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우연은 없다
본문말씀 : 열왕기상 22장 29-40절
29 이스라엘의 왕과 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니라 30 이스라엘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나는 변장하고 전쟁터로 들어가려 하노니 당신은 왕복을 입으소서 하고 이스라엘의 왕이 변장하고 전쟁터로 들어가니라 31 아람 왕이 그의 병거의 지휘관 삼십이 명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작은 자나 큰 자와 더불어 싸우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 왕과 싸우라 한지라 32 병거의 지휘관들이 여호사밧을 보고 그들이 이르되 이가 틀림없이 이스라엘의 왕이라 하고 돌이켜 그와 싸우려 한즉 여호사밧이 소리를 지르는지라 33 병거의 지휘관들이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아님을 보고 쫓기를 그치고 돌이켰더라 34 한 사람이 무심코 활을 당겨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를 맞힌지라 왕이 그 병거 모는 자에게 이르되 내가 부상하였으니 네 손을 돌려 내가 전쟁터에서 나가게 하라 하였으나 35 이 날에 전쟁이 맹렬하였으므로 왕이 병거 가운데에 붙들려 서서 아람 사람을 막다가 저녁에 이르러 죽었는데 상처의 피가 흘러 병거 바닥에 고였더라 36 해가 질 녘에 진중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어 이르되 각기 성읍으로 또는 각기 본향으로 가라 하더라 37 왕이 이미 죽으매 그의 시체를 메어 사마리아에 이르러 왕을 사마리아에 장사하니라 38 그 병거를 사마리아 못에서 씻으매 개들이 그의 피를 핥았으니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거기는 창기들이 목욕하는 곳이었더라 39 아합의 남은 행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건축한 상아궁과 그가 건축한 모든 성읍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40 아합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 삶에 우연은 없다 >
한 자녀가 외적으로는 특별한 부족함이 없는데도 자신감이 없었다. 부모는 자녀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려고 다방면으로 힘썼다. 축구도 시켜 보고 여러 이벤트에 참석할 기회나 여행 기회도 많이 만들어 주었다. 무엇보다 믿음을 심어 주려고 노력했고 때로는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지만 특별한 응답이 없었다.
어느 날 자녀 문제를 위해 그의 어머니가 새벽에 간절히 기도했다. 그런데 그날 갑자기 세를 살던 집주인이 전화해서 집을 팔게 되었으니까 이사해 달라고 했다. 그 전화를 받고 탄식이 나왔다. “하나님! 자녀에게 자신감을 달라고 기도했는데 저부터 자신감이 떨어지네요. 어떻게 된 일인가요?” 결국 이사를 가게 되었다.
이사할 때 몇몇 가구를 교체하면서 화장대 거울을 바꾸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새로운 집 주인도 화장실 거울을 바꿔 주었다. 두 거울이 모두 이전 집에 있던 거울보다 잘생기게 보였다. 그 거울을 보면서 자녀가 얼굴에 좀 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고 점차 성격도 활달해졌다. 이사가 자녀에게 보약이 된 셈이었다.
그 어머니가 자녀를 위해 기도할 때 갑작스러운 집주인의 이사 요구가 우연인가? 아닐 것이다. 성도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사람의 상상을 초월해 기도 응답을 주실 때가 많다. 신실한 성도에게 벌어진 어떤 일도 우연히 생긴 일이 아니다. 성도의 일에 우연은 없고 다 하나님의 계획 하에 이뤄진 일이다. 때로 고난과 상처를 당해도 그 일조차 다 하나님의 선한 섭리 하에 이뤄진 일이라는 믿음을 가지라.
