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의 은혜를 입는 길
본문말씀 : 에스겔 16장 60-63절
60 그러나 내가 너의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 61 네가 네 형과 아우를 접대할 때에 네 행위를 기억하고 부끄러워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네게 딸로 주려니와 네 언약으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62 내가 네게 내 언약을 세워 내가 여호와인 줄 네가 알게 하리니 63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네가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회복의 은혜를 입는 길 >
본문 앞을 보면 예루살렘은 헷, 아모리, 사마리아, 소돔을 다 가증하게 여겼지만 하나님은 예루살렘이 더 가증하고 더 부패했다고 하셨다(44-52절). 그 말씀은 지역과 인종을 따지며 남을 정죄하면 하나님이 정죄하는 사람을 더 불의하게 여기신다는 말씀이다. 결국 하나님은 가증한 죄를 범한 이방인을 심판하고 이스라엘은 더 심판하지만 때가 되면 모두 회복의 은혜를 허락하신다고 하셨다(53-59절). 그런 회복의 은혜를 입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하나님과의 언약을 기억하라
하나님은 시내산 언약을 기억하고 십자가 언약을 세워주셨다(60절). 그리고 은혜의 때가 되면 예루살렘은 이방인들을 접대하는데 그때는 이방인들을 멸시했던 행위를 기억하고 부끄러워하면서 참회하는 심령으로 이방인들을 딸처럼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61절). 이 말씀은 과거의 언약을 기억해 확신을 더하고 과거의 수치를 기억해 참회하는 삶의 중요성을 도전한다.
필자는 종종 <월새기(월간새벽기도)>의 존재 의의에 대해 생각한다. 작은 <월새기> 책자는 그동안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고 변화시켰다. 또한 수많은 심령에 용서하는 마음, 따뜻한 정서, 성경적인 바른 믿음을 심어 주었으며 세계 선교를 도전하면서 소시민의 자리에서 세계민의 자리로 올라서는 비전을 품게 해 주었다. 언젠가 <월새기 영어판> 사역이 시작되면 그 비전은 더 많은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칠 것이고 그 사역과 함께 마침내 완성될 5만 페이지 분량의 <성경전권강해>도 그 역사적인 의미가 작지 않을 것이다.
이제까지 <월새기> 사역이 인간적인 계산으로는 지속되기 힘든 상황에서도 만 10년 가까이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세계민의 비전을 기뻐하셨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종종 집필을 비롯해 여러 가지 사역에 대한 대내외적인 부담감 때문에 매달 새로운 산을 넘어가는 심정으로 이제까지 114개의 산을 넘으면서 힘들고 지친 마음이 들 때도 있었지만 지금까지 쓰러지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했고 그 언약을 순간순간 일깨웠던 음지의 헌신자들로 인한 기억의 고리들이 필자를 붙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언약에 대한 기억은 내일을 이끄는 힘이다. 인생에서 좋은 기억을 간직하는 삶만큼 복된 삶은 없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 가장 소중한 일은 좋은 기억을 많이 남겨 주는 일이다. 예전에는 명절 때만 되면 돌아가신 부모의 혼령에게 좋은 음식을 대접한다면서 거하게 차례를 준비하고 차례를 지낸 후에는 자신들이 차례 음식을 거하게 먹었다. 어떤 사람은 돌아가신 분을 기리며 화려한 무덤을 만든다. 한국에는 사후 효자들이 유난히 많다. 중요한 것은 제사를 통한 교육이 아니라 기억을 통한 교육이다.
비싼 제사상을 차리며 부모 사후의 효자가 되려고 하지 말라. 어떤 가정은 일 년에 열 번이나 제사를 드리지만 부모 사후의 효자보다 부모 생전의 효자가 진짜 효자다. 명절에 가족이 모이면 제사로 부모 사후의 효자가 되기보다 간략한 추도예배로 부모의 사랑을 기억하고 서로 좋은 기억을 많이 주고받는 것이 훨씬 복된 태도다. 특히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에 대한 좋은 기억을 많이 떠올리고 나누면 인생의 무너진 부분에서 회복의 역사는 더욱 급속히 나타날 것이다.
2. 하나님이 여호와인 줄 알라
본문 62절을 보라. “내가 네게 내 언약을 세워 내가 여호와인 줄 네가 알게 하리니.” 왜 하나님이 언약을 세우시는가? 하나님이 여호와인 줄 알게 하기 위해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 더 많이 알라. 하나님을 무턱대고 믿지 말고 더 바르게 알고 믿으면 확신이 더해지면서 회복의 은혜도 더해진다. 왜 사도 바울이 인물의 삶을 살 수 있었는가? 그리스도를 아는 바른 지식이 넘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분이다. 왜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부르는가? 여호와라는 이름의 뜻이 무엇인가? 모세가 하나님께 이름을 물을 때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을 가진 여호와라고 부르게 하셨다(출 3:14). ‘스스로 있는 자’라는 여호와란 이름은 인간의 언어로는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존재라는 뜻이 깃들어 있다.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늘 나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알라.
