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빛으로 사는 길

 

[ 지거 쾨더 : 보호자이신 성령 ]


본문말씀 : 다니엘 1장 1-7절


1 유다 왕 여호야김이 다스린 지 삼 년이 되는 해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을 에워쌌더니 2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들의 신전에 가져다가 그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두었더라 3 왕이 환관장 아스부나스에게 말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왕족과 귀족 몇 사람 4 곧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모든 지혜를 통찰하며 지식에 통달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설 만한 소년을 데려오게 하였고 그들에게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치게 하였고 5 또 왕이 지정하여 그들에게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에서 날마다 쓸 것을 주어 삼 년을 기르게 하였으니 그 후에 그들은 왕 앞에 서게 될 것이더라 6 그들 가운데는 유다 자손 곧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었더니 7 환관장이 그들의 이름을 고쳐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하고 하나냐는 사드락이라 하고 미사엘은 메삭이라 하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라 하였더라



< 세상의 빛으로 사는 길 >  

 사람들은 종말론과 관련해 이상한 얘기에 관심이 많다. 즉 666에 대한 기괴한 해석들 얘기, 캘리포니아와 일본 열도의 침몰 얘기, UFO 얘기, 혜성의 충돌 얘기, 9개 행성이 태양을 중심으로 십자가를 만들면 종말이 온다는 얘기, 이상한 돌연변이의 출현 얘기 등에 관심을 가지면서 이단과 신비주의에 빠진 영혼이 수없이 많다. 한국에서는 1992년에 종말이 온다고 주장했던 다미선교회에 빠져서 영혼이 침탈당한 사람만 약 5만 명에 달했다. 종말론에 관한 신기한 얘기들에 너무 관심을 기울이면 이단에 미혹되기 쉽다.

 <다니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세상만사에 대한 절대주권을 행사하심을 명백히 밝히는 예언서다. 그러나 <다니엘>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부분은 미래의 예언이 아니라 과거의 역사다. 과거의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어야 사실상 미래의 역사를 주도할 수 있다. <다니엘>을 통해 미래를 감지해 대비하고 종말이 어떻게 펼쳐질지를 좀 더 알고 대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어려운 상황에서 어떻게 성도답게 사는가 하는 것이다. 성도가 거룩한 자존심을 가지고 세상의 빛으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패배할 때 낙심하지 말라

 본문 1절에는 유다 18대 왕 여호야김이 나온다. 여호야김 3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예루살렘이 에워싸임을 당했다가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가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겨졌다(2절). 전쟁에서 패배해 왕이 포로로 잡히고 성전이 훼손당한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도의 패배는 늘 일시적인 패배다.

 본문 2절 전반부를 자세히 보라.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그의(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기시매.” 성전 훼파가 겉으로는 느부갓네살에 의해 된 것 같지만 사실상 그것도 주께서 허락하신 것이었다. 결국 성전 훼파가 겉으로 보면 원망스런 사건 같지만 실제로는 희망적인 사건이다. 왜 그런가? 주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성도에게는 패배에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손길이 있다. 그러므로 고통 중에도 낙심하지 말고 절망 중에도 희망을 가지라. 성도의 징계는 잠깐의 징계다. 악의 세력이 대단하게 보여도 여전히 하나님은 세상을 주관하신다. 겉으로는 악이 이긴 것 같아도 실제로는 하나님이 어떤 교훈을 위해 잠시 악의 승리를 허용하신 것이다.

 성도의 실패는 믿음의 진실성을 나타내는 시험 과정이다. 실패가 없다면 영혼이 강건해지거나 정신이 성숙해질 수 없다. 하나님은 큰 일을 맡기기 전에 시련과 실패 과정을 겪게 하신다. 시련과 실패를 통해 중심이 잡히고 도전정신이 생기고 잠재성이 개발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힘든 과정을 겪으면서 정신적인 사투를 벌인 후에야 잘못된 것을 고치고 실패를 겪은 후에야 겸손하게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해 진짜 성공을 이룰 수 있다.

