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 묵상 1-4편
본문말씀 : 요한복음 14장 18-20절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성령님묵상(1) 성령님이 오지 않았다면(요 14:18-20)
만약 예수님이 이 땅에 오지 않았다면 어떠했겠는가? 구원과 복음이 없었을 것이며 교회와 성경도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도 없었을 것이며 장례식 날은 가장 비참한 날이 되었을 것이다. 가끔 사랑했던 사람이 곁에 빨리 두고 싶어 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로 하나님 곁으로 갈 때가 있다. 그때 이별의 아쉬움은 있지만 천국에 간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설레고 사랑하는 마음이 더 생기고 기분이 왠지 좋고 입에서 찬송이 흘러나온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지 않았다면 이 놀라운 천국소망이 가능했겠는가? 만약 성령님이 이 땅에 오지 않았다면 어떠했겠는가? 예수님이 수고스럽게 성취하셨던 일들을 충분히 맛보지 못하고 우리는 고아와 같은 처지가 되었을 것이다. ‘위로자 성령님의 다시 오심’은 예수님을 이전보다 더 실제적인 위로자로 만든 복된 사건이었다.
성령님묵상(2) 성령의 현존하심(요 16:5-8)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다. 성령이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왜 ‘성령의 현존하심’이 ‘예수님의 현존하심’보다 더 유익인가? 예수님이 이 땅에 계속 계셨다면 예수님의 현존하심은 지엽적이고 개인적인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성령님은 어디에나 계실 수 있고, 단번에 수많은 사람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다. 즉 성령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은혜가 확장되고 보편성을 띄게 되었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만이 아닌 ‘우리의 하나님’이 된 것이 바로 성령께서 오신 사건의 의미다. 이 보편적 은혜 속에서 은혜를 발견하는 사람이 정말 은혜를 아는 사람이다. ‘보통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특별한 증거가 있어야 은혜 받았다고 한다. ‘은혜에 눈을 뜬 사람들’은 평범한 삶을 통해서 그 이면에 흐르고 있는 은혜의 물줄기를 발견하는 사람이다. 더 나아가 ‘은혜가 충만한 사람들’은 어려움 속에서 은혜를 발견하는 사람이다.
성령님묵상(3) 어머니같으신 성령님(사 66:12-14)
성령님을 묵상하면 ‘하나님의 모성애’를 느낀다. 성령님은 어머니처럼 우리를 낳고 우리를 부드럽게 키워 가신다. 성령님의 가르침과 인도하심의 특징은 사려 깊은 부드러움과 인내하심에 있다. 강요는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다. 성령님은 아직 받을만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진리를 강요하지 않는다.
성령님은 고통의 순간에 어머니처럼 내게 달려오신다. 시험과 슬픔을 겪어가며 사는 인생에게 성령님의 동정과 위로는 얼마나 큰 힘이 되는가? 때때로 성령님은 어머니처럼 채찍을 드신다. 성령님은 ‘방관적인 사랑’이 아닌 ‘책임적인 사랑’을 가지고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어머니같은 성령님의 위로와 사랑을 힘입으며 살아가고 있는가?
성령님묵상(4) 비둘기같이 임한 성령님(요 1:29-34)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성령님이 비둘기같이 임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비둘기같이 평화의 사자로 보내셨다. 성령님은 독수리같이 임한 것도 아니고 참새같이 임한 것도 아님을 기억하라.
독수리는 힘, 강요, 강탈을 상징한다. 어떤 사람은 성령 받았다고 하는데 독수리같이 임한 성령을 받은 것 같다.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르고 적극적으로 나아가지만 그 적극성에 수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고 있다. 참새는 수다, 불안, 가벼움을 상징한다. 어떤 사람은 성령받았다고 하는데 참새같이 임한 성령을 받은 것 같다. 교회에 가서는 “성령이여 오소서.”라고 열심히 파닥거렸는데, 집에 와서는 또 걱정과 불안에 매여 살고 참새처럼 입만 살았다. 비둘기같이 임한 성령을 받아 위로, 평화, 부드러움, 온유함이 삶에 넘쳐나도록 하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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