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옥순 수녀님 성화: 길, 진리, 생명이신 예수님 ]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5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내가 이것을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 6 그의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의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함과 정직함으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7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거늘 8 너희는 옳은 길에서 떠나 많은 사람을 율법에 거스르게 하는도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깨뜨렸느니라 9 너희가 내 길을 지키지 아니하고 율법을 행할 때에 사람에게 치우치게 하였으므로 나도 너희로 하여금 모든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라 (말라기 2장 4-9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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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라 >
하나님이 제사장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라는 명령을 주신 것은 레위와 세운 하나님의 언약이 지켜지게 하기 위해서였다(4절). 하나님과의 언약은 축복의 핵심 기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약속된 존재임을 확신하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 사람이 나를 칭찬해도 큰 힘이 생긴다. 특히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들으면 내면에서 사명의 불꽃이 점화되는 것 같고 내 안에 있는 의기소침하고 우울한 기분에 의한 어두운 진이 깨지는 것 같다. 자신 있게 사는 사람도 가끔 과거를 돌아보며 회한에 젖고 수치감에 쌓일 때가 있다. 그러면 “왜 그때 그렇게 했을까? 좀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라고 자책하면서 낙심된다. 부정적인 생각에 매이게 하려는 부정적인 중력은 늘 있다. 그때 “당신은 비교적 잘했어요.”라고 하는 누군가의 믿음의 말이 어두운 진을 파괴하고 자유로운 영혼을 만들면서 큰 위로가 된다. 그 말은 사람의 입을 통해 섞여 나온 하나님의 소리다. 내가 믿음의 말을 하면 누군가에게 그런 역사가 나타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가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를 가끔 말해 주라.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부족함과 모자람을 잘 느끼면서 이미 자기 생에서 찢어지고 무너진 상태로 있다. 그들에게 좋은 말로 치유와 회복의 은혜를 전하라. 특히 그들이 전진하도록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해 주라. “당신은 하나님이 선택하고 사랑하시는 언약 성도로서 충분히 재능이 있고 창조성이 있고 축복 받았습니다.” 축복의 말을 해 주면 강하고 견고한 어둠의 진과 부정적인 마음이 깨뜨려지면서 복된 자리로 나아가는 추진력을 얻는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상기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언약 백성으로 사는 것이다. 인간관계에서도 약속하는 것보다 약속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약속을 할 때는 쉽게 하지 말고 한번 약속했으면 힘써 지키라. 무엇이든지 지키는 것을 잘할 때 인생도 지킬 수 있고 영혼도 지킬 수 있다. 지키는 것을 잘하는 사람이 최종적으로 승리한다. 하나님 앞에서 한 좋은 약속과 다짐도 힘써 지키라.
<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라 >
제사장의 핵심 사역은 제사 사역뿐만 아니라 말씀 사역이고 진리와 율법을 지켜야 했지만 말라기 당시 제사장들은 지키지 못했다. 또한 백성들이 진리의 율법을 지키게 하기보다 오히려 범하게 했다(8절). 결국 하나님께서 모든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셨다(9절). 율법을 멸시해서 하나님을 멸시하면 오히려 멸시를 받는다는 뜻이다. 리더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말씀을 전하고 더 나아가 모범이 되어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말씀은 복의 길로 안내하는 표지판이다. 부산으로 가려면 부산 방향으로 핸들을 꺾고 목포로 가려면 목포 방향으로 핸들을 꺾어야 한다. 말씀을 따라 바르게 살면서 선한 영향력을 끼쳐서 남을 기쁘고 바르게 따르게 하라. 말씀을 모르는 상태에서 기도만 많이 하면 광신병에 걸리고 말씀은 많이 아는 것 같지만 기도하지 않으면 냉각병에 걸린다. 말씀과 기도를 겸비해야 좋은 리더가 될 수 있다.
왜 종종 고난과 기도 제목이 생기는가? 말씀 안으로 돌아와 성숙해지라는 환경 메시지다. 무신론자는 성도가 불신자보다 더 고난 받는 모습이 하나님이 없는 증거라고 한다. 고난을 성숙의 기회로 삼고 나중에 더 큰 축복으로 보상하려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인식이 없기 때문이다. 고난을 통해 충분히 배우지 못하면 같은 고난이 주어지지만 충분히 배우면 같은 고난이 면제되고 복된 역사를 새로 써 나갈 수 있다.
시편 117편 71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성도의 고난은 손해가 아닌 유익이다. 특히 고난을 통해 말씀과 가까워지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시야가 생긴다. 인생의 성패는 속도가 좌우하지 않고 방향이 좌우한다. 어느 방향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인생은 큰 차이가 난다. 말씀을 알지 못하는 것은 무지이고 더 나아가 야만이다. 성도가 가장 쓸쓸함을 느낄 때는 외롭게 혼자 있을 때가 아니라 말씀의 자리를 떠날 때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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