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함께하실 때
본문말씀 : 마태복음 18장 15-20절
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 거룩한 삼각관계를 이루라 >
물질의 최소 입자인 원자는 양성자와 중성자가 한 몸처럼 붙은 핵과 그 주위를 끊임없이 도는 전자로 이뤄졌다, 결국 원자는 양성자와 중성자와 전자의 삼각 상호작용을 통해 사람의 상상을 초월한 엄청난 힘이 나타난다. 사람도 두 사람이 합심하고 그 관계에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위대한 삼각 상호관계를 통해 놀라운 능력이 나타난다. 삼각관계가 다 나쁜 것은 결코 아니다. 부부 사이에 사랑하는 아이가 생기면 신비한 삼각관계로 부부관계가 더 견고해진다. 더 나아가 부부 사이에 사랑하는 하나님이 계시면 거룩한 삼각관계로 부부관계가 더욱 더 견고해진다.
거룩한 삼각관계를 이루고 활용하라. 그 삼각관계에서 상상을 초월한 힘이 나온다. 부부관계에서도 둘만 좋은 것으로 만족하지 말라. 사람의 앞날은 알 수도 없고 자신할 수도 없다. 둘만의 좋은 관계가 예상치 못한 사고나 실수로 어이없이 깨질 수 있기에 서로만 바라보는 좋은 상호관계로 안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함께 바라보는 거룩한 삼각관계를 이루려고 두 사람이 합심할 때 그 관계 속에 하나님이 함께하시면서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고 놀라운 역사가 이뤄진다.
< 하나님이 함께하실 때 >
본문 20절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는 말씀이 있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 성도들과 함께하신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언제 성도들과 함께하시는가?
1. 사랑으로 권고할 때
본문 15절을 보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이 구절에서 ‘형제’는 믿음의 형제를 뜻하고 ‘죄’는 실제적인 범죄보다는 인간관계에서 사람을 무시하거나 따돌리는 것 같은 도덕적인 죄를 뜻한다. 형제가 형제를 무시하거나 따돌리는 것은 일종의 죄다. 형제가 그런 죄를 범하면 그에게 가서 개인적으로 권고하라고 했다.
그 개인적인 일대일의 권고를 듣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고 하셨다(16절). 좀 더 강하게 권고하라는 뜻이다. 그 두세 증인의 권고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권고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고 하셨다(17절). 교회는 진리의 터전이고 사랑의 전당이고 교제의 도장이다. 그런 교회의 권고마저 거부하면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멀리하라는 뜻이다.
교회에서 누군가를 멀리할 때는 “어떻게 교회가 사람을 멀리하느냐?”는 의문이 없도록 사랑과 용서를 바탕으로 전략적으로 멀리하되 미워하면서 따돌리는 식으로 멀리하지는 말라. 즉 교회에서 이단 교인과 같은 교회 파괴 세력이나 교회 접수 세력은 단호히 멀리하되 보통 사람을 멀리할 때는 선한 목적을 가지고 회개와 성찰 기회를 제공하려는 목적으로만 멀리하라. 그런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이 함께하신다.
2. 믿음으로 행동할 때
본문 18절을 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 말씀은 내가 땅에서 믿음으로 행동하면 하늘도 그 믿음의 행동에 반응한다는 말씀이다. 즉 축복의 문을 여는 열쇠가 내 손에 있다는 비유적인 말씀이다.
믿음의 행동이 중요하다. 사랑도 행동하는 믿음으로 나타나야 한다. 행복은 저절로 오지 않고 행동을 통해 온다. 사랑을 낭만적인 감정으로만 여기지 말라. 낭만적인 사랑의 우상화가 결혼 생활과 공동체 생활을 어렵게 만든다. 결국 믿음으로 행동하라는 말은 희생적인 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이다. 낭만적인 사랑은 관계를 일시적으로 좋게 만들지만 희생적인 사랑은 관계를 지속적으로 견고하게 만든다.
공동체에서 누군가가 희생적인 사랑의 모범을 먼저 보이면 그로 인해 공동체가 점차 살아난다. 부부관계에서도 내가 희생적인 사랑을 보이면 배우자도 점차 닮아간다. 그것이 가정과 교회에서 남을 쉽게 비판하지 말아야 할 이유다. 비판하기 전에 사랑으로 행동하라. 내가 변하면 상대도 변한다. 내가 먼저 섬겨 주면 상대도 점차 섬겨 준다. 그만큼 나의 믿음의 행동이 중요하다. 특히 공동체가 함께 믿음으로 행동하면 서로에게 선한 도전이 되면서 복된 역사가 더욱 크게 나타난다.
