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두려워하지 말라

 

[ 지거 쾨더 : 아브라함 ]


본문말씀 : 다니엘 2장 36-45절


36 그 꿈이 이러한즉 내가 이제 그 해석을 왕 앞에 아뢰리이다 37 왕이여 왕은 여러 왕들 중의 왕이시라 하늘의 하나님이 나라와 권세와 능력과 영광을 왕에게 주셨고 38 사람들과 들짐승과 공중의 새들, 어느 곳에 있는 것을 막론하고 그것들을 왕의 손에 넘기사 다 다스리게 하셨으니 왕은 곧 그 금 머리니이다 39 왕을 뒤이어 왕보다 못한 다른 나라가 일어날 것이요 셋째로 또 놋 같은 나라가 일어나서 온 세계를 다스릴 것이며 40 넷째 나라는 강하기가 쇠 같으리니 쇠는 모든 물건을 부서뜨리고 이기는 것이라 쇠가 모든 것을 부수는 것 같이 그 나라가 뭇 나라를 부서뜨리고 찧을 것이며 41 왕께서 그 발과 발가락이 얼마는 토기장이의 진흙이요 얼마는 쇠인 것을 보셨은즉 그 나라가 나누일 것이며 왕께서 쇠와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은즉 그 나라가 쇠 같은 든든함이 있을 것이나 42 그 발가락이 얼마는 쇠요 얼마는 진흙인즉 그 나라가 얼마는 든든하고 얼마는 부서질 만할 것이며 43 왕께서 쇠와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은즉 그들이 다른 민족과 서로 섞일 것이나 그들이 피차에 합하지 아니함이 쇠와 진흙이 합하지 않음과 같으리이다 44 이 여러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이라 45 손대지 아니한 돌이 산에서 나와서 쇠와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서뜨린 것을 왕께서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꿈은 참되고 이 해석은 확실하니이다 하니



< 미래를 준비하며 살라 >

 역사를 보면 도저히 망하지 않을 것 같던 강한 제국들도 때가 되면 망한다. 이 세상의 어떤 제국도 영원하지 않다. 결국 믿고 의지할 분은 영원하신 하나님 한분뿐이다. 영안이 열렸다는 것은 미래를 점치고 사람 마음을 읽는 신묘한 능력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미래를 점치는 것보다 하나님이 미래를 주관하심을 믿는 것이 더 큰 능력이고 사람 마음을 읽는 능력보다 힘들 때도 믿음과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 더 큰 능력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언은 미래를 점쳐서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천국과 미래를 예비하도록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의 핵심 주제는 십자가를 지면 살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그런 말씀은 별로 은혜가 안 되는 것 같지만 참된 은혜를 준다. 천국에 가면 십자가를 지고 손해를 본 것이 얼마나 큰 이익이었는지를 깨달을 것이다.

 세상에 길들여지면 참된 예언의 말씀이 별로 달갑지 않고 숫자를 과시하고 힘으로 밀어붙여야 속이 시원할 것 같다. 그러나 이 땅에서 속이 시원하지 않아도 천국에서 속이 시원해지는 길로 가라. 힘들다고 하나님 외에 다른 희망의 원천을 찾으면 영안이 닫힌다. 그때 힘 있는 사람을 찾으면 오히려 더 찾지 못한다. 어떤 유익을 얻으려고 계산적으로 사람을 찾으면 그도 계산적으로 나를 대하기에 결국 수치와 조롱만 받고 참된 도움을 얻지 못한다는 말씀이 진짜 예언적인 말씀이다. 영안이 닫히면 참된 예언을 오히려 외면한다.

 참된 예언은 사람의 위로와 도움을 구하는 것이 헛됨을 끊임없이 일깨워 주지만 거짓 예언은 사람과 돈과 권력과 크기를 더 바라보게 한다. 참된 예언자가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간절히 호소할 때 더 이상 무속적인 예언 점을 추구하지 말고 참된 예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게 되듯이 문제가 있고 사탄이 공격해도 믿음만 잃지 않으면 산다.

