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믿음의 문제

[ 에드워드 힉스 : 노아의 방주 ]



본문말씀 : 사무엘상 28장 3-14절


... 8 사울이 다른 옷을 입어 변장하고 두 사람과 함께 갈새 그들이 밤에 그 여인에게 이르러서는 사울이 이르되 청하노니 나를 위하여 신접한 술법으로 내가 네게 말하는 사람을 불러 올리라 하니 9 여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사울이 행한 일 곧 그가 신접한 자와 박수를 이 땅에서 멸절시켰음을 아나니 네가 어찌하여 내 생명에 올무를 놓아 나를 죽게 하려느냐 하는지라 10 사울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이 일로는 벌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1 여인이 이르되 내가 누구를 네게로 불러 올리랴 하니 사울이 이르되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 하는지라 12 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큰 소리로 외치며 사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나를 속이셨나이까 당신이 사울이시니이다 13 왕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하니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영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하는지라 14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그의 모양이 어떠하냐 하니 그가 이르되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하더라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그의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



< 버림 받은 자의 모습 >

 살다 보면 힘든 상황이 생긴다. 그때 하나님 품을 떠나 세상으로 나가면 더 힘들어진다. 구체적으로 믿음을 잃고 하나님의 버림을 받으면 어떻게 되는가?

1.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당시에 사무엘은 죽어서 그의 고향 라마에 장사된 상태였고 사울은 집권 초기에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내었기에 이스라엘에는 신접한 자와 박수가 없었다(3절). 그때 블레셋 군대는 수넴에 진 쳤고 이스라엘 군대는 길보아에 진 쳤는데 사울이 블레셋 군대를 보고 크게 두려워하며 떨었다(5절). 블레셋과의 많은 전쟁에서 연승을 거뒀던 사울이 블레셋 군대를 보고 크게 두려워한 것은 믿음을 잃었기 때문이다.

 믿음을 잃으면 공연히 두려워진다. 그 두려움에 지배되면 자신이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수준 이하의 삶을 살면서 문제 극복 능력도 약화되고 성공 가능성도 줄어든다. 두려워하면 사탄과 사탄의 하수인이 우습게 안다. 그처럼 사기를 잃으면 처음부터 지고 들어간다. 실력도 중요하지만 용기도 중요하다.

 미국 야구 메이저리그에서 1971년 타자의 헬멧 착용을 의무화했을 때 타자들은 불편한 헬멧 때문에 실력이 저하될 줄 알았지만 오히려 실력이 향상되었다. 헬멧이 공을 머리에 맞고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야구에서 투수가 두려워하는 타자나 타자가 두려워하는 투수가 되면 그 존재감만으로도 상대를 압도할 수 있다. 그런 존재감 있는 인생이 되려면 실력과 믿음을 겸비하라.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더 나아가 십자가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복과 승리는 저절로 따라온다.

2. 이중적인 행동을 보인다

 사울이 두려워하며 여호와께 어떻게 할지에 대해 물었지만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어떤 대답도 주지 않으셨다(6절). 그러자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찾아 묻겠다고 했다(7절). 그때 신하들이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다고 해서 사울이 평복을 입고 변장한 채 두 사람과 함께 밤에 그녀를 찾아갔다. 왜 변장했는가? 집권 초기에 신접한 자와 박수를 추방했으면서 다급하다고 신접한 자를 찾는 이중적인 행동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이중적인 속성이 있다. 사람을 너무 믿지 말고 동업도 주의하라. 동업을 꼭 해야 하면 배신 상황에서도 실망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하고 동업하라. 때로는 좋은 일을 위해 동역할 때도 배신 상황을 겪는다. 그때의 충격과 상처는 더 크다. 사명을 따라 동역하는 사명형 동역자는 배신하지 않지만 생계를 위해 동역하는 생계형 동역자는 배신 가능성이 높다는 현실도 감안하고 지혜롭게 동역하라.

