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된 인생이 되는 길

[ 알치바 마트리 : 크리스마스 이브 ]



본문말씀 : 마가복음 1장 1절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 복된 인생이 되는 길 >

 본문 1절을 보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이 짧은 한 구절이 주는 교훈으로서 복된 인생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예수님의 성육신을 믿으라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으로 시작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이시다. 헬라어로 그리스도는 히브리어로 메시야로서 ‘하나님의 대리자로 성별되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을 가진 단어다. 예수님의 탄생일을 뜻하는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와 미사라는 말의 합성어로 ‘그리스도에게 경배하는 날’이란 뜻이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생생하게 나타내신 역사상 최대 사건이다.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 가능성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죄와 허물이 많아도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가능성까지 철회되지는 않는다. 내가 혼자일 때는 하나님의 사랑이 더 깊어질 수 있다. 소중한 존재인 내가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믿으면 나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더 구체적이고 실제적이게 된다.

 매년 1월 1일은 설날이다. 설날의 어원에 대한 여러 설이 있다. 첫째, ‘설익은 날’이란 뜻에서 생겼다는 설이다. 새로운 환경, 상황, 사람을 만나면 낯설게 느끼듯이 새해가 되면 낯설다는 느낌이 생겨서 설날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둘째, ‘서러운 날’이란 뜻에서 생겼다는 설이 있다. 새해가 되어 나이를 한 살 더 먹으면서 서러운 느낌이 드니까 설날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설날을 설익은 날이나 서러운 날이 아닌 설레는 날로 만들라. 그러려면 꼭 필요한 존재가 예수님이다. 그 사실을 일깨우려고 교회는 설날 7일 전을 성탄절로 삼았을 것이다. 성탄절을 예수님이 내 마음에 새롭게 탄생하는 날로 삼으면 끝은 시작이 되고 어둠은 빛이 되고 회한은 회개를 낳고 서러움은 설레임으로 변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성육신처럼 복의 원천이 되는 것은 없다.

2.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하라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마가복음은 1장 1절만이 서론이다. 그런데 그 한 구절의 서론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고 하나님의 아들임과 동시에 예수님으로부터 복음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마가복음이 기록될 당시에 로마 황제 가이사는 신처럼 여겨졌기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은 생명을 걸어야 쓸 수 있었다. 또한 복음이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선언은 모든 복된 일이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뜻도 된다. 그러므로 문제 해결이나 기적적인 반전의 역사를 원하면 예수님을 붙드는 일부터 시작하라.

 한 교인이 돈을 벌려고 주일에도 일했는데 몇 년이 지나도 돈을 벌기는커녕 생활이 더 어려워지자 비로소 말했다. “목사님, 저는 열심히 일하면 돈을 벌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역시 믿음 문제가 가장 우선적인 것 같습니다.” 믿음 문제에서 먼저 승리하려면 예수님과 좀 더 가까워지라. 매년 성탄절을 예수님과 새롭게 만나거나 좀 더 가까워지겠다고 결심하는 전환점으로 삼으라.

 예수님과 가까워지면 나의 가치를 깨닫게 되기에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속상하지 않고 남의 칭찬을 받아도 마음이 높아지지 않는다. 또한 어떤 상황에서도 쉽게 낙심하지 않고 어떤 유혹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예수님과의 깊은 만남은 소리 없이 세상을 더 낫게 바꾸는 혁명의 시발점이고 하나님의 형상을 내면에 회복시켜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준다. 성도는 내면에 거룩한 핵이 있어서 가는 곳마다 변화를 일으키고 사랑이 꽃피게 한다. 그 핵이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결국 복음적인 삶처럼 복된 삶은 없다.

3. 작은 시작을 중시하라

 본문이 주는 또 한 가지 핵심 교훈은 작은 시작의 중요성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작게 시작되었지만 지금 얼마나 그 영향력이 커졌는가? 하나님의 역사는 대개 작은 시작을 통해 이뤄진다. 하나님은 좋은 것을 향한 새로운 시도와 시작을 기뻐하신다. 그런데 새롭게 시작하는 것은 대개 작기에 작은 시작을 중시하라.

 1729년 11월 어느 날에 몇 명의 젊은이가 영국 런던의 한 좁은 장소에 모였다. 그 작은 모임이 나중에 영국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일을 하는 모임이 되었다. 그 모임에 소속된 요한 웨슬레와 조지 휫필드는 계몽주의 철학으로 인한 인본주의와 산업혁명 과정에서의 혼란으로 신음하던 영국에 새로운 복음의 불길을 일으켰다. 그처럼 작은 시작과 작은 모임을 경시하지 말고 작은 것을 통해 큰일을 이뤄내는 비전을 가지라.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복음의 작은 역사가 영혼 구원과 영혼 변화와 전인적인 치유를 일으켰고 참된 용서와 참된 해방을 통해 그 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도록 만들었다. 복음을 통해 포악한 자가 아닌 온유한 자의 승리가 시작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자가 아닌 십자가에 못 박힌 자의 승리가 시작되었다. 작은 시작도 복음과 함께 시작되면 무시할 수 없는 큰 힘과 영향력을 낳는다.

