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사람과 속사람의 차이
본문말씀 : 고린도후서 4장 16-18절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 속사람의 믿음을 보이라 >
진심으로 믿는 것과 겉으로 믿는 척 하는 것은 다르다. 사람 눈에는 겉으로 믿는 척 하는 것이 더 진짜 같다.왜 이단과 사이비가 활개를 치는가? 겉으로는 더 믿음과 능력이 있게 보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겉으로 대단한 능력과 신비를 보여 주어도 속사람의 변화가 없다면 가짜다. 예수님을 영접해 구원받으면 마음과 인격도 달라지고 삶의 시각과 스타일도 달라진다. 그런 변화를 이루지 못하고 신비와 능력과 영성과 금욕을 과시하는 것은 거짓과 위선이다.
겉으로 영성을 꾸미고 과시하기보다 소리 없이 의를 행하라. 겉으로 영성을 과시하면서 말로는 “오직 예수야!”라고 하지만 가는 곳마다 잘 부딪치면서 평화를 이루지 못하는 거짓된 영성을 주의하라. 사람은 본능적으로 싸움이 벌어지면 더 즐기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싸움은 영혼을 죽이기 위한 사탄의 갈라치기 작전임을 깨닫고 싸움을 즐기는 본능을 잘 극복하라.
가끔 회의할 때 심한 의견 갈등 중에도 조는 사람이 있다. 그때는 역설적으로 그가 가장 영성이 높은 사람이다. 설교를 들을 때 조는 사람은 있어도 싸움이 있을 때 조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사람은 싸움이 생기면 눈이 번쩍 뜨인다. 어떤 교인은 평소에는 교회에 잘 안 나가다가 싸우는 일이나 투표하는 일이 생기면 더 나간다. 그처럼 싸움을 즐기는 겉사람을 잘 극복하고 믿음으로 사는 속사람을 추구하라.
어느 날 한 집사가 불경기인데 많은 선교 헌금을 했다. 사역자가 고마움을 표시한 후 왜 그렇게 선교 헌금을 많이 했느냐고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목사님, 어떤 문제가 생겨서 선교 헌금을 했어요.” 대부분의 사람은 문제가 해결된 후 감사하면서 헌금하지만 그는 문제가 생길 때 역설적으로 “이제껏 내가 감사하고 선교하는 일에 게을렀구나.”라고 깨닫고 헌금한 것이다. 그런 역설적인 속사람의 삶을 추구하라.
< 겉사람과 속사람의 차이 >
사도 바울은 겉사람이 낡아져도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면 낙심하지 않는다고 했다(16절). 그러므로 겉사람이 아닌 속사람으로 살라. 겉사람과 속사람은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는가?
1. 영적인 지식
성경 잠언을 강해할 때 설교자는 성도다운 삶의 원리에 관한 윤리적인 설교를 하게 된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저 설교에는 예수가 없어.”라고 말하면서 은근히 자신의 영성을 과시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말씀보다 구원받은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말씀이 훨씬 많다. 그래서 설교에는 기본적으로 윤리적인 요소가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런 사실을 외면하고 왜 “예수가 없어.”라는 말로 비하하는가? 자신의 영성을 과시하면서 영혼을 교회에서 멀어지도록 꾀어내기 위해서다.
극단적인 영성주의와 율법주의가 겉으로는 영성과 거룩성이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영성과 거룩성이 없는 것이다. 겉사람은 예수님을 지식적으로 알기에 점차 교만해지지만 속사람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기에 점차 아름다운 인격체가 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많은 것도 좋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많이 아는 것보다 바로 아는 것이다. 바른 말씀 지식을 가지면 많이 알수록 더 겸손해진다.
어느 날 한 초신자에게 오래 교회에 다닌 친구가 물었다. “자네 크리스천이 됐다지?” “그렇네.” “그러면 예수님에 관해 꽤 알겠군. 예수님이 어디서 태어났나?” “잘 모르겠네.” “예수님이 몇 살에 돌아가셨나?” “잘 모르겠네.” “예수님의 제자는 몇 명이었나?” “그것도 잘 모르겠네.” 친구가 웃으며 말했다. “자네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예수님에 대해 전혀 모르는군.”
그때 초신자 친구가 말했다. “자네 말처럼 난 아는 게 거의 없지만 이 정도는 아네. 3년 전에 난 주정뱅이 빚쟁이였고 가정은 깨졌네. 저녁마다 가족들은 나의 귀가를 무서워했네. 그러나 지금은 술도 끊었고 빚도 다 갚았고 가정은 화목하고 저녁마다 가족들은 나의 귀가를 기다리고 있네. 이 변화를 예수님이 주셨네. 나는 예수님을 이만큼은 아네.” 그 말을 듣고 지식을 자랑하던 친구가 오히려 수치를 느꼈을 것이다. 겉사람은 지식의 증대를 자랑하지만 속사람은 변화된 삶을 자랑한다. 변화와 실천이 없는 지식은 교만의 표식이다.
2. 먹는 음식
겉사람은 몸에 좋다면 무엇이든지 다 먹는다. 특히 한국 사람은 몸에 좋다면 뱀, 지렁이, 곰 발바닥, 원숭이 뇌, 불개미 등까지 먹는다. 또한 겉사람은 남의 땅을 먹어치우는 것에도 집착한다. 그래서 고대에는 침략 전쟁을 벌였고 요즘은 고상한 침략 전쟁인 땅 투기에 집착해서 땅값 상승과 환경 파괴로 지구촌 전체를 병들게 만든다. 반면에 속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기에 점점 내면이 풍성해진다.
