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붙잡고 일어서라

[ 김옥순 수녀님 성화: 길, 진리, 생명이신 예수님 ]

 

본문말씀 : 학개 1장 1-2절

1 다리오 왕 제이년 여섯째 달 곧 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로 말미암아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 은혜를 잘 간직하라 >

 사람은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을 찾다가 문제가 해결되면 하나님을 잊는다. 또한 시간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 안에서의 감격과 다짐도 잊어버린다. 부끄러운 일이다. 만사형통을 너무 좋아하지 말라. 만사가 형통하면 하나님을 잃을 수도 있다. 소유와 성공과 명예를 하나님과 바꾸지 말고 하나님 안에서 길이 열리기를 원하라. 늘 기도하라. “하나님! 물질과 건강은 잃어도 하나님만은 잃지 않게 하소서.”

 하나님만 잃지 않으면 언젠가 길은 열린다. 나이가 들어 기억력이 떨어져도 하나님의 은혜는 잊지 말라. 지금 그 은혜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라. 하나님이 없으면 사람은 허망한 존재다. 사람의 마음은 유리보다 더 깨지기 쉽고 때로는 난지도의 쓰레기보다 더 더럽다. 결국 믿음의 본질은 허망하고 더러운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고 행복하게 사느냐는 문제다. 조금 더 잘 먹고 잘사는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다. 믿음은 욕심을 채우는 수단이 아니다. 참된 믿음은 더 많이 얻기보다 더 많이 드리는 것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힘들 때마다 인간이 흙으로 빚어진 존재임을 기억하라. 그러면 인간의 허망함을 실감하면서 역설적으로 현재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깨닫고 감사가 나온다.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떠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잊는 기억상실증에 걸리지 말라. 예레미야애가 3장 22-23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날마다 새로운 감격과 다짐이 넘치는 성도가 복된 성도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으면 조만간 세상의 포로가 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었기에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다. 바벨론 강변에서 노예로 지낼 때 그들은 영혼의 고향인 시온(예루살렘) 성을 기억하며 많은 눈물을 뿌렸다(시 137:1). 하나님은 그들의 눈물을 보고 바벨론을 정복한 바사(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셨고 고레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루살렘에 귀환해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도록 허락했다(스 1:1).

 그때 약 5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면서 다짐했을 것이다. “하나님! 이제 저희에게 새로운 삶이 펼쳐지겠군요. 앞으로는 더욱 신실하게 하나님만 섬기며 살겠습니다.” 그 다짐처럼 그들은 그토록 사모하던 성전 재건을 계획하고 귀환한지 2년 2개월 만에 성전 기초석을 놓았다(스 3:8). 그때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큰 기쁨으로 찬양했고 노인들은 감격으로 통곡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그 감격을 잃었다.

 사람의 많은 비극과 불행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으면서 생긴다. 조금 살게 되었다고 하나님을 떠나면 길이 막힌다. 결국 이방 민족들의 방해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열심이 식어 성전 재건 공사는 곧 중단되었고 귀환 16년이 되도록 성전의 상부 건물은 전혀 건축되지 않았다. 그들은 점차 성전 짓는 일에 무관심해졌고 자신들의 주택을 짓는 데만 몰두했다. 그 상황에서 학개로부터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책이 <학개>다.

< 거룩한 비전을 막는 요인들 >

 당시 성전 건축이 중단된 구체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3가지 외부적인 요인과 4가지 내부적인 요인 때문이었다. 먼저 3가지 외부적인 요인은 무엇인가? 첫째, 이방인의 방해공작 때문이었다.   둘째,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이었다. 셋째, 육신적인 피로 때문이었다. 외부적인 요인보다 더 큰 어려움을 준 것은 내부적인 요인이었다. 본문 말씀은 왜 성전 건축이 중단된 상태로 있는지에 대한 4가지 내부적인 요인을 암시한다.

 첫째 요인은 핑계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러 어려움을 내세워 성전 건축을 중단했지만 사실 그런 어려움들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이 세상의 어떤 비전도 처음부터 끝까지 순조롭게 되는 경우는 없고 다 어려움이 있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말하지만 돈이 있어야만 비전을 지속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의지다. 그들은 “환경이 나빠서...”라고 환경 탓으로 돌렸지만 그것은 핑계다.

 일을 못하는 것에 대해 남 탓이나 환경 탓으로 돌리지 말라. 좋은 일을 못하는 것에 대해 핑계를 대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한다. 그것도 핑계다. 뉴스나 유튜브를 볼 시간은 있으면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핑계하는 무책임한 인생이 되지 말라.

 둘째 요인은 태만이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전 건축의 의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성전 기초석이 놓인 곳을 지나갈 때마다 “언제 상부 건축을 하나? 언젠가는 꼭 성전을 건축하자.”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생각이 있을 때 바로 나서야 하는데 “아직 때가 되지 않았어.”라고 하면서 자꾸 성전 건축을 미뤘다. 더 나아가 남에게도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 현재 형편상 너무 어렵다. 나중에 형편이 풀리면 하자.”라는 말로 의욕을 꺾었다.