< 아합이 죽게 된 이유 >
본문에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한 아합 왕이 우연으로 포장된 필연으로 비참하게 죽는 장면이 나온다. 그가 비참하게 죽게 된 구체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1. 비겁한 꾀를 쓴 것
아합은 거짓 선지자의 말에 속아 아람과 전쟁을 벌이려고 유다 왕 여호사밧과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갔다(29절). 그때 적의 표적이 되지 않도록 군사로 변장하고 군중 속에 숨으면서도 여호사밧은 왕복을 입게 해서 오히려 표적이 되게 하는 비겁한 꾀를 썼다(30절). 아합의 잔꾀는 적중한 것 같았다. 아람 병거의 지휘관들이 왕복을 입은 여호사밧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알고 공격했기 때문이다. 그때 여호사밧이 “나는 유다 왕이다.”라고 소리쳐서 위기를 모면했다(32-33절). 그처럼 아합의 꾀가 통한 것 같았는데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그때 한 아람 병사가 무심코 쏜 화살이 우연히 군사로 변장하고 숨은 아합 왕의 갑옷 솔기를 맞혔다(34절). 큰 부상을 입은 아합이 병거 모는 자에게 전쟁터에서 나가라고 명령했지만 치열한 전쟁으로 병거가 오도 가도 못한 채 결국 저녁이 되어 출혈 과다로 죽었다(35절). 비겁한 꾀를 쓴 것이 오히려 그를 죽인 셈이 되었다. 불이익이 예상되어도 잔꾀를 부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의를 우직하게 추구하라. 그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다. 더 나아가 자녀도 그런 삶을 보고 배우면 잔꾀를 부리지 않고 의를 추구하면서 복된 길로 가게 된다.
자녀가 재미를 찾아 자기 또래가 많은 교회로 가겠다고 고집하면 이렇게 말하라. “얘야, 네가 꼭 가겠다면 그렇게 해라. 그러나 아빠는 아빠가 은혜 받은 목사님 곁을 지킬게.” 그러면 자녀가 속으로 생각할 것이다. “아빠는 감사를 아는 분이고 의리와 신실함을 갖추려고 애쓰는 분이구나.” 그런 신실한 삶의 모범은 자녀에게 무언의 엄청난 교육이 된다. 인간적인 꾀로 재미나 복을 추구하면 더 복이 없고 길이 잠시 열려도 나중에 막힌다. 반면에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믿음과 의리를 지키며 섬기면 참된 복을 얻고 결말도 좋을 것이다.
2. 백성들을 폭압한 것
아합이 죽은 후 해질 녘에 누군가가 소리쳤다. “각기 성읍으로 또는 각기 본향으로 가라(36절).” 그 소리는 단순히 퇴각하란 소리가 아니고 군대를 해체하고 전쟁을 끝내라는 소리였다. 그때 소리친 무명의 지휘관은 아합이 죽자 아합의 탐심에 의한 무모한 전쟁을 끝내려고 그렇게 소리쳤을 것이다. 왕이 죽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시체를 사마리아에서 장사했고 아합이 탄 병거를 창기들이 목욕하는 사마리아 못에서 씻자 개들이 아합의 피를 핥았다(37-38절).
아합은 아내 이세벨에게 쥐어 잡혀서 혼합 종교를 받아들여 하나님을 배반했고 국제 외교 관계에서는 무리한 대결 상황을 조장해 경제를 망쳤고 그 와중에도 수많은 백성을 무리하게 동원해 상아궁과 여러 성읍을 건축해서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다(39절). 상아궁은 아합이 결혼 기념으로 이세벨을 위해 지어 준 사치스러운 별궁이었다. 그때 백성들의 원성이 커지자 그 원성을 딴 데로 돌리려고 아람과의 전쟁을 일으켰다가 비참하게 죽었다. 그처럼 우상숭배와 무속 신앙을 추종하면서 힘으로 폭압 정치를 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심판하신다.
폭압 정치에 항거하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나 때문에 나의 가족까지 마녀사냥을 당하면 용기 있는 사람도 항거가 두려워진다. 게다가 야비하고 비겁한 사람들은 폭압적인 사회 시스템에 편승해 마녀사냥을 신나게 즐긴다. 그래서 폭압 정치를 하는 권력자는 자기편 사람들의 거대한 유죄에는 눈을 감거나 대중이 눈을 감게 만들고 상대편 사람들의 사소한 유죄에는 눈을 부릅뜨고 티끌만한 허물도 찾아내어 공격한다.
