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심을 유익으로 만들라
본문말씀 : 고린도후서 7장 8-11절
8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9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 불필요한 근심을 버리라 >
자동차 운전자와 동승자 에티켓이 있다. 운전자는 동승자를 생각해서 최대한 안전하게 운전해야 한다. 운전자와 동승자의 안전 체감 지수는 크게 다르기에 운전자는 동승자가 옆에 있으면 평소보다 속도는 조금 줄이고 안전거리는 조금 늘여야 한다. 반면에 동승자는 운전자의 운전 및 신호 인식 습관이 아주 잘못된 것이 아니면 기본적으로 운전자를 믿고 옆에서 너무 잔소리를 하거나 너무 불안을 표출하는 언행을 자제해야 한다.
왜 동승자가 운전자에게 지나치게 불안을 표출하면서 운전자의 심기를 상하게 하는가? 크게 2가지 이유 때문이다. 성격이 조급한 것과 근심이 지나친 것 때문이다. 나의 근심은 옆 사람도 불안하게 만든다. 특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한 근심을 잘 이겨내라. 주님의 재림 전까지는 사람은 누구나 때가 되면 죽는다. 죽는 것에 대해 너무 근심하지 말고 어떻게 죽음의 순간을 잘 맞이할까에 대해 근심하라. 왜 사람들이 영적으로 병드는가? 대개 불필요한 근심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근심은 있다. 그 상황에서 선한 목자는 양떼의 근심을 덜어주려고 애쓰지만 거짓 목자는 근심을 이용해 양떼를 속박하고 파멸시킨다. 귀신을 쫓아낸다면서 귀신 소리, 늑대 소리,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는 사람은 선한 목자인가? 귀신은 귀신 소리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이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귀신을 쫓아낸다면서 이상한 소리를 내며 영혼에 두려움을 심는 모습은 선한 목자의 모습이 아니다. 사려 깊은 부모는 어린 자녀에게 무서운 귀신 얘기를 함부로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예전에 한 사람이 목사에게 와서 물었다. “목사님, A 기도원장이 기도할 때마다 이상한 늑대 소리를 내서 그때마다 소름이 끼치고 두려운데 그 기도가 바른 기도입니까?” 소리만 가지고 누군가의 기도가 바른 기도인지를 쉽게 판단할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선한 목자는 ‘부모의 심령’을 가지고 영혼이 두려움에 젖지 않도록 품어주지만 거짓 목자는 ‘교주의 심령’을 가지고 두려움으로 영혼을 속박시킨다는 사실이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부모의 심령을 가진 목자보다 교주의 심령을 가진 목자에게 사람들이 더 몰릴 때가 많다는 사실이다.
영혼을 두려움에 젖게 만든 후 “두려움의 영아, 귀신아, 썩 물러가라.”라고 소리치면서 능력을 과시하는 것은 모순이다. 영혼을 잘 지키려면 이단 교주의 작업을 잘 파악해서 그가 두려움의 영을 심으면 단호히 그 두려움을 떨치고 그를 힘써 멀리하라. 육신에 병균이 침투할 때 몸이 약하면 병들듯이 영혼에 두려움의 병균이 침투할 때 믿음이 약하면 영혼이 병든다. 영혼에 두려움의 병균이 침투할 때 누가 잘 감염되는가?
첫째, 귀신 얘기를 많이 접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다. 즉 미신을 신봉하는 집에서 무서운 얘기를 많이 듣고 자라거나 귀신 얘기를 많이 듣거나 귀신 영화를 자주 보면 두려움의 병균에 잘 감염된다. 사소한 문제가 생겨도 무조건 “사탄 마귀야, 물러가라!”라는 말을 너무 자주 하는 사람도 주의하라. 그런 말을 자주 해서 사탄 마귀와 귀신을 자꾸만 의식 속으로 끌어들이면 영혼이 두려움에 노출되어 약해진다.
둘째, 죄책감에 지나치게 시달리는 사람이다. 죄책감으로 인한 두려움의 병균을 퇴치하려면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불필요한 근심을 버리라. 불필요한 근심을 가지면 영혼이 병들기 쉽다. 근심할 때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거룩한 근심을 해서 내일의 복을 예비하라. 사도 바울은 근심했어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근심했다.
< 근심에서 벗어나는 길 >
어느 날 바울은 교린도 교인들에게 바른 믿음을 권고하는 책망의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를 보내고 처음에는 고린도 교인들을 근심하게 한 것에 대해 후회했다. 그러나 그들을 잠시만 근심하게 한 후 회개에 이르게 하는 좋은 결과를 낳았다. 근심이 다 나쁜 것만은 아니다. 살다 보면 근심거리가 생기지만 그것에 너무 매이지 말라. 어떻게 근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1. 하나님께 근심을 맡기라
성경에는 300번 이상 “근심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말씀이 나온다. 결국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죄이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로서 결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다. 예수님은 염려로 키를 한 자도 자라게 할 수 없다고 하셨다(마 6:27). 문제가 크고 돈이 없다고 아무리 많이 근심해도 전혀 소용이 없다. 그 시간에 좀 더 기도하고 좀 더 땀을 흘리는 것이 낫다.