2천 년 전에 예수님으로 성육신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나의 몸을 빌어서 세상 현실에서 성육신하길 원하신다. 세상에 살면서 세상에 속하지는 말라. 힘(might)보다 정의(right)를 추구하고 미움보다 사랑을 앞세우며 나의 현실 속에서 내가 하나님의 사람임을 드러내라. 그렇게 살려면 하나님을 더욱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으면 세상을 속죄하고 무너진 것을 회복시키는 이 시대의 제사장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3.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라
본문 63절을 보라.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네가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과거에 행한 모든 일을 하나님이 용서하시면 그 은혜에 젖어 남의 사소한 잘못도 용서하지 못했던 자신에 대해 부끄러워하면서 더 이상 판단하고 정죄하는 입을 열지 못하고 침묵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무너진 부분이 회복되길 원하면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고 그 용서를 힘입어 남을 용서하면서 판단하고 정죄하는 입술을 최대한 절제하라. 사랑하는 사람의 허물을 덮어 주고 불의 앞에서 단호하게 의를 세울 때도 용서하는 마음을 밑바탕에 깔고 의를 세우라. 용서하는 삶은 가장 복된 삶이다. 용서는 영혼과 정신을 치유하고 인간관계와 축복 전선의 얽힌 매듭을 푸는 위대한 축복 도구다.
하나님은 특히 부모 용서를 무엇보다 기뻐하신다. 부모에 대한 모든 섭섭한 감정을 털고 부모를 용서하며 부모님께 자신의 마음을 변함없이 드리면 하나님은 그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으로 받으신다. 부모에게 작은 일로 원망하고 불평하고 섭섭해 하면 복된 존재가 될 수 없다. 부모는 죽는 순간까지 자녀를 생각하고 비유적인 의미에서 죽어서도 자녀를 생각한다. 그러나 자녀는 죽을 때까지 그 마음을 잘 헤아리지 못하기에 부모에게 자녀는 늘 철없는 존재다. 지금부터 좀 더 철든 모습을 보이라.
부모가 나를 사랑하지 않은 것 같았어도 부모를 용서하면서 최선의 효도 방법을 연구하고 실천하라. 불효자가 잘 되는 법은 없고 효자가 못 되는 법도 없다. 부모에게 효도하면 자녀의 효도를 두 배로 받고 부모에게 불효하면 자녀의 불효를 두 배로 받는다. 일단 부모를 용서하는 것부터 잘해야 효도도 잘할 수 있다. 왜 인생에서 정죄와 판단과 편견이 많아지는가? 용서하는 능력의 부족 때문이다.
< 시각의 변화를 이루어 내라 >
사람은 일반화의 오류에 빠져 남을 깎아 내리고 나를 높이려는 본능이 있다. “남자는 어떻다. 여자는 어떻다, 흑인은 어떻다. 백인은 어떻다. 어떤 나라 사람들은 어떻다, 어떤 가문과 지역과 학교 출신은 어떻다. 어떤 성씨는 어떻다.”라는 식의 얘기가 일반화의 오류에 빠진 얘기다. 그 경우에는 어떻다고 말하는 사람이 인격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더 문제다.
천만 명 인구를 가진 국가를 지칭하며 “그 나라는 배타적이야.”라고 말하면 자신이 더 배타적인 것이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천만 명을 일반화시켜 멸시한 것이기에 그 죄의 강도가 매우 크다. 그런 일반화의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라. 어떤 사실을 정확히 알기도 전에 단언하는 편견은 내 인격을 저하시키는 것이다. 철학적이고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배타하는 사람은 더 배타적이고 배타당하는 사람은 덜 배타적이다.
근거 없는 편견으로 배타 당하는 사람은 자신을 조금만 이해해 주면 쉽게 마음 문을 열고 정을 준다. 소외된 사람이 자신을 이해해 주는 정치인에게 몰표를 주는 것은 정을 준 표식이지 배타성의 표식이 아니다. 소외 받는 자의 서러운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에게 깊은 정을 주는 것이 배타성이 아니라 힘 있는 사람이 그 힘을 가지고 힘없는 사람을 소외시키는 것이 배타성이다. 훌륭한 인물은 내 기준에 맞춰 남을 분류하지 않는다.
남을 한 차원 수준 낮게 여기고 배타하는 편견 본능을 힘써 극복하라. 심리학적으로 편견은 자신의 존엄성에 대한 확신 부재의 산물이다. 나의 존엄성을 확신할 때 남의 존엄성을 인정해 준다. 결국 근거 없는 편견을 가진 사람의 제일 큰 문제는 자신의 존엄성에 대한 확신 부재와 신뢰 상실이다. 즉 자기 존엄성에 대한 신뢰를 잃으면 일반화 오류를 앞세워 남의 존엄성에 해를 입히는 데 혈안이 된다. 그러나 자신의 가는 길을 잘 다듬을 줄 알아야 남이 가는 길도 잘 다듬을 수 있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 눈이 있다. 남을 보는 눈과 나를 보는 눈이다. 나를 보는 눈은 대개 관대하고 용서가 풍성한 눈이지만 남을 보는 눈은 대개 잔인하고 용서가 부족한 눈이다. 그래서 파스칼이 말했다. “이상한 일이 있다. 사람은 남의 죄악과 잘못에는 대단히 분개하면서 자신의 잘못은 인식하거나 찾지 않으려 한다.”
인물이 되거나 후대를 인물로 만들려면 남을 보는 눈과 나를 보는 눈을 바꾸라. 쉽지 않지만 시각의 변화를 이뤄내면 급격한 회복의 역사가 시작된다. 늘 기도하면서 자기 발견에 힘쓰라. 자기를 발견해야 진리도 발견한다. 무엇보다 사랑을 앞세우고 남을 미워하지 말라. 심지어 어떤 정치인을 반대할 때도 그를 미워하지는 말라. 그처럼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용서를 앞세워 회복의 은혜를 입는 복된 심령이 되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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