영국 해안에는 종종 갈매기들이 떼로 죽는 현상이 생긴다. 여름 관광객 때문이다. 여름에 관광객이 먹이를 던져주면 갈매기들은 과자와 사탕 등을 맛있게 먹는다. 그런 음식들은 사실상 갈매기들에게 해롭다. 더 나아가 그런 음식을 계속 먹으면 좋은 자연 음식에 대한 식욕을 점차 잃는다. 그 후 철이 지나 여행객의 발길이 끊기면 좋은 자연 음식이 바다에 풍성해도 그것을 먹지 않아 굶어죽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화려한 은사나 능력이나 외형 같은 겉사람의 음식을 너무 좋아하면 속사람에게 좋은 신령한 미각을 잃고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의 은혜를 별것 아니게 여긴다. 결국 잘못된 맛에 길들여진 겨울 갈매기처럼 그 영혼은 점차 죽어간다. 하나님의 말씀을 힘써 가까이하라. 말씀은 재미없는 것 같아도 영혼에 양약이 된다. 그러다가 말씀에 맛을 들여 말씀이 꿀맛처럼 느껴지면 그때부터 축복의 문이 신기하게 열린다.
3. 상황을 보는 눈
문제가 생길 때 겉사람은 문제를 크게 보고 힘을 잃지만 속사람은 문제를 작게 보고 잘 이겨낸다. 상황을 보는 눈에서 겉사람과 속사람의 차이는 닭과 독수리의 차이만큼 크다. 폭풍이 불면 닭은 몸을 날개 속에 파묻지만 독수리는 날개를 펴고 폭풍에 몸을 실어 더 빨리 안전지대로 날아간다. 그처럼 고난 중에 겉사람은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히지만 속사람은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불안과 두려움을 이겨낸다.
한 성도가 큰 수술을 앞두고 자꾸 두려움이 생겼다. 그 두려움을 읽고 담임목사가 심방 예배 때 에스더 4장 말씀을 통해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을 도전했다. 그리고 마취될 때는 죽는 체험을 한다고 여기고 마취에서 깨어날 때는 부활 체험을 한다고 여기라고 했다. 그 말씀을 통해 그에게 담대함이 생기면서 편안하게 수술대에 올랐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속사람의 믿음을 가지면 용기와 평안이 생기면서 더 죽지 않는다.
수술이 잘 끝났다. 회복도 빨랐다. 그가 다시 꿈에 부풀어 사업을 구상하는데 종종 “다시 아프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이 생겼다. 담임목사가 그 두려움을 또 읽어내고 치유 후에도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으로 살고 나중에 사업에 성공해도 간증한다고 자랑하지 말고 겸손하게 소리 없이 헌신하라고 했다. 또한 숫자로 성공을 저울질하지 말고 욕심을 버리고 사명을 따라 사업하면서 늘 믿음으로 살라고 했다. 그러자 다시 신기하게 그에게서 두려움이 사라지고 마음에 깊은 평안이 임했다.
탈무드에는 큰 슬픔을 표시하는 세 등급의 사람이 나온다. 3등급의 사람은 슬플 때 울부짖는다. 일반적인 겉사람의 모습이다. 2등급의 사람은 슬플 때 잠잠히 고통을 받아들인다. 인격적인 겉사람의 모습이다. 1등급의 사람은 슬플 때 노래를 빚어낸다. 그런 모습이 바로 속사람의 모습이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희망이다. 그처럼 절망의 밤에 희망의 별을 찾아서 노래하는 복된 속사람이 되라.
< 속사람의 모습을 앞세우라 >
나무가 속이 튼튼해지고 새로워질 때는 겨울이다. 추운 겨울에 앙상한 나뭇가지만 보면 생명이 없어진 것 같지만 생명력이 뿌리에 감춰진 상태에서 내면은 더 튼튼해지고 강해진다. 그리고 봄이 되면 그 내면의 생명이 밖으로 드러나 잎과 열매를 맺는다. 인생과 교회의 겨울에는 신나는 느낌도 없고 풍성한 잎과 열매도 없고 소리도 없다. 그러나 그 고독과 침묵 속에서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면 영혼은 내적인 활력과 끈질긴 생명력으로 더욱 넘치게 된다. 결국 겨울의 고통은 춥고 힘들고 피하고 싶지만 꼭 있어야 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야생마를 최고의 준마로 길들일 때 먼저 말을 급류에 몰아넣고 지치게 한다. 그다음에 뭍에 오르면 다시 모래 경기장에 몰아넣고 쉬지 않고 뛰게 한다. 마침내 말이 지쳐 쓰러져서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갈 수 없게 된다. 그때부터 말은 자신을 포기하고 조련사의 손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면서 최고의 준마로 길러진다.
사람들은 조금만 여유가 있어도 자기 인생의 고삐를 하나님께 잘 넘기지 않는다. 그러면 하나님이 큰 문제나 시련을 통해 기필코 자아를 포기하게 만들고 결국 그가 “하나님이 없으면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고 할 때 그를 새롭게 일으키신다. 그때부터 사랑과 평화와 안식과 지혜가 넘치면서 축복의 문도 활짝 열린다. 그러므로 큰 문제가 생길 때 너무 낙심하지 말라. 그때가 내가 하나님을 깊이 만날 때이고 하나님이 나의 축복을 위해 놀랍게 일하실 때다. 늘 겉사람보다 속사람의 모습을 앞세워 더욱 큰 복을 예비하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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