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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단계에서부터 승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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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상 기도 시간을 가지라 >  오병이어의 기적은 4복음서에 다 기록된 유일한 기적이다. 이 기적은 ‘디베랴 바다 건너편’에서 일어났다(1절). 마태복음 14장 13절에는 그 장소가 ‘빈들’로 되어 있고 마가복음 6장 32절에는 그 장소가 ‘한적한 곳’으로 되어 있고 누가복음 9장 10절에는 그 장소가 ‘벳새다’라고 되어 있다. 결국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곳은 ‘인적이 드문 한적한 벳새다 광야’였다. 예수님이 그곳에 가신 것은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물러나 조용한 묵상 기도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였다.  왜 조용한 묵상 기도 시간이 필요한가? 첫째, 그 시간은 자신을 생산적으로 만든다. 하루 한 시간의 조용한 묵상 기도 시간은 전혀 손해나는 시간이 아니다. 그때 주어지는 영적인 에너지로 인해 나머지 시간들이 2배 이상의 효율을 보이고 창의성도 높아진다. 하루 10시간을 열심히 일하는 사람보다 하루 9시간을 열심히 일하고 1시간을 조용히 묵상 기도하는 사람에게 생기는 창의성이 삶을 더욱 놀랍게 진전시킨다.  둘째, 그 시간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만든다. 그 시간이 없으면 세상과 동화되면서 바른 판단력과 자제력을 잃기 쉽다. 조용한 묵상 기도 시간은 세상과 동화되는 기류를 차단하고 자신을 객관적으로 살피게 만든다. 자신을 객관화시킬 때 기준점은 하나님의 뜻이다. 묵상 기도를 통해 내 뜻을 하나님의 뜻에 맞춰 조율해서 하나님의 뜻이 몸과 마음과 삶에 배이면 베드로나 바울처럼 능력 있는 복음 전파자가 될 수 있다.  셋째, 그 시간은 자신을 신앙적으로 만든다. 가끔 보면 성경을 필사하는 사람이 있다. 말씀에 깊이 젖어들려는 모습이다. 훌륭한 행위지만 필사 자체에 몰입되어 말씀 자체에 몰입되어 기도하는 힘이 약해지면 안 된다. 예수님에게 기도시간은 휴식시간이었고 휴식시간은 기도시간이었다. 휴식은 편안한 정지 상태가 아니다. 성도에게 한적한 곳에서의 휴식은 하나님과 대화하는 창조적인 시간이다. 특히 하루의 첫 시간이...

두려움을 이기게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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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능력  사람들은 ‘능력’이라고 하면 화려한 어떤 능력을 생각한다. 목회자 자랑을 할 때도 “우리 목사님은 영력이 있어.”라고 하고 기도할 때도 “목사님의 영력을 칠 배나 더해주소서.”라고 기도한다. 물론 그런 영력과 같은 능력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런 능력보다 더 중요한 능력이 십자가의 능력이다.  성경은 일관적으로 진짜 위대한 능력을 십자가의 능력이라고 한다. 능력에 관한 잊지 말아야 할 유명한 구절은 고린도전서 1장 18절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최고의 능력인 십자가의 능력을 칠 배나 더해 달라고 기도하라. 참된 리더의 길은 십자가가 없으면 갈 수 없는 길이다. 십자가의 능력이 있어야 양떼를 온전히 품을 수 있다.  3종류의 리더가 있다. 부흥사 리더, 성자 리더, 순교자 리더다. 부흥사보다 성자가 되기를 힘쓰고 더 나아가 순교자가 되기를 힘쓰라.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은 부흥사의 능력이다. 문제를 초월하는 능력은 성자의 능력이다. 문제 중에도 감사하는 능력은 순교자의 능력이다. 최고 능력은 십자가를 지고도 감사하는 능력이다. 내가 죽음으로 전체를 부활시키는 십자가의 능력이 공동체를 일으키는 참된 능력이다. 십자가의 능력을 가지고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하면 자신 안에 있는 두려움은 급속히 사라진다. 2. 사랑  정신분석학자인 메닝거가 말했다. “사람이 두려워하는 이유는 너무 자신에 몰두하기 때문이다.” 왕따의식은 자기 몰두의 또 다른 표현일 수 있다. 너무 자신에게 몰두하면 두려워진다. 그 전에 내면이 어두워진다. 내면이 어두워지면 불안을 가져다주는 잘못된 영상에 사로잡힌다. 은혜 체험이 무엇인가? “빛이 있으라.”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음성이 마음에 들려 내면의 어둠이 물러가고 새로운 내적인 창조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할 때 불의 혀 같은 것이 사람들 위에 머물렀다. 입술이 성령에 붙들리고 마음이 성령의...

