후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했다(2절). 그처럼 예배에는 하나님께 자신의 전 존재를 드리는 것과 함께 영적인 리더나 설교자를 통해 들려주는 축복의 말씀도 있어야 한다. 예배 때 전하는 말씀의 핵심 내용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하는 축복의 말씀이어야 한다.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이나 질책과 교훈을 주는 말씀도 내일의 참된 복을 예비하기에 결국은 축복의 말씀이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라는 말씀은 복보다 하나님을 앞세우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강조한 말씀보다 복 주시는 하나님을 강조한 말씀이 더 중요하다. 참된 복은 사람이 생각하는 외면적인 복이 아닌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내면적인 복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없이 축복만 강조되면 참된 믿음이 왜곡된다. 참된 믿음도 없이 인간적인 복을 추구하는 기복주의에 빠지지 말라.
하나님이 주시는 복보다 복 주시는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이 예배다. 주일성수에 힘쓰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누구든지 지금부터라도 복된 존재가 될 수 있다. 예배 때 비록 설교자의 입술을 통해 말씀이 들리는 것이지만 그 말씀을 그 순간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들으라. 말씀을 가까이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참된 예배자의 자세를 가지면 죄와 사탄에 대한 면역력도 커지고 현실과 문제를 극복하는 능력도 커진다.
3. 하나님 앞에서 화목하라
본문 3절을 보라. “이스라엘 무리 중 남녀를 막론하고 각 사람에게 떡 한 덩이와 야자열매로 만든 과자와 건포도로 만든 과자 하나씩을 나누어 주었더라.” 하나님은 화목제를 드린 후 백성들이 제물을 함께 나눠 먹게 하셨다(레 7:15-18). 그런 규례를 세우신 것은 예배하는 삶이 기본적으로는 금욕적인 삶보다는 축제적인 삶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시기 위해서다. 특정한 기간에 금욕생활을 할지라도 신앙생활의 기본은 축제의 삶임을 잊지 말라. 사람은 금욕적인 삶을 더 영성 있게 보지만 하나님은 화목하게 음식을 나누는 삶을 더 영성 있게 보신다.
예배 전에 화목한 마음을 준비하고 예배 후에 화목한 마음으로 살라. 높은 마음이나 미워하는 마음을 버리라.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달으면 그런 마음을 버리기 쉽다. 탕자가 아버지에게 돌아왔을 때 고개를 높이 쳐들고 찾아오지 않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찾아왔다. 그때 탕자에게는 남을 미워하거나 판단하는 마음은 전혀 없이 그저 아버지가 자신을 받아주기만 바랐을 것이다.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보고 아버지는 단숨에 달려와 아들을 끌어안으면서 극적인 화해가 이뤄졌다.
하나님과의 화해를 바탕으로 사람과의 화해를 이뤄 가는 것이 참된 예배자의 삶이다. 긍정적인 마음보다 한 수 위인 화합적인 마음을 가지라. 그런 마음을 가지고 이룬 성공이 진짜 복된 성공이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라는 긍정적인 말만 좋아하지 말고 “보다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보다 더 큰 선을 이루면서 성공하자.”라는 화합적인 마음을 가지라. 외적인 성취만 추구하지 말고 십자가의 사랑을 통한 깊은 차원의 성취를 이루라.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고 참된 예배는 섬기는 인간관계를 통해 나타난다. 세상에서 화목을 이루는 삶은 내가 참된 예배를 드리는지를 나타내는 바로미터다. 특히 하나님이 현재 함께 있게 하신 교우는 천국에서도 영원히 함께할 존재로서 생각과 가치관은 달라도 깊은 곳에서는 한 뿌리로 연결된 존재다. 참된 예배자로서 하나님 안에서 찬란한 꿈을 공유하면 그 꿈은 신기하게 현실이 될 것이다.
4.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라
법궤를 둔 장막 봉헌식 때 다윗은 레위 사람을 세워 법궤 앞에서 섬기며 하나님을 칭송하고 감사하며 찬양하게 했다(4절). 왜 찬양하는가? 찬양과 경배의 핵심 목적은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기 위해서다. 결국 하나님이 참된 예배자를 찾으신다는 말은 감사가 넘치는 사람을 찾으신다는 말과 동의어다. 범사에 감사하면 새로운 복도 주어지고 이미 주어진 복도 쉽게 잃지 않는다. 복이 진짜 복이 되려면 지속성이 있어야 한다. 복이 지속되도록 범사에 감사하고 감사가 지속적인 감사가 되게 하라. 그래야 하나님의 은밀한 보상과 천국 상급도 넘치게 될 것이다.
2014년에 <월새기(월간새벽기도)>를 발행할 때 한 후원자가 마중물 재정을 헌신했고 그 후로도 지극히 어려울 때마다 대나무의 마디처럼 크게 헌신해서 <월새기> 나무가 지금까지 튼튼하게 꾸준히 자랄 수 있었다. 가끔 가까운 지인들이 <월새기> 발행 후원자가 누구인지를 물어도 지금까지 비밀에 붙이고 있다. 그 후원자도 자신을 알리기를 원하지 않지만 필자도 그 후원자를 알리기 원하지 않는다. 선의에 대해 오해하거나 질투하는 사람이 어디든지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후원의 손길에 감사한 마음은 늘 잊지 않고 있다.
언젠가 그 후원자에 대해 사람들에게 알릴 날이 올 것이다. 그 날은 그 후원자가 세상을 떠나서 천국에 갈 날이 될 수도 있고 그 전이 될 수도 있다. 만약 그 후원자가 필자보다 천국에 일찍 가면 비로소 사람들에게 <월새기> 후원 사실을 곧 바로 알리고 추모할 것이다. 그때 알리면 자신의 이미지를 높일 계산적인 목적으로 <월새기> 발행을 후원한 것이 아니라 순수한 믿음으로 후원했음을 후대 성도들이 인정할 것이고 그러면 많은 성도들은 자신의 선행을 죽을 때까지 감춘 사실로 인해 더 감동할 것이다.
얼마 전 <월새기> 시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책 디자인과 편집도 하고 <월새기 영어판> 준비를 위한 영문 번역까지 1인 다중 역할을 하면서 필자의 사역을 돕는 둘째 딸에게 말했다. “한나야, 혹시 아빠가 그 후원자보다 먼저 천국에 가면 네가 그 후원자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계속 사역하다가 그 후원자도 천국에 가면 그때부터는 독자들에게 그 후원 사실을 공개해도 좋다. 그리고 평생 그 후원자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늘 잊지 말고 더욱 헌신적으로 사역에 임해서 문서선교를 더욱 멋지게 펼쳐가길 바란다.”
필자는 교훈 삼아서 평소에 유언 같은 얘기를 두 딸에게 종종 남긴다. 그때 <월새기>발행 후원자에 대한 감사를 잊지 말라고 한 것은 딸들에게 감사는 지속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감사를 지속시키라. 그리고 그 감사한 마음을 담아 하나님의 뜻을 위해 은밀한 헌신의 손길을 펼치라. 은밀한 헌신의 손길은 사후에 더 빛날 수 있다. 현세에 이름을 날리려고 너무 안달하지 말라. 현세에 이름을 날리는 것을 사양함으로 후세에 더 이름을 빛내고 풍성한 천국 상급도 예비하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