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와 관련된 복된 태도

[ 조르주 드 라 투르 : 양치기들의 경배 ]



본문말씀 : 고린도전서 12장 28-31절


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29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30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 은사와 관련된 복된 태도 >

 <은사장>으로 불리는 고린도전서 12장은 본문 31절에서 이렇게 끝난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이 구절에서 더욱 큰 은사는 바로 이어서 나오는 13장 1절 이후에 언급된 사랑이다. 구체적으로 은사와 관련해 성도가 가져야 할 복된 태도는 무엇인가?

1. 서로의 은사를 존중하라

 하나님은 교회에 은사를 따라 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을 행하는 자를 세우셨고 병 고치는 은사, 서로 돕는 은사, 다스리는 은사, 각종 방언을 말하는 은사 등을 주셨다(28절). 또한 다 사도나 선지자나 교사나 능력을 행하는 자나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나 방언을 말하는 자나 통역하는 자가 아니라고 했다(29-30절). 각 사람의 은사가 다 다르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은사를 자랑하거나 부러워하지 말고 남의 은사를 존중하고 나의 은사를 개발하면서 각자의 직분과 맡은 일에 힘쓰라.

 직분이 높아질수록 더 남을 섬기려고 하라. 참된 카리스마는 군림할 때보다 섬길 때 생긴다. 반대로 리더의 섬김을 강조하면서 리더를 경시하거나 질서를 경시하지는 말라. 교인 간에 서열은 없어야 하지만 교회의 질서는 존중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말에는 바른 질서를 존중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세상을 조화롭게 창조하신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다. 창세기의 창조 기록을 보면 ‘종류대로’라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는 위대한 질서가 내포되어 있다는 암시다. 시간의 흐름에도 위대한 질서의 개념이 깃들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믿음이 깊어지면 질서에 대한 존중심도 깊어진다. 공동체의 질서를 존중하며 겸손하게 행동하면 성령님의 임재와 역사도 더욱 생생해진다.

 교회 내에도 서열은 불필요하지만 질서는 필요하기에 바울은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라고 말하면서 제일 마지막에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라고 했다(28절). 방언을 제일 마지막에 언급한 것은 방언의 은사를 자랑하는 일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겸손한 태도를 은근히 권고하는 메시지다.

 방언 기도와 관련해 3가지 사실을 잊지 말라. 첫째, 방언은 구원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둘째, 방언 기도가 영적인 우월성의 증거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셋째, 방언 기도가 병을 치유하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방언 기도를 강조하는 한 목사는 이렇게 겸손하게 말했다. “방언의 은사를 최고로 여기는 사람은 성령의 다양성을 무시한 채 연장통에 망치 한 개만 넣고 다니는 목수와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나는 방언을 하니까 성경을 읽거나 말씀을 들을 필요가 없어. 나의 후원자이고 중보자이신 성령님이 나의 힘과 지혜가 되시고 나를 위해 모든 일을 해 주실 거야.” 그런 교훈은 성경에 없다. 방언은 사도행전에서 처음 나타난 은사로서 다른 은사 발현의 방아쇠 역할을 했지만 그 기도가 주는 개인적인 유익이 공동체의 유익을 저해하지 않도록 남용하지 말고 남의 은사를 존중해 주라.

2. 은사를 받을수록 절제하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대로 내게는 내게 가장 알맞은 은사를 주셨음을 신뢰하라. 사람은 다 다르다. 쌍둥이도 다르다. 쌍둥이인 야곱과 에서도 너무나 달라서 야곱은 집사람이고 에서는 들사람이었다. 거의 같은 시각에 태어나 거의 같은 환경에서 자라도 그런 차이가 생기는 사실을 깨닫고 사람을 똑같이 다루려고 하지 말고 똑같은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라. 자신의 고유한 은사를 찾아 개발하면서도 자기 은사를 최고로 여기지 말고 늘 절제하는 마음으로 은사를 활용하라.

 고린도전서 14장 32절을 보면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라는 말씀이 있다. 누군가의 은사가 다른 누군가에 의해 제재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은사 문제에서 절제하는 마음이 요구된다는 암시다. 은사를 많이 받았어도 교회의 권위에 순종하고 더 배우려고 하라. 하나님이 내게 어떤 특별한 은사를 주셨어도 다른 면에서 부족한 점이 여전히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라.

 초대 교회 교인들은 성령 충만을 통해 은사가 나타났어도 사도들 앞에서 겸손하게 무릎 꿇고 말씀 듣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그런 자세 속에 행복한 교회생활과 성숙한 믿음생활이 있다. 마음을 열어 말씀을 듣고 배우려는 자세가 성령 충만한 자세다. 신실한 성도는 성령의 은사를 내 소유라고 여기지 않고 내가 똑똑해서 받았다고 여기지 않기에 늘 배우려는 자세를 잃지 않는다. 그래서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교만하게 은사를 남용하지 않고 겸손하게 은사를 절제하며 활용하기에 점차 성숙한 모습이 나타난다.