 하나님의 때를 살피며 기다릴 필요는 있다. 너무 성급히 시작하면 실패한다. 반면에 때를 기다린다면서 일손을 놓고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재 여건에서 힘써 헌신하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라. 하나님의 일을 신실하게 하면서 때를 기다리자는 사람의 말은 들을 필요가 있지만 하나님의 일을 부실하게 하면서 때를 기다리자는 것은 게으름이다. 열심히 헌신하면서 때를 기다려야 하나님은 좋은 때와 기회를 허락하신다.

 셋째 요인은 무관심이다. 좋은 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많은 에너지가 들고 피곤한 일이지만 사실상 그 관심이 축복의 씨앗이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때가 이르지 않았다면서 하나님의 일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자신의 일에는 관심이 많았다. 하나님의 일에 대한 무관심은 죄와 허물이 아닌 것 같지만 큰 죄와 허물이다.

 하나님의 일에 무관심하면 사탄이 재물과 쾌락으로 나를 멸망시키려고 찾아와 유혹한다. 재물을 추구하는 것이나 즐거움을 누리려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다만 재물을 추구해도 하나님 안에서 추구하고 즐거움을 누려도 하나님 안에서 누리라. 하나님이 없는 상태에서의 재물과 즐거움은 영혼을 타락시키고 행복의 길을 막는다.

 넷째 요인은 불신이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핑계를 대고 영적인 나태에 빠지고 하나님의 일에 무관심해졌는가? 결국 불신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진정으로 믿지 않았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살아계시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것이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를 불러왔다.

 본문 2절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내 백성’이 아닌 ‘이 백성’이라고 호칭하셨다. 그 호칭에는 무서운 경고가 담겨 있다. 하나님은 성도에 대해 “너는 내 자녀다. 내 백성이다.”라고 말씀하지만 하나님을 불신하고 영적인 나태와 무관심에 빠지면 비유적으로 성도에 대한 호칭이 ‘내 자녀’에서 ‘이 자식’으로 바뀔 수도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에 최상의 관심을 두고 힘써 참여하라. 십자가를 피하려는 핑계를 대지도 말고 영적 나태함에 빠지지도 말고 하나님의 일에 최상의 관심을 기울임으로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예비하라.

< 말씀을 붙잡고 일어서라 >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삶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오래 간직하는 삶이다. 은혜를 간직하려면 어떤 마음이 필요한가? 첫째, 감사하는 마음이다. 사람들은 은혜는 잘 잊고 섭섭했던 일이나 상처받았던 일은 잘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 사탄이 틈을 엿보고 질병에 대한 면역력도 약해지면서 은혜도 멀어진다. 더 은혜 받고 영육 간에 강건하기를 원하면 받은 은혜를 오래 기억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

 둘째, 말씀에 열린 마음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전 건축의 열망이 다시 생긴 것은 다리오 왕 제이 년 여섯째 달 곧 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로 말미암아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임했기 때문이었다(1절). 16년 동안의 영적 흑암과 좌절의 시간을 극복하고 새로운 희망의 불씨를 지피게 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셋째, 협력하는 마음이다. 학개는 성전 건축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즉시 유다 총독인 스룹바벨과 대제사장인 여호수아에게 전했다. 결국 당시의 최고 리더였던 총독, 대제사장, 선지자가 합심해서 성전 건축의 대 역사가 다시 시작될 수 있었다. 큰일을 이루려면 함께 협력하려는 교회 중심적인 마음을 가지라. 가끔 마음이 약해지거나 헌신이 약해질 때 좋은 믿음의 동료가 있으면 비교적 쉽게 은혜의 길로 다시 들어설 수 있다.

 특히 말씀을 붙잡고 함께 협력하면 엄청난 시너지 효과가 나타난다.  교회 역사를 보면 부흥이 있기 전에 꼭 있었던 것도 말씀의 부흥이었다. 모든 은혜로운 역사와 축복의 시발점 역할을 하는 것은 대개 하나님의 말씀이다. 삶의 위기 상황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도 말씀이다. 위기는 “말씀에 더 순종하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크게 들려주는 확성기와 같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이나 설교를 통해서도 들리지만 일상의 사소한 삶을 통해서도 들릴 수 있다. 때로는 철없는 아이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발견한다.

 자녀가 조금만 아파도 기도할 때 이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 “얘야, 너 혼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실감하지? 내게 맡겨라.” 그 하나님의 응답의 말씀은 마음에 깊은 평안을 가져다준다. 문제가 생기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부터 찾으라. 노련한 뱃사공은 바람을 이용해 더 빨리 배를 저어간다. 위기 상황에서 망하게 되었다고 하지 말고 그 상황을 하나님의 말씀을 더 찾고 예수님을 마음의 중심에 모시는 기회로 삼으라.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이 하는 일을 나도 할 수 있고 예수님보다 큰 일도 할 것이라고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셨다(요 14:12). 정말로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성도에게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위기 상황에서 쓰러지고 비틀거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을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말씀 중심적으로 살면 어떤 상황도 이겨낼 수 있다. 늘 말씀을 꼭 붙잡고 다시 일어서서 하나님이 주신 영적인 성전 건축의 비전을 멋지게 이뤄내는 복된 심령이 되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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