주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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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생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40절).” 믿음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주님을 영접해 영생을 얻고 영생의 능력으로 이 땅에서도 천국 삶을 사는 것이다. 영생보다 눈앞의 일시적인 축복에 더 관심이 많으면 그 축복이 없는 경우에는 믿음에 회의를 품게 된다. 그런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다. 너무 현실을 몰라도 안 되지만 너무 현실에 집착해도 안 된다.  영생을 추구할 때 삶을 평면적으로 보는 시각에서 삶을 입체적으로 보는 시각이 발달된다. 그때 과거의 슬픔이란 재료를 가지고 미래의 기쁨이란 작품을 만들어내는 영적인 예술가의 기질도 개발된다. 작품 인생을 만들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특출한 달란트가 없어서 아니라 영생의 추구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생의 소망은 박해자 사울을 전도자 바울로 변화시켰던 놀라운 변화의 원천이다. 2. 하나님 사랑이 없기 때문  주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속에 없기 때문이다(42절).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 위주로 생각하는 것이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신앙생활의 초점이 대개 자기에게 맞춰져 있다. 그 초점이 자기로부터 주님으로 바뀌어야 한다. 왜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주셨는가? 그보다 못한 존재가 오히려 그를 천시하는 자기중심적인 태도에 경종을 울리는 비유다.  사람을 원천적으로 부정한 존재로 여기는 것은 오히려 부정한 자기중심적인 태도다. 예수님은 자기를 선의 기준으로 삼는 태도를 고치기를 원하셨다. 상처를 주는 것은 다 주의해야 할 것이지만 뚜렷한 이유가 없는 상태에서 상처를 주면 사람의 심판은 없어도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신다. 자기중심적인 언행은 심령의 일그러짐을 나타낸다. 믿음생활에서도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자기중심적인 믿음생활이다. 3. 자기 영광을 구하기 때문  예수님이 말씀했다. “너희가 서로...

예수님에 대한 4대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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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례 요한의 증언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증언했다(33-35절). 당시 그의 증언은 파급력이 컸기에 예수님의 제자 중에는 처음에 그의 제자였던 사람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사람이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다. 어느 날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하자 그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좇았고 그날 밤에 예수님의 거처에서 하룻밤을 묵었다(요 1:39). 그들이 예수님과 즉시 함께 하룻밤을 지낼 정도였다면 평소에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자주 했을 것이다.  세례 요한은 당시 시대의 양심으로서 사람들로부터 메시야로 오해되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은 예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는 비난에도 흔들리지 않았고 더욱 힘든 일로서 칭찬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예수님은 메시야의 길을 예비한 그를 사람이 낳은 최고의 존재라고 하셨다. 당시에 최고 선지자로 여겨졌던 세례 요한의 예수님에 대한 증언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충격적인 큰 증언이었지만 성경은 그 증거가 가장 작은 증거라고 했다. 2. 예수님의 역사  세례 요한의 증언보다 큰 증언은  예수님이 하시는 놀라운 역사다(36절).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이 일어나는 것도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증언한다. 마가복음 16장 20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초대교회에 어떻게 기독교가 힘 있게 뻗어나갔는가? 예수님의 이름이 전해질 때 사람들이 새 삶을 얻고 귀신에게서 해방되는 표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제자들은 처음에 예수님의 이름이 엄청난 기적의 도구임을 알고 기적을 일으키려고 사용하지 않았다. 단지 고통하는 자에게 뭔가를 주고 싶은 마음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었는데 엄청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그들도 놀랐을 것이다. 지상 최고의 선물은 어떤 물질이 아니라 계산적인 마음이 아닌 진실한 마음으로 드리...

치우치지 말아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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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율법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이 왜 흥분했는가? 예수님이 안식일에 진흙을 만들어 그것을 맹인의 눈에 발라 고쳐서 안식일 법을 어겼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들은 율법은 알았지만 율법 정신은 몰랐다. 율법 정신은 율법주의를 넘어서야 한다. 율법은 보약이지만 율법주의는 독약이다. 안식일 계명은 하나님 중심적인 삶이 외면된 인간중심적인 일을 금하라는 말씀이지 일로 의심되는 모든 동작을 안식일 24시간 동안에는 금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는 예배 외에 “모든 일에서 동작 금지!”라고 안식일 율법을 해석해 강요하며 자신들의 영성을 과시했다. 예수님은 기계적인 율법주의에 치우친 그들의 비난을 예상하면서도 안식일에 맹인의 눈을 뜨게 하셨다. 율법주의에 치우치지 말라는 강력한 메시지다. 좋은 것도 지나치면 독약이 된다.  안식일은 일을 무조건 금하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날이다. 율법에는 하나님의 선한 뜻이 담겨 있다. 반면에 율법에 치우친 율법주의는 사람의 악한 뜻이 숨겨져 있다. 즉 사람 뜻을 따라 만든 사람의 법을 하나님의 법으로 미혹한 것이다. 안식일 율법을 내세워 어떤 일도 하면 안 된다면서 사소한 꼬투리를 잡아 정죄하는 것이 율법주의다. 영혼을 살리려고 주어진 율법을 정죄의 도구로 삼는 율법주의로 흐르면 결국 영혼을 죽인다.  한 아내가 믿음이 깊어지면서 남편과의 잠자리를 멀리했다. 하나님 안에서의 결혼생활과 부부생활은 신성한 것이다. 그런데 스스로 만든 양심의 법을 가지고 죄의식을 느껴 심적인 고통을 당하고 남에게도 상처를 주면 안 된다. 자기 영성을 나타내려고 율법을 어렵게 만들고 그것을 지켜야 참된 신자가 될 것으로 생각하거나 생각하게 하면 안 된다. 물론 율법주의 때문에 율법을 경시하면 안 된다. 율법 자체는 가치 있는 것이다. 율법을 깨뜨리고 부정하면 은혜의 탑도 쌓이지 않는다. 율법을 중시하되 율법에 치우치지는 말라. 2. 이론  바리새인들은 맹인이었던 사람 앞에서 ...