 어떤 사람은 선천적으로 순수했다. 그가 하나님을 믿고 더 순수해지면서 정치적인 태도를 멀리했다. 그는 정치를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의 자리 투쟁이나 존재감 투쟁인 줄 알았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의 순수함을 이용해 뒤통수를 많이 쳤다. 그러면서 그가 점차 인간관계에서 바른 정치도 꼭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인간관계나 작은 공동체에서도 적절한 정치는 필요하다. 사람은 온전히 믿을 수 없고 누구에게나 잠재된 이중적인 속성이 방심하면 금방 표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실한 사람에게도 이중적인 속성이 있고 내게도 있음을 인정하라. 사람을 너무 믿지 말라. 사람을 의존하는 것은 더욱 피하라. 부모도 의존하지 말라. 나중에 자녀를 의지하려고 하지도 말라. 내가 가장 의지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떠날 수도 있고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천국으로 갈 수도 있다. 그때를 대비해 독립적인 성품과 의지와 능력을 기르라.

3. 바른 판단력을 상실한다

 사울은 하나님이 왜 자신에게 대답하지 않는지에 대해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성을 작동시켜 사유하려고 하지 않고 불안해하면서 엔돌의 신접한 여인에게 전쟁에서의 승리 방법을 물으러 찾아갔다. 유대 사회에서는 영매와 무당을 찾는 것을 가장 큰 죄악으로 여겼는데 그런 행위가 얼마나 큰 죄악인지 느끼지 못할 정도로 그의 판단력은 이미 흐려진 상태였다.

 사울이 신접한 여인에게 사무엘을 불러올리라고 했다. 그때 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큰 소리로 외치며 사울에게 말했다. “당신이 왜 나를 속였습니까? 당신은 사울이십니다(12절).” 그녀가 실제로 사무엘의 영을 보았겠는가? 죽은 사람의 영이 다시 세상에 나타난다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아마 그때의 사무엘의 영은 사무엘의 영을 가장한 귀신이었을 것이다. 그 귀신이 그녀에게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이 사울인 줄 알려주었는가? 귀신이 알려주기보다 그녀 자신이 빠른 눈치로 사울 왕인 줄 알아맞혔을 가능성이 크다.

 대개 점쟁이와 영매는 눈치가 백단이다. 그 눈치로 용함과 영성을 과시한다. 아마 그녀는 앞에 선 사람이 두 사람을 대동한 것을 볼 때 신분이 높은 사람인 줄 알았고 급박한 전쟁 상황에서 사무엘을 불러올릴 사람이 사울밖에 없고 자기 앞에 선 사람이 엄청난 거구였기에 사울 왕이라고 눈치 챘을 것이다. 만약 사울 왕이라는 자신의 말이 틀려도 상대가 기분 나쁘게 여기지 않을 줄 알고 “당신이 사울입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거짓 종교인은 용함과 영성을 과시하려고 거짓말에 능하다. 또한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데 능숙하다. 요새는 자신의 이단성을 감추려고 정치적인 진영 논리를 내세우기도 한다. 범죄학에서는 본질을 흐리는 자가 범인이라고 추정한다. 진실은 명확하고 단순하다. 진영보다 진실이 중요하다. 같은 편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믿으면 진실과 정의는 설 자리를 잃는다. 진실을 위해 기도하면서 진실을 위한 탐구와 관찰을 포기하지 말라. 때로는 지금까지 믿었던 인간적인 말과 정보를 언제든지 버릴 각오와 개방성을 갖춰야 진실에 가까워진다.

4. 헛된 우상숭배에 빠진다

 사울이 자신의 정체를 알아본 그녀에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그녀가 말했다.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영혼은 세상과 지옥과 천국을 마음대로 옮겨 다닐 수 없다. 그러므로 사무엘의 영은 사무엘의 영을 가장한 귀신이다. 결국 신접 행위는 귀신에게 이용당하는 사악한 행위인데 사울은 신접한 여인의 말만 믿고 그 노인이 사무엘인 줄 알고 그의 얼굴을 땅에 대고 절했다(14절).