 앞날에 대해 너무 자세히 알려고 하지 말라. 앞날을 아는 척 하는 사람은 오히려 멀리하라. 요새 점을 쳐도 구약 시대처럼 죽이지는 않지만 영혼이 죽는 더 무서운 일을 당한다. 비유적으로 믿음의 반대말은 점이다. 앞으로 역사가 어떻게 펼쳐질지에 대해 너무 안달하며 알려고 하지 말라. 미래의 역사는 아무도 모른다. <다니엘>을 아무리 정확히 해석해도 인간의 해석과 지혜는 한계가 있다. 미래를 잘 몰라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미래에 대해 잘 몰라도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 복이다. 사실상 세상의 종말을 아는 것보다 자신의 종말을 인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종말을 인식하는 것’과 ‘종말을 두려워하는 것’은 다르다. 종말을 인식해도 하나님 안에 있으면 종말이 두렵지 않다. 언제 죽어도 “할렐루야!” 하고 그 현실을 받아들이도록 철저히 믿음으로 살면서 복된 미래를 준비하라. 왜 하나님이 느부갓네살의 꿈과 다니엘의 해석을 통해 미래를 대략적으로 조망하게 하셨는가?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알려 주고 하나님 안에서 미래를 잘 준비하라는 뜻이다.

< 역사적으로 펼쳐질 일곱 나라 >  
 
 다니엘은 본문 바로 앞의 31-35절에서 느브갓네살 왕의 꿈에 보인 신상에 대해 언급한 후 곧 이어 그 신상이 느부갓네살 이후에 등장할 나라들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 해석을 따라 느부갓네살 이후로 역사적으로 펼쳐질 일곱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첫째, 금으로 된 머리 나라인 바벨론 제국이다(37-38절). 당시 바벨론에는 성내의 사당, 신전, 공공건물 등도 금으로 장식될 정도로 금이 풍부했다. 둘째, 은으로 된 가슴과 두 팔 나라인 메대와 바사 제국이다(39절). 메대와 바사는 바벨론보다 영토는 넓었지만 왕권과 국력은 뒤떨어졌다. 셋째, 놋으로 된 배와 넓적다리 나라인 헬라 제국이다(39절). 헬라 제국의 영토는 당시로서는 온 세계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넷째, 쇠로 된 쇠로 된 종아리 나라인 로마 제국이다(40절). 역사상 로마처럼 강하게 오래 지탱된 제국이 없었다.

 다섯째, 쇠와 진흙으로 된 발과 발가락 나라인 열 왕의 제국이다(41-43절). 다섯째 제국은 넷째 나라인 로마 제국 이후에 등장한다. 그 제국이 과거에 존재한 나라인지, 현재 존재하는 나라인지, 앞으로 존재할 나라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양하다. 아마 앞으로 존재할 나라일 가능성이 크다. 이 다섯째 제국은 로마 제국의 성격이 이어진 나라다. 다니엘 7장 24절 말씀에 의하면 이 다섯째 제국은 서구 로마 문화의 영향을 받은 열 나라가 연방을 이룬 제국으로 추정된다. 그 제국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여섯째, 열 왕의 제국 다음의 나라인 적그리스도의 나라다. 다니엘 7장 23-25절 말씀을 보면 열 왕의 제국 이후에 또 한 나라가 일어난다고 언급한다. 그 나라가 바로 적그리스도의 나라다. 그 나라는 먼저 있었던 열 왕의 제국 중에서 세 왕을 복종시키고 3년 반 동안 하나님을 대적하고 성도를 핍박한다. 결국 본문 44절을 보면 여러 왕들의 시대에 이어서 바로 ‘하나님이 세우신 한 나라’가 등장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열 왕의 제국과 하나님의 세우신 나라 사이에 적그리스도의 나라가 등장한다.

 일곱째, 세상의 마지막 나라인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다(44-45절). 하나님에 세우신 나라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첫째, 여러 나라가 아닌 하나의 나라다. 둘째, 영원히 망하지 않는다. 셋째, 국권이 다른 백성 즉 사람의 손에 돌아가지 않는다. 넷째, 모든 세상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선다. 다섯째, 세상 나라를 쳐서 멸망시킬 때 재림하실 예수님을 상징하는 ‘손대지 아니한 돌’이 산에서 나와서 쇠와 놋과 진흙과 은과 금으로 된 신상(인간 제국)을 부서뜨린다. 그처럼 역사는 하나님의 손길로 끝나면서 결국 하나님으로 끝난다.