2. 말씀과 기도를 앞세우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이스라엘에 대한 지혜로운 정복 정책을 폈다. 그래서 환관장 아스부나스에게 이스라엘의 왕족과 귀족 몇 사람, 곧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모든 지혜를 통찰하며 지식에 통달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설 만한 소년을 데려오게 했고 그들에게 갈대아(바벨론) 사람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치게 했다(3-4절). 또한 왕이 먹는 음식과 마시는 포도주를 주고 3년 동안 기르게 한 후 왕 앞에 서게 했다(5절).

 그렇게 선별된 유다 자손 중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었는데 그들의 이름을 환관장 아스부나스가 바벨론 식으로 벨드사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라고 바꿨다(6-7절). 바벨론에서 강제로 이름이 바뀌었으니 얼마나 싫겠는가? 그래도 그 상황에서 그들은 성도답게 빛을 발하며 살았다. 어떤 사람은 신앙을 내세워 세상을 외면하거나 세상의 원칙과 질서와 흐름과 멜로디를 무조건 거부한다. 그런 행동이 지나치면 물을 떠난 물고기가 된다. ‘물에 떠내려가지 않는 물고기’가 되기를 힘쓰되 ‘물을 떠난 물고기’는 되지 말라.

 어떤 사람은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고 예배에 꾸준히 참석하고 말씀 생활과 기도 생활도 잘하는 것 같은데 하나님이 외면하신다. 왜 그런가? 세상에서 성도답게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머와 장난이 깃든 언행도 없이 완벽하고 차갑고 칼 같이 살라는 말이 아니다. 약점과 허물이 있어도 전체적인 삶에서 모범을 보이라는 말이다. 삶의 모범이 없는 성경 지식이나 신앙고백은 허무한 것이다. 천국 보상은 세상에서 진리의 빛을 비출 때 더욱 넘치게 주어진다.

 믿는 성도에게 접근해서 이단은 “구원을 확신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미끼로 삼아 영혼을 낚지만 성도에게 더욱 중요한 질문은 “구원받은 성도답게 사십니까?”라는 질문이다. 세상에서 완벽하게 살지는 못해도 예수님처럼 살려고 애쓰면 하나님이 나를 더 나은 성도로 만들어 주실 것이다. 믿음을 내세워 세상을 경시하거나 외면하지 말라. 세상도 하나님이 창조하셨기에 하나님이 나를 보내신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빛 된 존재로 살라.

3. 거룩한 자존심을 가지라

 다니엘과 세 친구는 이름이 바벨론 식으로 바뀌었어도 늘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려고 했다. 다니엘 8장 15절에는 “나 다니엘이 이 환상을 보고”라는 말씀이 나오고 다니엘 9장 2절에는 “나 다니엘이 책을 통해”라는 말씀이 나온다. 그 구절들은 다니엘이 자기의 원래 이름을 소중히 여기고 거룩한 자존심을 가지고 살았다는 암시다. 그처럼 성도도 거룩한 자존심을 가지고 세상에서 성도답게 살아야 한다.

 사도행전 26장 24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포로 상태에서도 총독과 왕 앞에서 “내가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다 나처럼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했다. 그처럼 거룩한 자존심이 넘치는 고백을 앞세워 살라. 세상에서 가난하게 살면 이렇게 고백하라. “여러분! 제가 가난한 것 외에는 다 저처럼 되십시오.” 만약 병들었으면 이렇게 고백하라. “여러분! 제가 병든 것 이외에 다 저처럼 되십시오.” 그런 거룩한 자존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자신감 있게 살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라는 말은 법을 완벽하게 지키며 살라는 말이 아니다. 법 중에는 악법이나 불합리한 법도 많다. 수많은 법인들의 정관도 일종의 법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제정한 법의 숫자는 80억 인류보다도 많다. 세법, 보건법, 교통법 등 한 사람이 지켜야 할 관련된 법 조항도 수십만 개가 넘을 것이다. 그것을 완벽하게 다 알아서 지킬 수는 없다. 물론 법을 잘 지키려고 해야 하지만 법을 완벽하게 잘 지키는 삶을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이나 의인의 삶이라고 여기는 헛된 율법주의자가 되지 말라.

