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 번역 일기
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 (#죄와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가의형제들) 을 10여 년에 걸쳐 홀로 완역한 기록을 담은 "작품"입니다.
번역가 자신의 피. 땀. 눈물로 도 선생의 문장을 바로 세웠고, 자신의 심장으로 피가 돌게 했으며, "도 선생의 정신을 자신의 정신 속으로 옮겨와 다시 태어나게 한", 그리하여 독자의 심장도 뛰고 피도 돌게 만든 도 선생 4대 장편의 행전(Acts)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자체로 작가의 뛰어난 문학성을 나타낼 뿐만아니라 도 선생님과 문학, 번역에 대한 복음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작가에 대한 존경을 넘어 경외감까지 마음이 닿을 정도입니다.
- 욕심 난 문장들
다시 또 비유적으로 말해 보자면, 그분이 오신 것이다. 그분이 오지 않고서는, 이렇게 글이 나올 수 없다. 그분은 도 선생님일 수도 있고, 영감의 뮤즈일 수도 있다. 나는 굳이 구분하지 않는다. 이번엔 인연이 아니라 인과였다.
누군가의 언어는 나의 언어로 등치되지 않는다.
원문의 숨결은 해치지 않으면서, 언어의 깊이는 끝까지 따라가는 번역
맛보기는 눈물나게 맛있어야 한다.
조금 과한 전도사
변역이란 결국 한 사람의 영혼이 다른 영혼에게 건네는 불씨 같은 것
두 개의 세계 (산문적 세계와 시적 세계), 그러나 하나의 중심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조용하며 깊다. 거창한 말보다는 진솔한 문장을 믿는 분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결핍이 아니라 방향이었는지도 모른다.
새벽은 어둠이 빛으로 넘어가는 교차의 시간이다. 나는 교차점에서 방황하지 않고 삶의 날을 날카롭게 벼리곤 했다.
가난은 미화할 수 없다. 빚은 낭만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예술은, 지긋지긋한 현실의 틈에서 태어난다.
그 시절에는 기묘한 면허가 있었다. '공부 잘하는 애'라는 면허.
자기 파멸을 인식하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인간
도스토옙스키는 왜 이런 파렴치한 인간에게조차 믿음의 끈을 놓지 않는가. 그가 믿을만한 존재여서가 아니라, 그 비천한 영혼마저 긍정하지 않으면 신성이 붕괴될지도 모른다는 절박함 때문이었을까.
마르멜라도프. 마멀레이드 같은 사람, 젤리 같은 사람, 의지가 흐물흐물한 사람, 미스터 의지박약.
의지박약함 때문에 가장 괴로워한 사람은 바로 마르멜라도프 자기 자신이었다. 그 고통은 변명이 아니라 형벌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그 고통은 '구원의 문턱'으로 본다.
한 사람이 최악일수도 있고, 동시에 아주 작은 최선일수도 있다는 것. 그 작은 최선이 때로는, 그 사람을 단죄하는 우리를 멈춰 세운다는 것.
도스토옙스키의 연민은, 연민 자체가 아니라 그 연민을 가능하게 한 겸허에 대한 요청이었다. 그것은 타인을 단죄하려는 아집을 내려놓고, 비극적 실존 앞에 함께 서자는 권유이기도 하다.
인간을 조금 더 오래 바라보도록
많은 희극이 그렇듯, 희극의 주인공에게 그것은 웃음이 아니다. 그것은 추락이다. 그것은 무너짐이다. 희극의 잔인함은 바로 거기에 있다.
어딘가로부터 '떨어진' 사람
그녀가 마르멜라도프의 손을 잡은 것은 사랑이 아니라 생존이었다.
죽음의 침상에서, 그녀는 신을 거부한다.
가난한 남성은 술에 취해 무너질 수 있다. 그러나 가난한 여성은 무너질 수 없다. 무너지면 아이들이 굶는다. 무너지면 거리로 내몰린다.
번역은 단어를 바꾸는 일이 아니라, 누군가의 절규를 온전히 받아 적는 일
도스토옙스키는 ~ 초인이 되려는 인간이, 결국 인간이라는 사실에 부딛혀 붕괴되는 과정을 집요하게 따라간다.
도스토옙스키는 묻는다. "그 초인은 견딜 수 있는가?"
소설가는 이야기로 사람을 흔든다. 철학자는 선언으로 사람을 흔든다.
위대한 사상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어딘가의 문장 위에서 자란다.
라스콜리니코프라는 이름은 '라스콜' - 분열, 균열이라는 러시아어에서 왔다.