2012년 제주도에서 열린 기독교선교연맹(C&MA) 한인 총회 때 어렵게 목회하는 미국의 한인 목사를 다수 초청했다. 그때 상당한 예산이 들었다. 총회 날짜가 가까워져도 재정이 많이 부족했다. 그때 한 목사가 집 보증금 일부를 빼서 헌금했다. 그 사실을 극소수 총회 임원만 알았다. 그때 그 목사가 가장 감사했던 일은 그의 아내가 전혀 반대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 후 하나님은 그의 집을 이전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회복시켜 주셨다. 부부나 공동체가 함께 믿음으로 행동하면 하나님의 역사는 더욱 놀랍게 나타난다.
예수님은 영생을 얻는 원리로서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두 가지 삶을 행하라고 하셨다(눅 10:25-28).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영생 진리의 알파와 오메가다. 그 사랑들이 어떻게 표현되는가? 내 호주머니를 비울 때 표현된다. 수입의 10분의 1을 하나님께 드리고 수입의 30분의 1을 이웃과 나눌 때 나도 행복해지고 물질로부터 자유를 얻는 마음의 복도 주어지고 결국 물질의 복 가능성도 커진다.
3. 합심해서 기도할 때
본문 19절을 보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이 땅에서 믿음으로 행동해도 하늘이 그 믿음에 반응하는데 특히 두 사람이 합심해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더욱 반응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한 대로 이뤄 주신다는 말씀이다.
두 사람의 합심은 때로는 여러 사람의 합심보다 더 힘들 수 있다. 큰 공동체는 그 공동체의 목표와 이상과 비전이 개인의 특성을 압도하면서 하나 됨의 중심이 되지만 두 사람이 합심하려고 하면 개인의 특성 차이로 인해 서로 부딪칠 가능성도 커지기 때문이다. 그처럼 합심이 어려운 상태에서도 합심을 이뤄내고 그렇게 합심한 상태로 기도하면 기도 응답의 역사는 더욱 놀랍게 나타난다.
탈무드에는 이런 말이 있다. “행복에서 불행으로는 한 순간이지만 불행에서 행복으로는 영원한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 지금 관계가 좋고 행복하다고 해서 방심하지 말고 서로에 대한 존경심과 관심을 가지는 일에 잠시도 태만하지 말라. 일과 세상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하지만 상대에 대한 관심은 더욱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우주와 전 세계를 소홀히 할지언정 서로에게는 소홀하지 말라.
가정과 교회에서는 너무 따지지 말고 설명도 너무 요구하지 말라.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논리와 설명을 요구하지 않고 그저 사랑하고 존중하고 섬긴다. 따지고 싶을 때는 기도로 하나님께 따지지 말고 아뢰라. 그처럼 사랑과 관심과 섬김과 합심 기도로 행복을 만들어 가고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은혜와 복을 얻어 누리라.
4. 하나님을 앞세울 때
본문 20절을 보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두세 사람이 마음만 맞아도 큰 힘이 된다. 그런데 두세 사람이 예수님 이름으로 모여서 함께 하나님을 높이고 예배하면 더욱 큰 힘이 된다. 예배는 모든 문제를 내면에서도 풀어 주고 외적으로도 풀어 주는 기적의 씨앗이다. 그처럼 가정과 교회에서 서로를 높여 주면서 무엇보다 하나님을 최고로 높이며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앞세우라. 그러면 하나님이 그 마음을 반드시 기억해 주실 것이다.
어느 날 한 소녀가 어버이날에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는 세상에서 두 번째로 좋으신 분이에요. 첫 번째는 누군지 아세요?” 아빠가 말했다. “하나님이지.” “아니에요.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니까 제외해요.” “엄마지.” “아니에요. 가르쳐 드릴까요? 미래의 내 낭군님이에요.” 그때 딸을 보면서 아빠가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사랑하는 딸에게 첫 번째로 좋아할 좋은 청년을 보내 주소서.”
가정과 교회에서 서로를 사랑하고 높이고 섬기며 살라. 또한 서로의 뜻과 꿈을 앞세워 주라.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말고 무엇보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라. 삶과 관계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라. 그런 거룩한 삼각관계를 통해 복 받는 일에서도 일등 성도가 되라. 왜 거룩한 삼각관계에 정통해져야 하는가? 인간관계가 늘 좋을 수는 없는데 그처럼 인간관계가 안 좋을 때는 거룩한 삼각관계가 더욱 절실하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에 갈등이 생길 때 사람만으로는 온전한 화해가 힘들어지고 늦어질 수 있지만 하나님이 그 관계의 중심에 계시는 거룩한 삼각관계가 이뤄지면 화해는 쉬워진다. 사람이기에 갈등 가능성이 늘 있음을 인식하고 종종 생겨나는 갈등을 하나님을 앞세우는 삶으로 잘 극복해서 삶의 위기를 삶의 기회로 만들고 나와 내 가정과 교회에 주어진 사명을 향해 힘차게 나아감으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복의 주인공이 되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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