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통해 얻는 교훈
본문말씀 : 열왕기하 15장 23-38절
23 유다의 왕 아사랴 제오십년에 므나헴의 아들 브가히야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이 년간 다스리며 24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한지라 25 그 장관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반역하여 사마리아 왕궁 호위소에서 왕과 아르곱과 아리에를 죽이되 길르앗 사람 오십 명과 더불어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었더라... 37 그 때에 여호와께서 비로소 아람 왕 르신과 르말랴의 아들 베가를 보내어 유다를 치게 하셨더라 38 요담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조상 다윗 성에 조상들과 함께 장사되고 그 아들 아하스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 역사를 통해 얻는 교훈 >
본문에는 북이스라엘의 17대 왕 브가히야, 18대 왕 베가, 남유다의 11대 왕 요담의 사적이 기록되어 있다. 그 왕들에 관한 역사를 통해 얻는 교훈은 무엇인가?
1.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
남유다 왕 아사랴(웃시야) 50년에 브가히야가 왕위에 올라 2년간 나라를 다스렸다(23절). 그는 우상숭배에 빠진 악한 왕이었다(24절). 결국 그의 장관 베가가 동향 출신인 길르앗 사람 50명과 작당해 사마리아 왕궁 호위소에서 왕을 죽이고 대신 왕이 되었다(25절). 왕이 가장 신임했던 호위대장 베가가 호위소 잔치석상에서 왕을 죽인 것은 왕이 술판을 벌이며 국정을 외면해서 민심이 크게 이반되었기 때문이다. 브가히야 왕의 비극적인 최후는 사람을 의지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준다. 사람을 의지하면 자신의 내면이 점차 메말라지다 나중에 거둘 것은 배신뿐이다.
어느 날 두 목사 부부가 카페에서 대화를 나눴다. 그때 A 목사 아내가 자신을 떠난 한 부목사에 대해 실망감을 표현하며 “제가 이런 말 하면 안 되는 줄 알지만”이라고 하면서 그 떠난 부목사의 출신 지역 얘기를 했다. 그러자 갑자기 A 목사가 정색하며 아내의 말을 급히 제지했다. “여보! 믿는 사람이 왜 그런 쓸데없는 말을 해요? 그렇게 말하면 남들이 당신을 어떻게 보겠어요!” B 목사 부부는 물끄러미 A 목사 부부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교제 후 두 부부가 카페를 떠날 때 A 목사의 아내가 자신의 부족함을 노출했다고 여겨서인지 카페 입구에서 B 목사에게 조용히 말했다. “제가 조금 전에 하면 안 될 말을 한 것 같네요.” B 목사가 대답했다. “많이 실망했기 때문이겠죠. 그래도 그렇게 말하면 남들이 말은 안 해도 떠난 사람보다 사모님을 더 깎아서 볼 것 같아요. 요새 타인 감수성이 강조되면서 차별적 발언을 하면 꼰대 취급을 받으니까 저도 늘 조심해요.”
왜 사람에 대해 깊은 실망감이 생기는가? 사람을 너무 기대하거나 의지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너무 기대하거나 의지하지 말라. 그가 언제 나를 떠날지 모른다. 남이 나를 실망시키고 떠난 적도 있지만 나도 남을 실망시키고 떠난 적이 있었을 것이다. 사람은 다 약한 존재다. 그런 사람을 너무 의지하면 실망할 일이 반드시 생긴다. 사람을 너무 의지하지 않으려고 해야 실망할 일이나 실망시킬 일이 적어진다.
2. 자신을 의지하지 말라
본문 27-31절은 북이스라엘의 18대 왕 베가에 관한 역사 기록이다. 남유다 아사랴 왕 52년에 베가가 브가히야를 죽이고 왕에 올라 20년간 나라를 다스렸다(27절). 베가도 여로보암의 금송아지 숭배 죄에서 떠나지 않았다(28절). 점차 나라가 피폐해지자 호세아가 베가를 쳐 죽이고 대신 왕이 되었다(30절). 왕위에 오르는 것보다 왕위에 오른 후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자신을 의지하면 망하는 길로 가게 된다.
본문 32-36절에는 남유다 11대 왕 요담에 관한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요담은 부왕 웃시야처럼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다(34절). 그러나 요담 왕 때 여호와께서 아람 왕 르신과 북이스라엘 왕 베가를 보내어 유다를 치게 하셨다(37절). 당시 요담은 성경이 말하지 않는 어떤 큰 잘못을 저질렀을 것이다. 요담은 자신을 경건한 왕이라고 여겼겠지만 그 자만심이 외적의 침입을 초래했다. 요담 왕에 관한 역사는 자신을 의지하지 말라는 교훈을 준다.
돈, 힘, 사람, 사회, 사상도 의지하지 말아야 하지만 자신도 의지하지 말라. 자신이 얼마나 거짓되고 부족한 존재인지는 자신이 잘 알면서도 자신이 제일인 줄 알고 세상이 자기중심적으로 돌아간다는 인식을 가질 때가 많다. 심지어는 고통을 당할 때도 자신의 고통을 제일 크게 보면서 남의 고통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범죄나 도덕적인 불의도 죄지만 남의 고통에 무심한 것도 죄다.
남을 수단화하지 말고 남의 고통에 좀 더 공감하라. 혼자 살아남는 삶보다 함께 살아가는 삶을 추구하라. 기도할 때는 복만 구하지 말고 이런 기도도 하라. “하나님! 저의 허물은 외면하고 남의 허물을 보면 흥분했던 저를 용서하시고 저의 죄와 허물과 약점과 병든 마음을 직시하며 겸손함을 잃지 않게 하소서.” 자기 성찰의 기도를 드리면서 자신을 의지하는 삶을 버리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면 그때부터 참된 치유와 회복의 은혜가 나타날 것이다.