묵묵히 오늘 하루를 버틴 당신이라는 존재가 가장 단단한 희망.
p96~p99
니체가 말한 초인은 아직 오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가 보여 준 인간은 이미 우리 곁에 있다. 채찍이 아니라 연민으로, 판결이 아니라 이해로, 우리는 서로를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오늘 하루를 묵묵히 살아 낸 당신. 누구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 감자를 삶듯, 조용히 자신의 몫을 해낸 당신. 감자는 19세기 유럽 노동 계급에게 품위를 지키며 살기 위한 식사가 아니라, 오로지 내일 또다시 짐을 지기 위한 생명 연장 도구였다.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에도 그런 현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들의 서늘한 식사 장면은 따뜻한 공동체의 상징이 아니라, 소진을 간신히 연장하는 과정처럼 보인다. 그 생존의 상징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묵묵히 오늘 하루를 버틴 당신이라는 존재가 가장 단단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미 충분히 대단하다. 당신은 이미 충분히 강하다. 스스로에게 말해도 좋다. "오늘도 잘 살았다." "장하다." 그 말을 건넬 수 있는 우리가, 이미 초인이다.
소냐라는 평면의 깊이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타인을 다치게 한다. 눈빛으로, 말로, 무심한 침묵으로.
도스토옙스키는 소냐를 인간이 아니라, 聖像성상처럼 그린다.
여기서 나는 오래 멈춘다.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현재의 태도는 바꿀 수 있다.
오늘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과거의 의미는 달라진다.
죄는 선을 넘는 일이다. 프리스투플레니예, 그리고 우리가 넘는 선
<죄와 벌>은 범죄 이후의 처벌을 다루는 소설이 아니라, 사유의 오만이 어떻게 인간을 무너뜨리는지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우리는 매일 선을 넘는다. 법을 어기지는 않더라도 사람을 도구로 생각하고, 자신을 예외로 넘기고, "나는 다르다."고 속삭인다. 그 작은 넘김이 쌓여, 어느 순간 되돌릴 수 없는 균열이 된다.
라스콜리니코프 ~ 그는 이미 살인을 정당화할 수 있는 사고 속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
죄는 선을 넘는 행위이고, 벌은 그 선을 넘기 시작한 순간부터 따라오는 그림자다.
형벌은 법이 내리는 판결이지만, 분열은 양심이 내리는 판결이다.
<백치> 너무 맑아서 부서진 사람
시대는 이미 기사도를 버렸는데, 혼자만 갑옷을 입은 인물. 미시킨은 19세기 러시아라는 살벌한 현실에 떨어진, 갑옷 없는 돈키호테다. 도스토옙스키는 "완벽하게 아름다운 사람"을 그리고 싶었다.
나스타샤 ~ 그 이면에는 자기혐오와 결합된 자존심이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자기 파괴적이다.
"완벽하게 아름다운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
절대 선의 형상화
오만은 무너지고, 순수도 무너진다. 그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을 택해야 하는가. 완벽하게 아름다울 필요는 없다. 완벽하게 선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냉소적일 필요도 없다.
오트라드노예, 러시아어로 '즐거운 위안을 주는 작은 마을'
힐러리 클린턴, "위안부(Comfort Women)" vs. "강제적 성 노예 (Enforced Sex Slaves)"
위안이라는 말은 가해자의 언어다. 피해자의 고통은 인정하지 않는, 무시하는, 모멸하는 말이다. 도츠키에게 오트라드노예는 위안이었지만, 나스타샤에게 그것은 감옥이었고,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였다.
"나는 더럽혀 졌다." 그리고 "나는 아무 잘못이 없다."
상처는 이렇게 작동한다. 상처가 깊을수록 자의식은 예민해지고, 자의식이 예민할수록 오만은 단단해진다. 그리고 그 오만은 자기 용서를 막는다.
상처는 본질이 아니다. 그건 단순히 삶의 과정에서 '일어났던 일'일 뿐이다. 자신을 용서하는 일은 오만이 아니라 생존이다.
오늘 스스로를 한 번 덜 미워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작은 부활이다.
파리는 작다. 그러나 그 상징은 거대하다. 그 한마리의 파리는 토츠키다. 19세기 러시아의 토츠키, 20세기의 토츠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21세기의 토츠키들이다. 여성을 소비하고, 미를 투자로 계산하며, 상처를 개인의 수치로 돌려 버리고, 폭력을 '위안'이라는 단어로 포장하는 사람들. 그들은 스스로를 괴물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들은 교양있고, 세련되었고, 사회적으로 성공했으며, 대개는 합법의 경계 안에 있다. 그들은 법을 어기지 않았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들이 파괴한 것은 법이 아니라 한 인간의 세계였다.
