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지는 삶의 복

 

[ 갑빠오 작가 : I am free ]



본문말씀 : 마가복음 10장 28-31절


28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31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 십자가의 헌신을 앞세우라 >

 호별 전도를 하다 보면 한 영혼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그래도 관심과 사랑을 준다고 너무 개인 사생활에 깊이 침투하거나 수시로 전화하거나 찾아가서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느낌을 주면 안 된다. 집요한 스토킹 목회는 사랑을 빙자한 감시와 독점이고 자신과의 깊은 관계를 위해 하나님과의 관계까지 막는 것이다. 은밀히 간절하게 기도하면서 때로는 전화도 절제하고 방문도 절제하며 관심 표명도 적절히 하라.

 이단 교주는 스토킹 목회의 끝판 왕이다. 교주는 중간 리더에게 신자를 끊임없이 스토킹 하도록 사주한다. 외로움에 지쳐 있다가 이단에 빠진 신자는 그런 스토킹 목회가 자신에 대한 깊은 사랑과 관심인 줄 알고 처음에는 쑥 빠진다. 그렇게 교주는 영혼을 세뇌시키면서 자신의 종으로 만들고 자신의 왕국 확장 도구로 삼는다. 때로는 영향력 확장을 위해 정치에도 개입해 정치 지형을 바꾸고 언론에도 침투해 언론 흐름을 바꾸려고 한다.

 이단 단체를 유지시키는 핵심 요소는 스토킹이다. 이단은 끊임없는 스토킹으로 신자가 전체를 보지 못하게 만들고 그의 통전적인 시각을 막는다. 그런 이단의 실체를 언제 알게 되는가? 점점 이단의 속살을 보고 느끼면서 영혼과 정신이 깨어나고 사람의 뒤를 집요하게 좇고 살피는 스토킹 목회가 특별한 사랑과 특별한 관심의 표시가 아닌 일종의 사찰과 감시임을 깨달으면서 그 실체를 알게 된다.

 그렇게 이단의 실체를 알게 되면 단호하게 그 단체를 나오고 그곳의 거짓을 알리고 가정 파괴, 금전 탈취, 선거 개입, 성적 착취 등의 불법은 반드시 사법당국에 고발해 추가 피해자를 막아야 한다. 사랑과 관심을 명분으로 내세운 스토킹은 처음에는 소속감을 주고 외로움을 달래 주는 것 같아서 미혹되지만 한 번 그 미혹에 빠지면 나중에는 벗어나기 힘들게 되고 점차 노예처럼 속박된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된다.

 하나님은 거룩한 스토킹으로 끝까지 사람에 대해 사랑과 관심을 보이시지만 사람을 강제로 얽매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품을 벗어날 자유와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할 자유도 주셨다. 하나님은 사람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찾길 원하신다.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이 감시적인 것이 아니듯이 바른 목사는 성도에게 사랑과 관심을 주고 성도들 위해 은밀히 기도하면서도 집요하게 쫓아다니는 스토킹 목회를 삼간다.

 바른 목사는 성도가 특별한 사정이 생겨 교회를 떠나면 마음 아파하면서도 복을 빌어 주고 떠나보낸다. 만약 그때 교회를 떠나는 사람을 저주하면 그 전에 그를 향한 사랑과 관심이 일종의 스토킹이었음을 나타내는 증거가 된다. 목사는 성도에게 깊은 사랑과 관심을 주면서도 프라이버시를 존중하고 때로는 전화와 심방도 절제하고 성도가 주체적으로 묵상할 자유를 주어야 한다. 그처럼 지혜롭게 밀어내고 끌어당기는 밀당 목회가 스토킹 목회보다 성도를 더 복되게 만든다.

 성도는 자발적으로 헌신의 십자가를 질 줄 알아야 한다. 좋은 리더가 되려면 헌신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 또한 좋은 팔로워가 되고 나의 말이 영향력 있게 되려면 역시 헌신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 십자가의 헌신이 없이 말로만 인기와 영향력을 얻으려는 것은 정치에 가깝다. 믿음생활과 교회생활에서 정치보다 헌신을 앞세우라. 십자가의 헌신을 앞세워야 진짜 복된 존재가 되고 존경받는 인물이 된다.

< 십자가를 지는 삶의 복 >

 본문에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는 삶의 복을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십자가를 지면 어떤 복을 받는가?
 
1. 백배의 복

 본문 29절과 30절 전반부를 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이 구절에서 ‘현세’라는 말과 ‘백배’라는 말에 주목해 보라. 하나님은 십자가를 질 때 이 땅에서도 백배의 복을 약속한다.

 요새 많은 사람이 돈을 벌겠다고 각종 투자를 한다. 그중에서 가장 복된 투자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의 소유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기에 결국 그들의 이름이 이 땅에서 세세토록 빛나게 되었다. 그처럼 십자가를 지는 삶은 복을 위한 가장 확실한 투자인데 사람들은 그 확실한 투자를 잘 못한다. 십자가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예수님 당시에 십자가를 진 사람이 가문에 있으면 심한 수모와 손가락질을 받았고 살던 동네를 떠나야 했고 심지어는 성까지 바꿔야 했다.