 또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라는 말은 도덕적으로 완벽하게 살라는 말도 아니다. 사람에게는 다 죄와 허물이 있다. 결국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라는 말은 잘못했을 때 진심으로 회개하라는 말이다. 다만 회개를 변명과 핑계를 위한 면죄부로 삼지는 말라. 회개를 잘 하라는 말은 쉽게 죄를 지은 후 쉽게 회개해도 괜찮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회개를 잘하라는 말은 회개를 많이 하라는 말이 아니라 회개한 다음에는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는 마음과 실천이 따르는 참된 회개자가 되라는 말이다.

< 참된 회개를 이뤄 내라 >

 회개한 후 똑같은 죄를 짓고 또 회개하면 되니까 괜찮다고 여기지 말라. 예를 들어 회의 때 혈기를 부린 것을 회개했다면 다음 회의 때는 혈기를 참아야 하는데 또 쉽게 혈기를 부린다. 그때 또 회개하면서 혈기 부린 대상에게 “저를 용서하세요. 사랑합니다.”라고 한다. 그리고 다음에 또 혈기를 부린다. 그처럼 쉽게 혈기를 부리고 쉽게 회개하는 일을 계속 반복한다면 그런 식의 회개는 참된 회개가 아니다. 어떤 사람은 남에게 큰 상처를 입혀 놓고 자기는 뒤 끝이 없다면서 금방 헤헤거린다. 기막힌 자기중심주의다.

 상처를 준 사람은 자기가 한 일을 잊고서 뒤 끝이 없기 쉽지만 상처를 받은 사람은 자기가 당한 일을 오래 기억해서 뒤 끝이 있기 쉽다. 회개는 남에게 상처를 준 후 “나는 뒤 끝이 없어.”라고 하면서 헤헤거리는 것이 결코 아니다. 잘못된 나의 언행에 대해 진정으로 회개했다면 타인 감수성을 발휘해 다음에는 힘써 잘못된 언행을 삼가려는 결심과 행동이 따르게 하라. 그런 결심과 행동이 없는 회개는 사람을 우습게 여기는 태도다. 그런 무감각한 자기중심적인 긍정주의자가 되지 말라.

 며칠 전 경인 아라뱃길에서 실종된 30세의 젊은 여성이 사흘 만에 뱃길 수로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몇 년간 열심히 모은 4천만 원을 보이스피싱 사기로 잃은 후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오랫동안 땀 흘려 벌고 저축한 돈을 단번에 털어가는 금융사기는 수많은 사람의 영혼과 정신과 심지어 생명을 앗아가는 것으로서 엄중히 벌해야 한다. 특히 교회에서는 돈 거래를 절대 없게 하고 나중에 회개하면 되는 줄 알고 의도적인 거짓으로 남의 돈을 털어갈 생각은 꿈에도 없게 하라. 하나님이 다 지켜보고 행한 대로 갚으신다.

 남에게 사기를 치거나 추행을 해서 그를 미치도록 아프게 만든 후 “나는 눈물로 회개했어.”라고 스스로 심리적인 위안을 가지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회개는 심리적인 위안이 아니다. 회개를 심리적인 위안으로 여기니까 사기 친 후 수감되어 회개한 것처럼 행동하다가 다시 사회에 나가서 또 사기를 치는 것이다. 회개를 지옥의 면죄부나 인간관계 파산의 면죄부로 내세우면서 심리적인 위안 도구로 남용하지 말라. 실천과 행동이 따르는 참된 회개가 있을 때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이 나타날 것이다.

 왜 성령 충만해야 되는가? 영성 있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다. 영성 있게 보이려는 모습은 영성이 아주 낮은 것이다. 성령 충만해야 되는 이유는 그래야 참된 회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성령 충만을 자주 언급하면서 행동하는 믿음이 없으면 영혼이 악과 이단의 서식처가 되기 쉽다. 자동차에 기름이 떨어지면 전진하지 못하듯이 인생도 성령의 기름이 없으면 전진하지 못한다. 성령 충만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늘 성령 충만을 통해 어둔 세상에 빛을 비추며 살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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