< 미래를 두려워하지 말라 >

 본문이 주는 핵심 교훈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믿고 미래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교훈이다. 성도는 최종 승리가 보장된 자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운 시련과 문제가 있어도 패배감에 젖어 살지 말라. 어려울수록 더욱 내일의 찬란한 꿈과 희망을 가지고 최종 승리를 믿고 일어서라. 꿈을 가진 사람은 환경이 어려워도 낙심하지 않고 힘들어도 불평하지 않고 그 시간에 땀 흘려 내일을 준비하면서 삶을 낭비하지 않는다. 그처럼 어려울 때도 꿈을 새롭게 하고 다시 날아오르면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안아 주실 것이다.

 며칠 전 꿈에서 한 여자 아이가 내 앞에 나타났다. 그 아이의 등 부분에 작은 날개가 달려 있어서 내가 물었다. “얘야, 그 작은 날개로 날 수 있겠니?” 그 아이가 말했다. “목사님, 보세요.” 그리고 팔랑팔랑 날갯짓을 하면서 땅에서 조금 날아올랐다. 조금 힘겨워하는 것 같았지만 천진난만한 밝은 표정으로 날갯짓 하는 모습이 너무 대견하고 감격이 되어서 가까이 다가가 그 아이를 꼭 안아 준 상태에서 두 눈을 감고 눈물을 흘렸다.

 처음에는 아이의 힘겨워하면서도 밝은 얼굴로 날갯짓하는 것에 감격해서 눈물이 나왔지만 그 다음에는 힘든 상황에서도 꿈을 품고 날갯짓을 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감동하셔서 꼭 품에 안아 주신다는 생각에 더 감격해서 눈물이 나왔다. 그리고 잠에서 깨니까 실제로 많이 울고 있었다. 그 꿈속의 아이처럼 내 어깨에 달린 날개가 화려하지 않고 기능적으로 조금 뒤떨어져도 감사하면서 거룩하고 찬란한 꿈과 비전을 향해 힘써 날아오르면 하나님이 사랑의 손길로 붙잡아 주시고 넓은 품으로 안아 주실 것이다.

 어떤 경우에서도 좌절한 상태로 땅에 납작 엎드려 있지 말라. 잃어버린 꿈을 되찾아야 능력 있는 멋진 삶을 살 수 있다. 이 시간에 다시 새롭게 하나님 안에서 최종 승리에 관한 믿음을 굳게 하라. 그리고 마음 문을 열고 하나님이 ‘손대지 아니한 돌’처럼 내 안의 인간적인 부분을 온전히 부서뜨리게 하라. 성도의 삶은 결국 해피앤드로 끝난다. 그처럼 최종 승리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현재의 고통과 문제를 넉넉하게 극복하며 살라. 더 나아가 하나님이 지게 하신 십자가를 기쁘게 지라.

 십자가를 피하려니까 두려움이 커지는 것이지 십자가를 피하지 않으면 두려움에 지배되지 않는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란 말은 희생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란 말이다. 아무리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해도 성도다운 모습과 행동이 없다면 그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다. 모순적인 언행 불일치의 믿음을 가지면 수시로 흔들리고 두려움도 계속되고 남에게 본도 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도 되지 않는다. 그런 교인이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하면 상대는 속으로 피식 웃는다. 그래서 성도의 믿음과 더불어 성도의 삶도 중요하다.

 정치에서도 인성과 책임감이 없는 사람이 어떤 정치인을 지지하라고 하면 오히려 더 지지하지 않는다. 결국 자신의 무책임한 삶이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의 표와 이미지를 깎아먹은 셈이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을 지지해 주기를 바랄 때는 인격적이고 책임적인 모습을 보이고 남을 배려하고 남의 말을 경청하며 높여 주어야 한다. 그런 사람이 진짜 좋은 지지자다. 그러면 그의 삶을 보고 그가 지지하는 정치인을 지지한다. 언행이 비신앙적인 교인이나 목사가 열성적으로 지지하는 정치인은 남들이 더 외면한다.

 세상 정치에서도 지지자의 인격적이고 희생적인 삶이 중요한데 믿음의 세계에서 성도의 인격적이고 희생적인 삶은 더 중요하다. 왜 겨울 전에 나뭇잎이 떨어지는가? 힘든 시절에 온도와 수분 유출을 막아 겨울잠을 자는 나무의 생존을 돕고 봄에 더욱 찬란하고 무성한 새 잎을 내기 위해서다. 자기를 희생하고 떨어뜨릴 줄 알면 나뭇잎처럼 떨어지는 것이 두렵지 않고 고난의 겨울이 지나면 더욱 찬란한 새 봄 인생을 맞이한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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