불필요한 근심은 삶을 파괴하는 쓰레기와 같다. 집에 쓰레기를 남겨두면 온 집안에 악취가 진동하고 건강도 나빠지듯이 마음속에 근심을 품으면 그로 인해 마음과 육체가 병든다. 잠언 17장 22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고 마음을 병들게 한다. 상당히 많은 질병도 근심 때문에 생긴다. 그 근심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라.
가끔 사랑하는 사람이 힘든 일이 생긴 얘기를 들으면 가슴이 덜컹 한다. 가끔 목사에게 교인이 진지하게 “목사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라고 하면 그때도 가슴이 덜컹 한다. 그때 근심이 밀려오면 할 일은 하나밖에 없다. 바로 기도하는 일이다. 그때 기도하면 늘 생각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다. 이제까지의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앞으로도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이란 확신이 들면서 마음도 평안해진다.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면 평안이 생기고 하나님이 가장 좋은 문제 해결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
2. 하나님의 근심을 맡으라
본문에 자주 언급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란 표현에는 비유적으로 세상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내포되어 있다. 영혼이 세상 근심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자신의 근심은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대신 하나님의 근심을 지라. 즉 “어떻게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살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짐을 지려고 하면 나의 세상 짐은 훨씬 가벼워진다.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내가 하나님 나라의 짐을 맡으면 하나님은 나의 문제를 다 해결해 주신다. 하나님께 짐을 맡기면서 하나님의 짐을 맡을 때 기적의 주인공이 된다. 금식하고 철야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기도하면서도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외면하면 사실상 응답도 없다.
지금 이 시간에 모든 근심과 불안의 짐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를 새로 찾아보라. 지금 불의하고 힘든 세상에서 생존의 벼랑 끝에 내몰려 살아갈 힘조차 없는 사람도 많다. 그의 이웃이 되어 주려고 힘쓸 때 삶의 무거운 짐이 가벼워질 것이다. 그처럼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신 일에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살면 하나님은 나의 문제와 근심을 다 해결해 주실 것이다.
3.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라
본문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8번 나오는 ‘근심’이란 단어다. 그런데 그 단어가 그리 나쁘게 들리지 않는다. 근심이 다 나쁜 것은 아니다. 근심에는 불필요한 근심도 있지만 필요한 근심도 있다. 다만 어떤 근심이든지 근심하는 기간은 줄이라. 본문 8절에 언급된 “잠시만 근심하게 했다.”라는 표현에 주목하라. “무엇을 근심하느냐?” 하는 문제도 중요하지만 “얼마간 근심하느냐?” 하는 문제도 중요하다.
근심하는 문제에 대해 때로는 단호하게 결단하라. 근심이 계속되면 건강을 잃고 다른 중요한 일도 망치기에 근심할 때는 잠시만 근심하고 곧 결단하라. 시험 때문에 근심되면 지금부터 공부하기로 결단하고 리포트 제출이 근심되면 지금부터 리포트를 쓰기로 결단하라. 행동도 없이 근심만 하면 문제 해결이 더 어려워진다. 근심을 통해 좋은 결과를 만드는 생산적인 근심을 하고 낙심과 절망으로 이끄는 근심은 버리라. 그래서 받아들일 일은 받아들이고 그 일을 통해 최선의 의미를 창조해내라.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아픈 책망의 편지를 섰을 때 고린도 교인들의 감정이 상해서 그를 미워하고 하나님을 더 멀리 할 수도 있었지만 감사하게도 그들은 곧 회개하고 하나님을 다시 가까이하면서 바울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고린도 교회의 근심은 회개의 열매를 맺는 것으로 귀결되어 고린도 교회의 근심과 바울의 근심은 아무런 해도 주지 않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되었다(9절).
하나님의 뜻이 아닌 망령된 근심은 후회를 낳고 사망으로 이끌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신령한 근심은 회개를 낳고 소망으로 이끈다(10절). 그처럼 근심할 때는 그 근심이 파멸적인 근심이 아닌 창조적인 근심이 되도록 하라.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되는 문제나 교인의 믿음 문제로는 근심했지만 힘든 환경에 대해서는 근심하지 않았다. 절망적인 결과에 대해서도 너무 근심하지 말고 어차피 이뤄질 일이 이뤄졌다고 여기라.
고린도 교인들의 근심과 사도 바울의 근심은 결과적으로 회개와 성결과 회복을 낳았다. 그처럼 근심을 통해 좋은 결과가 생기면 그 근심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근심이 된다. 근심이 없기를 바라지 말고 필요하다면 근심하되 잠깐만 근심하면서 근심을 유익으로 만들라. 근심거리가 생기면 그때 그 근심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이룰 것인지를 생각하고 행동에 나서서 반전의 역사를 이루라. 창조적으로 승화시킨 근심은 결코 해가 되지 않는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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