 늘 더 나은 삶을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하라. 처음에 작게라도 시도하고 시작해야 발전할 수 있다. 작다고 해서 새로운 시도와 시작이 없으면 고인 물처럼 썩거나 후퇴한다. 수시로 새롭게 시작하려고 결단해야 성장이 이뤄진다. 무엇이든지 새롭게 시작할 때는 예수님을 붙잡고 시작하라. 너무 멀리만 바라보거나 너무 큰 것이나 큰 변화만 추구하지 말라. 그러면 처음부터 용기를 잃는다. 나의 일상에서부터 겸손하게 사랑의 십자가를 지고 한 걸음이라도 내딛으면 어둠은 점차 빛에게 자리를 내주고 천국과 인물 비전은 좀 더 가까워질 것이다.

4. 성육신의 삶을 앞세우라

 ‘복음의 시작’이란 표현은 성도를 앞으로 뛰쳐나가게 하는 출발 신호와 같다. 복음을 앞세워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삶을 따르는 거룩한 천국 행렬에 동참하라. 작은 시작을 두려워하지 말라. 말구유에서의 작은 시작이 세상을 변화시켰고 구유에 놓이신 아기 예수님이 인류 구원의 주춧돌이 되셨다. 그 예수님을 붙잡고 내가 꼭 해야 할 일을 시작하고 남의 입장에 서는 성육신의 삶을 통해 예수님의 향기가 널리 퍼지게 하라.

 성육신의 사랑은 눈높이를 맞춘 사랑이다. 그런 사랑을 하려면 자신을 낮추라. 자신을 낮추라는 말은 역설적으로 자신을 높이기에 힘쓰라는 말도 된다. 높은 곳에 있으면 낮출 여유가 있지만 낮은 곳에 있으면 낮출 여유가 없다. 또한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낮아지면 자존심 상하지 않고 오히려 자존감이 높아지지만 낮은 자리에 있으면서 낮아지면 자존심이 상하고 자존감도 떨어지기 쉽다. 그러므로 넉넉히 낮아질 수 있도록 높은 자리에 오르거나 큰 인물이 되기 위해 힘써 준비하고 노력하고 기도하라.

 한 기업 회장은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하고 책임적으로 살면서 교회 청소도 도맡아 했다. 그는 청소할 때마다 자존심이 상하기보다 오히려 자존감이 높아졌다. 또한 그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담임목사의 거룩한 비전을 후원하려는 목적으로 성공을 추구해서 땀과 지혜와 은혜를 앞세워 성공한 후 은밀하게 물질적인 헌신도 많이 했다. 그렇게 은밀히 헌신했지만 다른 교인들은 그의 은밀한 헌신을 대략 눈치 채고 존경하면서 믿음의 도전을 받았다. 그것이 성육신의 삶이 주는 신비한 행복이다.

 그 회장은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첫 사랑에 빠져 프러포즈를 할 때처럼 늘 아내를 위해주고 높여주었고 누군가를 섬기려고 존재하는 인간 셔틀처럼 가족에게 최상의 섬김을 베풀었다. 그러자 아내도 자존감이 높아졌고 남편을 더 존중하고 높였다. 만약 돈도 벌지 않고 빈둥거리는 남편이 아내를 위해 인간 셔틀처럼 섬긴다면 아내는 섬김 받으면서도 기분이 유쾌하지 않을 것이고 남편도 속으로는 자존심이 상할 것이다. 그처럼 섬김으로 인한 상처와 오해가 없기를 원하면 큰 인물이 되기를 힘쓰라.

 성육신의 마음을 가지라는 것은 낮고 비천한 존재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높은 자리에 올랐어도 상대와 눈높이를 맞추도록 낮아지라는 것이다. 그처럼 성육신의 마음을 가지고 살 때 점차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면서 예민함은 타인 감수성으로 변하고 예수님의 능력도 나타나면서 실타래처럼 읽힌 상황에서도 실마리가 하나씩 풀리는 기적적인 역사가 생겨날 것이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사람의 현실과 동떨어진 상황에서 진리를 따라 살라고 명령만 하시지 않고 성육신을 통해 사람의 현실에 직접 들어오셔서 진리의 길로 이끄셨다. 그처럼 진리는 세상을 이탈하기보다 세상을 관통하는 역사로 나타나야 한다. 초월적인 진리만큼 현실에서 빛나는 체험적인 진리의 중요성을 알려 주시려고 예수님은 성육신하셨다. 요즘 억울한 사람과 소외된 사람이 많다. 그들에게 다가가 그들이 외롭지 않은 존재임을 알려주고 의로운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성육신의 삶으로 생생하게 나타내는 예수 증인이 되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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