기도를 포기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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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를 통한 깊은 교제 >  본문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과 예수님이 깊은 교제관계 안에 있으면서 서로 배려하고 서로 위하시면서 서로를 앞서 드러내려는 느낌을 받는다. 물론 하나님과 예수님은 한 분이기에 당연히 그런 느낌이 들지만 이 장면을 통해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얼마나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깊은 인격적인 관계를 이루며 사셨는지를 깨닫게 된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분별력이 생기고 하나님의 능력도 나타난다(20-21절). 그런 분별력과 능력을 얻는 것도 축복이지만 사실상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 자체도 축복이다. 왜 기도가 소중한가? 기도하면 응답을 주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것 때문만이 아니다. 기도를 통해 인격적인 교제를 이루면 응답 이전에 외롭지 않고 그 사랑의 교제가 있기에 좌절하고 끊어야 할 것도 비교적 쉽게 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쁜 것을 끊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좋은 것을 붙잡는 것이다. 특히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는 나쁜 것을 끊는 최적의 방법이다. 사람의 복된 운명을 막는 것은 꼭 끊어야 할 한 가지를 끊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만 끊으면 찬란한 미래를 얻는데 그것을 못하는 것이 문제다. 왜 못하는가? 기도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를 묶고 찬란한 내일을 향해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대개 스스로 끊어내기 힘들다.  하나님 앞에 자기의 묶인 문제를 놓고 기도하라. “하나님! 저의 비판적이고 불같은 성격을 고쳐주소서. 하나님! 저의 입술의 문제를 압니다. 입술을 잘 다스리게 하소서. 하나님! 제가 자꾸만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봅니다. 그로 인해 제 마음이 오염되지 않게 하소서. 하나님! 먹는 문제도 잘 조절해 건강한 몸과 마음을 잃지 않게 하소서.” 신기하게도 기도할 때 ‘하나님’이란 호칭만 해도 뭔가를 끊을 수 있는 신비한 힘이 생기는 것 같다. 응답 여부를 떠나 하나님과의 깊은 인격적인 교제를 이루는 축복만으로도 기도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

안식일의 3대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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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거룩한 일을 하는 날  안식일은 노동을 그치고 쉬는 날만이 아니다. ‘노동을 그치는 것’과 ‘안식하는 것’은 개념 차이가 있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신 후 동방에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사람을 그곳에 두셨다. 에덴에서 아담은 즐기고 놀지만 않았다. 그때 하나님은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경작하며 지키게 하셨다(창 2:15). 그 구절에서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라는 말은 원어로는 “에덴동산을 관리하는 일을 하고 돌본다.”는 뜻이다. 에덴에서도 일은 있었다.  일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려고 하나님이 주신 행복의 재료이자 축복의 도구다. 안식이란 ‘일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일을 하는 것’이다. 거룩한 일을 해야 참된 안식이 주어진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다(17절). 하나님도 일하시기에 사람이 열심히 일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늘 이런 질문을 하라. “하나님! 하나님을 위해 어떤 일을 할까요?” 세상에서는 50세만 되면 은퇴를 종용하지만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죽을 때까지 은퇴가 없게 하라.  일하지 않는 자는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질책받고 결국 있는 것도 빼앗기지만 일하는 자는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칭찬받고 결국 더 많은 것을 얻는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에는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는 말씀이 있다. 쉽게 말하면 “일하기 싫어하면 밥줄을 끊으라.”는 말이다. 일할 때는 열심히 일하고 쉴 때는 화끈하게 쉬라. 특히 안식일에는 하나님의 일과 관련된 거룩한 일을 하라. 2. 하나님을 찬미하는 날  안식일에는 “세상의 일로부터 벗어나 쉰다.”라는 소극적 개념보다 “하나님 안에 들어가 쉰다.”라는 적극적 개념이 있다. 안식일에 낮잠 자는 식으로 그저 쉬기만 하는 것은 좋지 않다. 안식하라는 명령은 하나님을 잊게 만드는 일을 쉬라는 명령이지 모든 활동을 멈추라는 명령이 아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적극적인 개념이 기독교 안식일의 기본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