3.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라
당시는 이사야가 활동하던 시절이었는데 이사야는 북이스라엘 왕 르말리야(르말랴)의 아들 베가와 아람 왕 르신에 대해 저주를 선포했다(사 7:7-9). 그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임마누엘 예언(사 7:14)’이 주어졌다. 그 임마누엘 예언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자녀의 잘못으로 고난을 내려도 결코 버리시지는 않는다. 필요하다면 기적을 일으켜서라도 회복의 은혜를 허락하신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다. 더 나아가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수많은 기적과 숨겨진 신비가 찾아보면 많다. 하나님이 남녀를 있게 하신 것도 신비다. 저는 지금까지 한번 이상 대화해 본 여성이 약 천 명 정도는 될 것 같다. 그 여성들 중 드라마나 영화에서 접하는 악한 여성을 거의 만나보지 못했다. 며칠 전에 그런 악한 여성을 만났었는지 꼽아보았지만 아무리 꼽아보아도 거의 생각나지 않았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지구상에 여성이 없었다면 세상이 너무 삭막하고 외로웠을 것 같다.’ 동시에 감사의 독백을 했다. “하나님! 여성을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외로웠을 인생길에서 사랑할 대상을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섭리를 생각하면 하나님의 신비한 손길에 감탄하게 된다. 자세히 살펴보면 주변의 작은 일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에 대한 감탄거리가 차고도 넘친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면 삶의 두려움이 사라진다.
<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
어느 날 영국의 한 장교 부부가 탄 배에 폭풍이 몰아쳤다. 그때 부인이 두려워 떨자 장교가 갑자기 칼을 뽑아 부인 목에 댔다. 부인이 태연하게 있자 장교가 물었다. “여보! 칼이 무섭지 않아요?” 부인이 대답했다. “칼이 당신 손에 있는데 뭐가 무서워요?” 그때 장교가 말했다. “여보! 이 상황을 하나님이 꽉 쥐고 계신데 왜 그렇게 두려워해요?” 그때 부인이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었다.
큰 문제와 대적이 있어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두려워하지 말라. 사도 바울은 그런 믿음을 가지고 늘 담대하게 살았다. 물론 사도 바울도 너무 힘들 때는 잠깐 고통의 비명을 질렀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그러나 곧이어 승리의 고백을 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께 감사하면 어두움과 두려움이 내게 찾아올 수는 있어도 나를 지배할 수는 없다.
복음의 핵심인 ‘임마누엘’이란 말만 들어도 힘이 나고 감격이 된다. 그런데 요즘 왜 그런 감격이 줄어드는가? 그런 대로 살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의 벼랑 끝에 내몰리면 임마누엘이란 말이 얼마나 큰 힘과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로마의 식민지 백성으로 살면서 수많은 억압과 차별과 수탈 가운데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임마누엘’이란 말은 모든 한과 상처와 어둠을 이겨내게 하는 복음이었다.
어느 날 수많은 젊은이가 대참사로 죽었다. 그때 한 집사가 참사를 당한 가정들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고 무심코 생각했다. “왜 하필이면 그때 그런 곳에 갔을까?” 그런데 얼마 후 자신의 자녀 둘이 어떤 축제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날 저녁 그가 두 자녀의 귀가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했다. 갑자기 두 자녀가 사고로 한꺼번에 세상을 떠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이었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한 자녀만 잃어도 그런 대로 살만할 것 같은데 두 자녀를 한꺼번에 잃으면 정말 못살 것 같았다.
그때 갑자기 일전의 대참사를 보고 냉소적으로 대했던 자신을 떠올리며 속으로 다급하게 회개 기도를 했다. “하나님! 지난번 대참사 때 사고 가족들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했던 저를 용서하시고 두 자녀를 지켜주세요.” 그렇게 간절히 기도해도 한번 엄습한 두려움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남의 고통에 공감하는 훈련을 위한 어떤 일이 자녀에게 생길 것 같아 계속해서 부들부들 떨며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저를 용서하시고 두 자녀를 지켜주소서.”
약 1시간쯤 지난 후에 두 가지로 인해 두려움이 사라졌다. 첫째, 자신의 담임목사가 늘 어려운 자의 고통에 공감하라는 선교 마인드와 용서를 강조하는 분이라고 생각하니까 왠지 하나님이 사고를 통한 공감 훈련보다 말씀을 통한 공감 훈련을 하면서 사고를 면제시켜 주실 것이란 생각이 들자 두려움이 사라졌다. 둘째, ‘임마누엘’이란 단어가 떠오르면서 그 단어를 입으로 수십 번 되뇌자 두려움이 사라졌다.
사람을 절망시키는 것은 어두운 현실이 아니다. 어두운 현실은 늘 있었다. 하나님은 때로 훈련을 위해 어두움도 통과하게 하신다. 절망의 근본 원인은 믿음과 소통의 부재다.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통해 믿음과 소통이 이뤄지면 한이 풀리고 상처가 치유되고 내면의 목마름이 해갈된다. 내면이 해갈되면 점차 문제도 해결된다. 예수님은 모든 고통과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임마누엘의 하나님이다. 그 예수님을 늘 의지하면서 문제와 절망을 딛고 승리하는 복된 심령이 되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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