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패배는 일시적이다

[ 보티첼리 : 신비로운 성탄 ]



본문말씀 : 사사시 15장 9-16절


9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올라와 유다에 진을 치고 레히에 가득한지라 10 유다 사람들이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올라와서 우리를 치느냐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올라온 것은 삼손을 결박하여 그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하려 함이로라 하는지라 11 유다 사람 삼천 명이 에담 바위 틈에 내려가서 삼손에게 이르되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같이 행하였느냐 하니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들이 내게 행한 대로 나도 그들에게 행하였노라 하니라 12 그들이 삼손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결박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 주려고 내려왔노라 하니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치지 아니하겠다고 내게 맹세하라 하매 13 그들이 삼손에게 말하여 이르되 아니라 우리가 다만 너를 단단히 결박하여 그들의 손에 넘겨 줄 뿐이요 우리가 결단코 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 하고 새 밧줄 둘로 결박하고 바위 틈에서 그를 끌어내니라 14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들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를 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그의 팔 위의 밧줄이 불탄 삼과 같이 그의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 15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집어들고 그것으로 천 명을 죽이고 16 이르되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 하니라



<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라 >

 왜 하나님이 은혜와 축복을 주시는가? 현실에 안주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그 은혜와 축복을 나눔의 도구와 통로로 사용해 더 가치 있는 일을 창출하라고 주신 것이다. 안주하면 그 다음에 다가오는 것은 인생의 후퇴다. 천국에 갈 때까지 안주하지 말라. 안주하는 삶에는 평안도 없고 전진도 없지만 도전하는 삶에는 오히려 평안도 있고 전진도 있다.

 이제까지의 삶을 되돌아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믿고 예배하는 존재가 된 것은 최고 축복이다. 그처럼 모든 삶이 하나님의 은혜 중에 펼쳐졌지만 그 은혜에 안주하지 말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새로운 헌신을 다짐하라. 다윗이 왜 복된 존재가 되었는가? 문제가 사라지고 평안할 때 새로운 헌신을 다짐했기 때문이다. 힘들 때는 물론 편할 때도 새로운 헌신을 다짐해야 인생에 후퇴가 없다.

 본문에는 한때 이스라엘 12지파 중 가장 용맹했던 유다 지파의 실망스런 모습이 나온다. 왜 그런 모습이 생겼는가? 현실에 안주했기 때문이다.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을 죽이고 에담 바위틈에 머물 때 블레셋 사람들이 올라와 유다에 진을 치고 레히에 가득 모였다(9절). 그때 유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왜 올라와서 우리를 치느냐?”라고 묻자 그들은 삼손을 결박해 그가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러 왔다고 했다(10절).

 그때 유다 사람들이 삼손을 잡아 그들에게 내주려고 했다. 당시 대부분의 이스라엘 지파들은 블레셋의 압제에 굳이 저항하려고 하지 않았다. 현실에 안주함으로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망각한 것이다. 그 모습은 가나안의 자유보다 애굽의 종살이를 더 그리워했던 광야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과 같다. 그렇게 안주했던 그들에게 블레셋에 대한 삼손의 저항은 오히려 귀찮았기에 손가락질을 하기도 했다. “왜 가만히 있지 않고 저렇게 날뛸까?”

 요즘 교인이 교인의 헌신을 비판하는 일들도 많다. 그처럼 편안한 현실에 안주하거나 귀찮다는 이유로 사명을 망각하는 삶도 없어야 하고 더 나아가 사명을 따라 헌신하는 사람들을 격려해주지는 못할망정 자신이 안주하는 삶에 찔림을 준다고 해서 “너무 광신자처럼 그러지 말라.”라고 비판하는 삶도 없어야 한다. 안주하면 대단히 헌신적이었던 사람도 결국 후퇴하기에 늘 사명을 따라 살면서 진리 안에서 새로운 헌신으로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라.

< 성도의 패배는 일시적이다 >

 진리를 따라 헌신해도 항상 승리하는 삶이 펼쳐지지는 않는다. 때로는 잠시 패배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승리한다. 그때 유다 사람들이 “블레셋이 우리를 다스리는 상황인데 왜 만용을 부려 쓸데없이 문제를 일으키느냐?”라는 식으로 질책하듯이 말하자 삼손이 대답했다. “그들이 내게 행한 대로 나도 그들에게 행한 것이다.” 그러자 유다 사람들이 “우리가 너를 결박해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주려고 왔다.”라고 했다.

 그때 삼손이 대답했다. “너희가 나를 치지 않겠다고 내게 맹세하라.” 유다 사람들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동족을 아끼는 마음의 표현이었다. 그때 유다 사람들이 삼손에게 말했다. “우리가 다만 너를 단단히 결박해 그들의 손에 넘겨 줄 뿐이요 결단코 너를 죽이지 않겠다.” 그리고 새 밧줄 둘로 삼손을 결박하고 바위틈에서 그를 끌어냈다(13절). 괴력을 가진 삼손은 어린 양처럼 순순히 포박되어 블레셋 사람들 앞에 끌려갔다. 이 상황은 사명자에게 주어진 잠깐의 패배 상황을 상징한다. 그러나 사명자의 삶은 패배로 끝나지 않는다.

 포박된 삼손이 레히에 이르자 블레셋 사람들이 환호했다. 바로 그때 삼손에게 성령의 권능이 임하면서 포박된 줄이 불탄 삼처럼 끊어졌다. 그러자 삼손은 위급할 때 무기로 사용하기에 좋은 갓 죽은 나귀의 단단한 새 턱뼈를 집어 들고 그것으로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죽였다(15절). 포박된 삼손을 보면서 내지른 군중들의 환호는 곧 죽음의 절규로 변했다. 사명자의 삶을 살아도 일시적인 패배가 있을 수 있지만 그 패배가 오히려 성숙과 자유를 가져다주고 더 나아가 최종적인 승리를 가져다준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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