당신이 누리고자 했던 한순간의 '위안'이, 당신이 탐닉했던 잠깐의 쾌락이, 당신의 계산된 욕망이, 한 인간의 영혼을 찢어 놓을 수 있다는 사실을, 파괴자인 당신은 끝내 알지 못한다. 아니,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을 뿐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세계에서 그것은 비용이었지, 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스타샤 ~ 그녀의 죽음은 타인의 손을 빌린 자살이다. 세상에 대한 마지막 복수이자, 자신을 향한 최종 판결이다. 그러나 그 판결을 내리게 만든 것은 칼이 아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된 시선, 침묵, 조롱, 계산 그리고 '위안'이라는 이름의 폭력이다.
자기 안의 공포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걷는다.
연민이 죄를 끌어안고 있다.
"당신의 권리는 도대체 누구의 희생 위에 서 있는가?"
"당신의 권리라는 것은 혹시 은폐된 폭력은 아닌가?"
파리는 늘 돌아오고, 어디에나 있다.
당신의 계산이, 당신의 욕망이, 당신의 "괜찮겠지."가 어떤 영혼의 마지막 균열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경고다.
'백치' ~ 그것은 곧 구원으로 인도하는 메시아의 은유다.
"그리스도가 진리 바깥에 있다 할지라도, 나는 진리보다 그리스도와 함께 남겠다."
미는 감상적 장식이 아니라, 인간을 다시 인간이게 만드는 힘이다.
'나에게 남은 시간은 채 5분도 되지 않는다.' 그 5분 중 2분은 동지들과 작별 인사를 해야하고, 남은 2분은 인생을 되돌아봐야 하고, 마지막 1분은 주위를 둘러봐야 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삶이 다시 시작된 것은, 바로 그 "이미 끝난 줄 알았던 5분" 덕분이었다.
작별의 2분, 자신에게 남은 2분, 마지막 1분
도스토옙스키에게 아름다움은, 그 답의 형태다. 아름다움은 '소유'가 아니라 '발견'이다. '획득'이 아니라 '각성'이다. 그래서 미시킨 공작은 '찾는 눈'을 요구한다. 발자국마다 숨어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하라고. 그 발견이 우리를 살리고, 우리를 다시 사람으로 만든다고.
삶이 예술이고, 삶이 축복이며, 삶이 미다. 그 미는 거창한 무대에만 있지 않다. 오늘의 숨, 오늘의 빛, 오늘의 한 걸음 속에 있다.
"미가 세상을 구원한다."는 말은, 결국 이렇게 번역된다. "살아있는 모든 것을 - 다시, 살아 있게 하라."
연민, 인류의 유일한 존재 법칙 - 가장 인간적인, 동시에 가장 신을 닮은 감정
연민. 러시아어로 소스트다니예 - 함께 고통 받는 것, 누군가의 고통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아픔 안으로 걸어 들어 가는 것. 타인의 상처를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의 일부가 되어 함께 아파 하는 것.
사랑은 언제나 이성을 비켜간다.
에로스라는 어린 아이는 눈을 가린 채 화살을 쏜다.
연민은 상처를 끌어 안는 사랑이고, 연정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사랑이다. 그는 두 사랑을 동시에 품으려 한다.
결혼이라는 이름의 기만
오늘날 우리는 개인주의와 효율의 언어 속에서 산다.
도스토옙스키는 여기서 잔혹하게 묻는다. "세상이 구원받지 못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구원의 조건을 거부한 것은 아닌가?"
활자보다 가슴이 먼저 그 시대에 젖어야 문장이 따라온다.
<죄와 벌>에서 인간은 오만으로 무너진다. ~ <백치>에서 순수는 세상을 구원하지 못하고 파괴된다. ~ 그 자리에 무엇이 남는가. <악령>이다.
온갖 마귀가 들끓는 적그리스도의 세상. 신의 자리에 인간의 이성이나 권력을 앉히려는 시도, 그리고 순수가 떠난 자리를 차지하려는 인간의 오만한 이성과 파괴적 이데올로기.
<악령>은 단순히 정치 소설이 아니라 영적 붕괴의 기록
<백치>에서 예수를 닮은 인간이 실패한 이후, 세계는 중립상태로 남아있지 않는다. 공백은 언제나 채워진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그림자가 들어선다. 그리고 그림자는 이 소설에서 하나의 집단적 광기로 형상화 된다.
이들(샤토프와 키릴로프)은 자율적 사상가라기보다는 스타브로긴의 파편이다.
이 세계에는 균형이 없다. 선과 악의 대결도 아니다. 이미 악이 공기를 점유한 상태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소설을 통해 묻는다. "신이 없는 세상은 어떤 모습인가."
지옥은 죽은 뒤에 오는 곳이 아니라, 신이 부정된 순간 이미 시작된다.
이념은 인간을 태운다.