 아무리 좋은 것도 과하면 그것이 주는 유익보다 손해가 더 많아진다. 지나침은 모자람만도 못하고 과도함은 부족함보다 못할 수 있다. 금식이 영성 자랑의 도구가 되면 결국 영혼을 죽이고 생명을 빼앗을 수 있다. 사도 바울이 자기 몸을 쳐서 굴복시켰다고 했다. 그것은 절제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몸의 욕구가 아닌 말씀의 요구를 따라 살라. 강제적인 절제는 영혼의 자유를 옭아매지만 자발적인 절제는 영혼을 자유롭게 만들고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넘치게 만들 것이다.

3. 사랑의 은사를 추구하라

 본문 31절을 보라.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은사에는 우열이 없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예외로서 더욱 큰 은사가 있는데 그것은 사랑의 은사다. 그래서 본문 31절에 이어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장으로 연결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의 결론 부분으로 향하면서 13장에서 사랑을 가르치고 15장에서 부활을 가르친 후 마지막 16장에서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구제 헌금을 준비시켰다(1-4절). 사랑과 부활의 역사는 삶에서 나눔을 통해 나타나야 한다는 암시다.

 중세 유럽에서는 한때 예수님이 성만찬 때 사용한 컵인 거룩한 성배를 찾는 열풍이 크게 불었다. 그즈음에 한 기사가 성배를 찾아 나설 때 성문 밖에서 나병환자가 물을 달라고 했다. 그는 그냥 뿌리치고 길을 떠났다. 수년간 그가 헛수고만 하고 지친 몸으로 성으로 돌아오는데 성문 앞에서 몇 년 전의 나병환자가 또 물을 달라고 했다. 그때 갑자기 불쌍한 마음이 들어 그에게 정중하게 물을 건네주자 갑자기 그가 예수님으로 변했고 그 물이 담긴 컵이 거룩한 성배로 변했다는 전설이 있다.

 성배를 찾는 가장 좋은 길이나 복 받는 가장 좋은 길은 불쌍한 영혼을 사랑으로 돌보는 길이다. 자신의 기도 제목에만 너무 집착하지 말라. 기도 제목이 있을 때 남에게 시선을 돌려 사랑의 손길을 펼치고 선교 사역의 필요에 귀를 기울이고 그 필요를 채우려고 하라. 그러면 잘못된 동기와 욕심에 이끌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 하나님은 드리고 나누고 베푸는 손길로 기도할 때 그 기도를 능력 있게 하실 것이다.

 가장 복된 길은 사랑하는 길이다. 그 길로 가면 남만 좋은 것 같고 나는 손해 보는 것 같지만 그 길은 내게도 가장 복된 길이다. 성령 충만의 위대한 증거는 사랑하는 삶이다. 하나님이 내게 어떤 은사를 주신 이유도 영혼을 사랑으로 섬겨 주고 교회를 든든하게 세우는 도구로 삼으라는 뜻이다. 교회생활에서 사랑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항상 넘치는 사랑과 선교 마인드를 가지고 믿음으로 살면 내 인생에 깃들어있는 악성 유전자가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점차 저주의 그림자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왜 선교 마인드를 가져야 하는가? 그것이 모든 영혼을 품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고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적인 명령이기 때문이다. 선교 마인드를 가지라는 것이 영적인 우월의식을 가지라는 말은 결코 아니고 타 종교를 무조건 비하하라는 말도 아니다. 복음을 전파한다면서 교단주의와 교파주의를 전파하면 안 된다. 복음 한류를 꿈꿀 때는 민족주의나 애국주의에 바탕을 둔 복음 한류가 되지 않도록 하라. 민족주의나 애국주의나 지역주의 성향을 타파하지 않으면 참된 선교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 참된 선교를 폭넓게 이루도록 나의 현실과 처소에서 힘써 일조하라. 은사 중심적인 믿음이나 판타지 믿음이나 엑스터시 믿음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라. 성령님은 환상의 영이지 환각의 영은 아니다. 성령님은 정신적 균형상태를 잃지 않게 하시고 나의 상식과 의지가 말살되거나 어떤 최면 상태로 들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성령님은 나의 은사가 증인의 사명을 이행하는 데 사용되기를 원하시고 무엇보다 사랑의 은사를 가장 추구하길 원하신다.

 성도를 성도답게 만드는 2대 핵심 요소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을 통해 증명된다. 이웃 사랑은 나를 위해 쓰고 남은 것을 나눠 주는 시혜가 아니다. 나눔을 실천할 때 시혜 의식을 버려야 하나님의 은혜가 영혼과 인생에 넘치게 된다. 참된 이웃 사랑은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과 하나님이 함께하라는 감동을 주실 때 나의 안전과 편안을 희생하고 그가 선 자리로 들어서는 것이다. 비를 막아 줄 수는 없어도 함께 비를 맞아 주는 사랑을 앞세워 성령 충만하게 살 때 내일의 복을 맞이할 수 있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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