마녀사냥이란 티끌만한 유죄 증거로 사람을 마녀로 몰아 죽이는 것이다. 사람은 마녀사냥이란 사회적인 압제의 피해자가 되기도 하지만 가해자로 편승할 때가 훨씬 많다. 그래서 나치나 파시스트나 스탈린이 등장하고 아합과 이세벨의 폭압 정치도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폭압 정치의 수명은 짧다. 사회적인 압제에 눌려 지내던 백성이 언젠가는 반드시 깨어나고 특히 하나님이 전쟁, 대공황, 인재, 자연 재해 등 우연을 가장한 필연적인 심판으로 사회적인 압제를 깨뜨리시기 때문이다. 때가 되면 하나님은 아합 부부를 심판하고 의가 승리하게 하실 것이다.
3. 여호와를 배신한 것
아합이 죽자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북 이스라엘의 8대 왕이 되었다(40절). 아하시야는 ‘여호와께서 붙잡으셨다’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 그 이름을 보면 아합이 여호와를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자신의 정치적인 목적 달성을 위해 여호와, 바알, 아세라를 다 섬기는 혼합 종교를 받아들여 종교를 수단화한 것이었다. 오늘날로 말하면 기독교, 불교, 천주교 등 주류 종교를 정치적인 목적 달성의 도구로 삼으면서 사이비 신앙과 무속 신앙을 앞세워서 나라를 통치했다는 뜻이다.
아합은 비참하게 죽었지만 그의 아들인 아하시야가 왕위를 계승해서 가문의 복이 지속된 것 같았다. 수많은 백성을 고통과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아합 왕가가 단죄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의다. 결국 아하시야는 재위 2년 만에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어 죽었다. 그것이 여호와를 배신하고 혼합 종교를 받아들인 가정의 비참한 결말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전부로 삼지 않고 다른 숭배 대상을 찾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신다.
많은 문제와 시련이 대개 두 마음을 품어서 생긴다. 결국 성도의 문제와 시련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에서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믿음으로 나아가라는 사인이다. 변하는 세상 것을 의지하거나 변하는 사람을 의지하면 문제와 시련과 실망과 상처가 예고된다.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만 바라보라. 하나님의 나의 대한 최종 목표는 내가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목표를 나의 최고 목표로 삼으라.
<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라 >
삶에 우연은 없다. 어떤 일이 우연히 일어난 일 같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신 일이다. 아합이 잔꾀를 써서 변장해도 무심코 쏜 아람 군사의 화살에 맞아 죽는 것을 보라. 그것이 겉으로는 우연한 사건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이루어진 필연이다. 특히 성도에게 우연은 없다. 나의 사건도 우연이 아니지만 나의 만남도 우연이 아니다. 성도의 만남은 다 하나님이 계획이 있어서 만나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천국 동반자와 비전 동역자로 알고 섬겨 주라.
나의 사건이나 만남도 우연이 아니지만 나의 약점도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작은 자가 없다. 하나님은 작은 자를 쓰기를 즐겨하신다. 나의 약한 부분에 대해서도 너무 속상해하지 말라. 하나님은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셔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신다(고전1:27). 나의 약점은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 약점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위대성을 드러내길 원하신다.
성경에는 약점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일을 멋지게 이룬 인물들로 넘친다. 아브라함은 노인이었고 모세는 말더듬이였다. 기드온은 소심했고 라합은 창녀였고 다윗은 간음했고 엘리야는 자살까지 생각했고 요나는 마지못해 일했다. 세례 요한은 괴팍한 행동의 소유자였고 베드로는 성격이 즉흥적이고 불같았고 삭개오는 사회적인 왕따였고 도마는 의심이 많았고 바울은 몸이 약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약점을 극복하고 멋지게 쓰임 받았다.
지금 내가 연약해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꿈과 비전을 잊지 말고 잃지 말라. 하나님의 멋진 일을 이루도록 내가 창조되고 지금의 현실과 자리에 있게 된 줄 알라. 삶에 우연은 없다. 내가 당하는 사건, 나의 만남, 나의 약점도 다 하나님의 선한 섭리 하에 주어졌다. 그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하나님의 전체적인 창조 목적과 나의 개인적인 창조 목적을 멋지게 이뤄내어 후일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기쁘게 서는 복된 심령이 되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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