 죽은 사람의 가짜 영 앞에서 절하는 모습은 일종의 우상숭배다. 왜 기독교에서 제사를 금하는가? 제사를 드릴 때 죽은 부모의 영이 진짜로 제사상 앞에 있다면 존경의 의미로 절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제사상에는 죽은 부모의 영 대신에 부모의 영을 가장한 귀신이 나의 절을 받는 것이다. 결국 성도가 제사상에서 절하는 것은 부모에게 절하는 것이 아니라 귀신에게 절하는 것이 되기에 하나님은 제사 자체를 금하신 것이다.

 우상은 거짓된 신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무엇이든지 하나님보다 더 높이는 것은 우상이다. 또한 하나님의 뜻보다 나의 뜻을 더 앞세우는 것이나 하나님의 시각을 잃고 보이는 것만 추구하는 것도 우상숭배 행위다. 왜 환난과 문제가 생기는가? 근원적인 이유는 우상숭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큰 참사가 생길 때 가장 책임을 느끼고 회개해야 할 사람은 성도와 기독교 리더다. 사고 앞에서 하나님의 뜻과 시각을 회복하고 우상이나 환상에 빠진 삶에서 깨어나 진실에 눈뜨고 자기 사명에 충실하라.

 누군가의 불의를 덮어 주는 종교적 합리화의 이용 도구가 되지 말라. 세상 권력자들은 불의와 타협하는 종교인을 좋아하지만 불의를 합리화하는 우상숭배적인 믿음은 이미 죽은 믿음이다. 돈과 권력을 선한 영향력으로 승화시키지 않으면 믿음과 정신을 동시에 타락시킨다. 돈과 권력과 세상적인 이익의 우상에 매몰되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몰입되라. 특히 두려움을 심고 자신을 우상화시키는 이단 교주로부터 내 영혼을 믿음으로 지켜내라.

< 문제는 믿음의 문제다 >

 사람이 믿음을 잃어버리면 사울처럼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또한 내적인 분열 현상일 일어나 정신과 육체가 따로 놀면서 이중적인 삶이 나타나고 바른 판단력을 잃고 세상적인 우상숭배에 빠진다. 결국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믿음의 문제다.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다가 믿음을 잃는 일이 없게 하라. 심지어는 대단한 기적이나 신앙 행위도 눈에 보이는 것은 너무 믿지 말고 경계하라. 대단한 신앙 행위가 영성의 증거는 아니다.

 열왕기상 18장을 보면 갈멜산에서 엘리야와 대결한 바알 선지자들이 하늘의 불을 내려달라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기도했다. “바알이여, 응답하소서.” 그러나 아무런 응답이 없자 제단 주위에서 뛰놀며 방무를 추었다. 정오쯤 되어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자 그들은 더욱 큰 소리로 기도하고 심지어는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했다. 그 모습을 보면 방무와 방언과 자해를 앞세운 대단한 신앙 행위가 영성의 증거가 아님을 명백히 알려준다.

 어떻게 믿느냐가 중요하다. 바알을 믿는 우상숭배적인 믿음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하나님을 믿는 진실한 믿음만이 능력의 원천이다. 모든 문제는 믿음의 문제로 귀결된다. 믿음으로 더 물질을 가지려는 탐욕과 더 권력을 얻으려는 야욕을 이겨내라. 또한 내가 못살아서가 아니라 남이 잘 살기에 싫어하는 질투심과 자기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서 나타나는 분노와 혈기와 교만을 이겨내라. 늘 굳건하고 진실한 믿음으로 각종 문제를 해결하고 자기 정복을 이루어 더 나은 내일을 예비하는 복된 심령이 되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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