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처럼 지혜롭게 되라
본문말씀 : 디니엘 5장 5-12절
5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들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석회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6 이에 왕의 즐기던 얼굴 빛이 변하고 그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그의 무릎이 서로 부딪친지라 7 왕이 크게 소리 질러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쟁이를 불러오게 하고 바벨론의 지혜자들에게 말하되 누구를 막론하고 이 글자를 읽고 그 해석을 내게 보이면 자주색 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그의 목에 걸어 주리니 그를 나라의 셋째 통치자로 삼으리라 하니라 8 그 때에 왕의 지혜자가 다 들어왔으나 능히 그 글자를 읽지 못하며 그 해석을 왕께 알려 주지 못하는지라 9 그러므로 벨사살 왕이 크게 번민하여 그의 얼굴빛이 변하였고 귀족들도 다 놀라니라 10 왕비가 왕과 그 귀족들의 말로 말미암아 잔치하는 궁에 들어왔더니 이에 말하여 이르되 왕이여 만수무강 하옵소서 왕의 생각을 번민하게 하지 말며 얼굴빛을 변할 것도 아니니이다 11 왕의 나라에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사람이 있으니 곧 왕의 부친 때에 있던 자로서 명철과 총명과 지혜가 신들의 지혜와 같은 자니이다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 왕이 그를 세워 박수와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쟁이의 어른을 삼으셨으니 12 왕이 벨드사살이라 이름하는 이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고 지식과 총명이 있어 능히 꿈을 해석하며 은밀한 말을 밝히며 의문을 풀 수 있었나이다 이제 다니엘을 부르소서 그리하시면 그가 그 해석을 알려 드리리이다 하니라
< 다니엘처럼 지혜롭게 되라 >
나라가 외침으로 경각에 달렸을 때 바벨론의 벨사살 왕은 “어떻게 바벨론 도성이 무너지랴?”라는 자만심을 가지고 전국의 귀족 천 명을 초청해 잔치를 베풀었다. 그때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한 금 그릇에 술을 담아 마시는 엄청난 죄를 저질렀다. 그리고 금, 은, 구리, 쇠, 나무, 돌로 만든 신들을 찬양했다.
바로 그때 불길한 징조가 일어났다. 갑자기 사람의 손가락들이 나타나 손가락으로 왕궁 촛대 맞은 편 석회벽에 어떤 글씨를 쓰고 사라졌다(5절). 그것을 본 왕의 얼굴을 사색이 되었다. 그리고 공포에 질려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쟁이를 불러오게 하고 바벨론의 지혜자들에게 누구든지 그 글자를 읽고 해석해 주면 나라의 셋째 통치자로 삼겠다고 했다(7절). 그러나 누구도 해석하지 못해서 벨사살 왕이 크게 번민했고 귀족들도 다 놀랐다(8-9절).
그때 왕비가 왕에게 2가지를 권고했다. 첫째, 번민에 빠지지 말라고 했다(10절). 둘째,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사람인 다니엘을 불러 해석하게 하라고 했다(11-12절). 그 권고를 듣고 벨사살이 다니엘을 불러 석회벽에 쓰인 글을 읽고 해석해달라고 했다. 그때 지혜와 총명을 갖춘 다니엘이 다시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본문 10절에 언급된 ‘왕비’는 현재의 <개역개정성경> 이전의 <개역한글성경>에서는 ‘태후’로 표현되었다. 여러 정황상 왕비보다는 태후의 표현이 맞다. 결국 그 왕비는 벨사살 왕의 왕비나 그의 부친인 나보니더스 왕의 왕비가 아닌 느부갓네살 왕의 왕비로 추정된다. 그 왕비가 벨사살 왕에게 말할 때 본문 11절에서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 왕이”라고 표현한 것은 실제로 느부갓네살 왕이 벨사살 왕의 부친(나보니더스)이란 뜻은 아니다. 당시에 ‘부친’이란 말은 ‘선조’란 뜻으로도 쓰였기에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느부갓네살 왕 때부터 다니엘에 관한 스토리를 잘 알고 있었던 느부갓네살 왕비에 의해 다니엘이 어떻게 묘사되었는가? 본문 11절 전반부를 보라. “왕의 나라에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사람이 있으니 곧 왕의 부친 때에 있던 자로서 명철과 총명과 지혜가 신들의 지혜와 같은 자니이다.” 다니엘은 이방 나라의 왕비 입에서 ‘신들의 지혜와 같은 자’란 놀라운 찬사를 받았다. 그처럼 성령 충만한 성도에게 있어야 하는 제일 징표 중 하나는 지혜다. 성도가 제일 듣지 말아야 할 말은 미련하다는 말이다.
멍청하다는 말도 듣지 않도록 하라. 성도는 때로는 멍청할 정도로 순수해야 하지만 진짜 멍청하게 살면 안 된다. 기도하면서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 어떻게 멍청하게 되겠는가? 기도할 때 매일 “달라!”라고만 한다면 멍청해지지만 바른 기도를 드린다면 결코 멍청해질 수 없다. 바른 기도란 입으로 말하는 기도와 귀로 듣는 기도가 겸비된 기도다. 기도에는 내 요구를 말하는 것과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도 있어야 한다. 기도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은 결코 멍청하게 될 수 없다.
사탄과 세상은 사악한 꾀로 하나님의 나라를 잠식하고 순수한 성도를 옭아매려고 한다. 그런 상황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사랑과 평화를 내세우면서 사탄과 세상에 무조건 당하며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또한 오래 참는다고 하면서 아무런 행동과 조치도 없이 압제 받는 삶을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회복의 날만 무작정 기다리는 것도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고통스런 현실 속에서 상처를 입고 조롱을 당하고 심지어 물리적인 폭력에 당하는 것을 무조건 십자가라고 여기지 말고 지혜롭게 그 상황을 극복해 내라.
하나님의 지혜는 추상적인 감동만 일으키는 지혜가 아닌 실제적인 변화의 능력을 이끄는 지혜다. 소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두운 현실을 타개하려는 모습이 없다면 그 소원은 참된 소망이 되지 못하고 헛된 망상으로 끝난다. 현실을 이겨내는 지혜를 구하라. ‘위치 없음(nowhere)’이란 비극적인 삶을 ‘지금 여기(now here)’란 희망적인 삶으로 변화시키려면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앞세워 치열하게 현실을 극복해내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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