 그런 수모를 알았기에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겠다고 할 때 십자가를 지지 말라고 간청했다. 그런 베드로를 향해 예수님은 “네가 정말 인정이 많구나.”라고 칭찬하지 않고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하셨다. 그만큼 십자가를 지고 헌신하는 삶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십자가를 회피하게 하는 말들을 잘 회피하고 십자가를 지면서 자신의 사명의 길로 힘써 가면 언젠가 백배의 복을 얻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2. 고난의 복

 예수님은 백배의 복을 받을 때 박해를 겸하여 받는다고 하셨다(30절). 예수님을 따르면서 받는 고난은 저주가 아닌 복의 통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위해 일할 때 어려움이 생기면 그 어려움을 십자가로 여기고 사명을 포기하지 말라. 교회 봉사를 할 때 실망스러운 상황도 겪지만 그 상황은 영적 성숙과 약속된 복을 위한 진통이다. 잘 믿는데 병과 고난이 찾아오면 그때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물으라. 그러면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고 더욱 겸손하고 성숙하고 능력 있는 성도의 길을 가게 하실 것이다.

 사람은 어려움이 없으면 성숙한 믿음을 가지기 힘들다. 비바람이 치는 언덕 위의 나무는 뿌리가 깊고 단단하다. 그처럼 고난이 있어야 믿음의 뿌리가 튼튼해진다. 사람은 만사형통을 바라지만 늘 맑은 날은 옥토조차 사막으로 만든다. 하나님은 그 사실을 잘 아시기에 고난의 비도 허락하신다. 즉 내게 주어진 고난은 나를 망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성숙시키고 더 복 주시려고 하나님이 있게 하신 것이다.

 고난의 위기는 기도 응답의 절호의 기회도 된다. 성도는 약할 때 강해진다. 더 나아가 약할 때 성숙해지고 기도의 능력도 더해진다. 어느 때 기도 응답이 잘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라. 약해지면 겸손해지고 기도도 진실해지고 간절해지면서 더 능력 있게 되었다. 필자도 요즘 예전보다 기도 응답이 더 잘 되는 것을 느낀다. 왜 그런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몸이 노쇠해진 것이 하나의 이유였다. 몸이 노쇠해지면서 하나님을 더 절실히 의지하게 되고 동시에 남의 아픔에 더 공감하면서 기도하기 때문이다.

 요새 필자는 종종 발목이 삔다. 그러면 걷기가 불편해진다. 그때 병든 사람과 어르신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체감하며 더 애틋한 마음으로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더 기도 응답을 주시는 것 같다. 결국 나의 약함과 고난이 나의 기도를 더 능력 있게 만든다. 그처럼 고난 중에 더 기도하면서 고난을 영적으로 더욱 성숙해지고 지혜롭게 되는 기회로 활용하면 내일의 복과 은혜도 더욱 넘치게 될 것이다.

3. 역전의 복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는 삶의 복을 약속하면서 한 가지 주의사항을 덧붙이셨다. 본문 31절을 보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이 말씀은 십자가를 지는 삶이 일회성으로 끝나지 말고 꾸준히 계속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꾸준히 십자가를 지면 언젠가 반드시 역전의 복을 얻는다. 칼바람을 맞고도 억세게 버텨내는 억새 인생이 되면 복도 억세게 달라붙을 것이다.

 꾸준히 십자가를 지고 헌신하면 처음 된 자가 나중에도 처음의 자리를 유지하지만 복을 받은 후 영적으로 느슨해지거나 교만해져서 십자가를 멀리하면 결국 영적으로 뒤처진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고 꾸준히 인내하는 것이 중요하다. 머리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끝까지 남는 것은 더 중요하다. 최후의 승리자가 진짜 승리자다. 초라한 모습일 때도 원망과 불평이 없이 끈질기게 자기 자리를 지키거나 끝까지 남아야 결국 선한 열매를 거둔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인내하는 자가 원하는 결과를 얻는다고 했다.

 예전에 한 사람이 말했다. “목사님, 제가 집에서 죽으니까 가족들이 살아나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가 십자가의 복을 체험한 사람이다. 어떤 목사는 성도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 하는 것을 최대한 자제했다. 마치 신적인 존재처럼 자신을 너무 높이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남들이 보는 곳에서 과한 소리를 내고 과한 액션을 보이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 대신 축복하고 싶은 사람을 위해 소리 없이 간절히 영혼의 기도를 드렸다. 그것도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교회에서 생각과 스타일이 맞지 않는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나 취향과 스타일이 맞지 않는 행사에 힘써 참여하는 것도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몸으로 함께해서 분위기를 살려주는 사람은 그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주변에 큰 힘이 된다. 내가 있어야 할 곳에 힘써 있음으로써 존재 자체만으로도 힘이 되는 십자가 성도가 되라. 지금 시대에 가장 필요한 영웅은 예수님처럼 말없이 십자가를 지는 성도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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