적그리스도의 색
빛이 사라진 자리에서, 당신은 여전히 인간으로 남을 수 있는가.
이 책은 검붉어야 한다. 그것은 구원을 잃어버린 세계의 색이기 때문이다.
신이 사라진 자리에서 남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방향을 잃은 인간의 불안과 해체다.
<악령>은 단순히 사상 소설이 아니라, 사상이 타락하는 과정을 그린 실험장이기 때문이다. 이념은 인간의 언어를 바꾼다. 혐오와 조롱과 분노는 말의 톤을 낮추고 거칠게 만든다.
욕은 단순한 저속함이 아니라, 영혼이 붕괴되는 소리다.
이데올로그들의 각축장
사상은 더 이상 관념이 아니라 현실의 언어가 되어 전통적 사회 질서를 급속히 해체했다.
<악령>은 영적 길잡이 없이 읽으면 정말로 사람을 어디론가 몰아갈 수 있는 작품
삶은 소통이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산다.
삶은 논리로만 구성되지 않는다. 인간은 철학적 명제 하나로 움직이는 기계가 아니다.
인생은 쉽지 않다. 그러나 쉽지 않기에, 우리는 아직 살아 있다.
그는(도선생) 러시아 민족을 "신을 잉태한 민족"이라 불렀다. 이것은 민족 우월주의가 아니라, 영적 책임의 선언이었다. ~ 그 십자가의 소명을 슬라브 민족이 져야 한다고 믿었다.
도스토옙스키가 말한 "러시아의 사명"은 정복이 아니라 고통의 감당이었다.
번역이란 무엇인가. 단어를 옮기는 일이 아니다. 타인의 정신을 내 정신 속으로 옮겨와 다시 태어나게 하는 일이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끝났기 때문에 <카라마조프카의 형제들>은 위대해졌다. 알료샤는 미래의 주인공으로 남겨짐으로써, 우리에게 영원히 가능성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머리에 든 게 많지 않으면 책이라도 많아야 한다는 게 내 지론이기도 하다.
신앙 역시 고통을 면제해 주지 않는다. 예수조차 골고다의 길에서 여러 번 쓰러졌다.
간질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 그것은 삶을 갈라 놓는 균열이다. 우리는 균열의 틈새에서 목격한다. 신의 은총도, 신의 침묵도 모두 인간의 삶 위에 얹혀 있다는 사실을.
예술은 때로 상실을 지우지는 못해도 상실을 견딜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준다. 그것은 상처를 없애지는 못해도, 상처가 머물 공간을 만들어 준다.
호칭의 차이는 독자의 감정 이입 방향을 은밀하게 조율한다.
카라마조프는 인간을 변호하지 않는다. 다만 보여 준다. 어둠 속에서만 별이 보인다.
번역가는 자기 심장을 잠시 빌려 준다.
도스토옙스키는 열두 편의 기록을 통해 인류의 죄악을 고해한 뒤, 그 끝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갈 '열두 사도'를 세상에 세운 것이다. 결국 이 소설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써 맺게 될 미래, 즉 거대한 사랑과 기적에 관한 예언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결국, 해치우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한 장씩 넘기다 보면, 어느 날 마지막 페이지가 온다.
위대한 인간이라고 해서 감정까지 위대한 것은 아니다.
초인은 법을 넘어서는 자가 아니라, 고통은 견디는 자다.
착하고 선하지만, 강하지는 않은 사람들. 마음은 간절하나 동력이 부족한 사람들. 그는 그들을 단죄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을 이해하려 했다. 이해하려다보니, 연민에 이르렀다.
대심문관은 말한다. "인간은 자유를 감당할 수 없다."
대심문관의 논리에 따르면, 인간에게 자유는 축복이 아니라 저주이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자유는 나약한 인간에게 무거운 짐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침묵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인간에게 준 자유를 끝까지 수호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침묵 끝에, 입을 맞춘다. 그 입맞춤은 반박이 아니다. 설득도 아니다. ~ 약한 자들을 위해 고통받는 자에 대한 연민, 자신의 방식으로 십자가를 지고 온 노인을 향한 연민이다. 대심문관은 신을 배반했지만, 인류를 사랑했다. 그 사랑 때문에 고통 받는다. 예수는 그 고통을 본다. 그리고 말 대신 입맞춤으로 응답한다.
약한 자들을 위해 고통받는 자에 대한 연민, 그것이 예수의 마지막 언어다.
연민이 없다면, 우리는 신을 믿든 믿지 않든, 이미 인간을 잃어버린 것이다.
처음에는 '프로젝트'였다. 그 다음에는 '습관'이 되었고, 나중에는 '생활'이 되었다.
조금 덜 판단하고, 조금 더 연민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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