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시끄러운 고독
#책
#너무시끄러운고독
#BohumilHrabal
#보후밀흐라발
#옮긴이_이창실
너무 속 시끄러운 고독으로 읽혔고 이해됐고 속 세계가 더욱 확장되는 신비를 경험 했다.
왜 속 시끄러움으로 읽혔을까.
폐지 압축공인 주인공 ‘한탸’의 넋두리를 들어보자.
각 장마다 또 새로운 화제로의 전환 때마다 그는 말한다.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지난 삼십오 년간 나는“ 그렇게 주변 세계에 적응해왔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으며, 사고하는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또, ‘한탸’의 말,
“새 인간, 새 방식과 더불어 바야흐로 새 시대의 막이 오른 것이다.”
“너무 시끄러운 내 고독 탓에 머리가 좀 어질어질 했다.”
" 내가 신봉했던 책들의 어느 한 구절도, 내 존재를 온통 뒤흔들어 놓은 이 폭풍우와 재난 속으로 나를 구하러 오지 않았다."
내가 걸어 온 길의 굴곡을 바라보는 것과 시대에 눌리고 끌려 페이고만 길을 바라보는 것은 많이 다르지 않을까?
그것도 다모클레스의 검을 달고 걷는 길이라면….
작가는 숨막히는 한계 속의 인간, 이성이라는 호흡법만을 아는 사람, 올바로 미친 지성, 홀로 되고만 그들의 속시끄러움에 해학으로 철학으로 마른 눈물로 위로를 전한다.
그의 위로는
Vanitas, Vanitatum (헛되고 헛되니) 사이의 균형과
Progressus ad futurum (미래로의 전진) 이다.
<욕심 난 문장들>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나는 맑은 샘물과 고인 물이 가득한 항아리여서 조금만 몸을 기울여도 근사한 생각의 물줄기가 흘러 나온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는 이제 어느 것이 내 생각이고 어는 것이 책에서 읽은 건지도 명확히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지난 삼십오 년간 나는 그렇게 주변 세계에 적응해왔다.
사실 내 독서는 딱히 읽는 행위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근사한 문장을 통째로 쪼아 사탕처럼 빨아 먹고, 작은 잔에 든 리큐어처럼 홀짝대며 음미한다. 사상이 내 안에 알코올처럼 녹아 들 때까지.
진정한 책이라면 어김없이 자신을 넘어 서는 다른 무언가를 가리킬 것이다.
그런데 밀려드는 폐지 더미 속에서 희귀한 책의 등짝이 빛을 뿜어 낼 때도 있다. 공장 지대를 흐르는 혼탁한 강물 속에서 반짝이는 아름다운 물고기 같달까.
나를 위한 미사인 독서 의식을 행하고, 내가 만든 꾸러미 안에 그렇게 읽은 책을 올려 놓는다.
꾸러미들이 저마다 뚜렷이 구분되게 하기 위해 골머리르 앓는다.
꾸러미마다 한복판에 파우스트나 돈 카를로스 같은 책이 활짝 펼쳐진 채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나뿐이다.
다음 꾸러미에 대해 꿈꾸고 명상할 시간은 충분하다.
한 번 책에 빠지면 완전히 다른 세계에, 책 속에 있기 때문이다.
저녁이면 내가 아직 모르는 나 자신에 대해 일깨워 줄 책들.
내 안에는 이미 불행을 냉정하게 응시하고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이 자리했다.
엄마가 죽었을 때 내 안의 모든 것이 울었지만 막상 내게는 흘릴 눈물이 남아 있지 않았다. 화장터를 나서자 한줄기 가느다란 연기가 하늘로 피어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엄마가 어여쁜 모습으로 오르고 있었다.
다로클레스의 검
상상의 무게에 짓눌려 내 몸이 구부정해진 것이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으며, 사고하는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예수가 프로그레수스 아드 푸투룸(progressus ad futurum, 미래로의 전진)이라면, 노자는 레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regressus ad originem, 근원으로의 후퇴)이었다.
너무 시끄러운 내 고독 탓에 머리가 좀 어질어질 했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는 행복이라는 불행을 짊어진 사람인 데 짤막한 글귀들을 낚아채 캐러멜처럼 빨아 먹으면서 장엄한 미에 도취되었다.
무한한 다양성이 사방에서 나를 엄습해 왔다.
새 인간, 새 방식과 더불어 바야흐로 새 시대의 막이 오른 것이다.
여자들이 그 황송한 설명에 귀기울이는 고역을 치르게 했다.
불행의 본거지를 막 벗어난 사람처럼 사라져갔다.
내가 신봉했던 책들의 어느 한 구절도, 내 존재를 온통 뒤흔들어 놓은 이 폭풍우와 재난 속으로 나를 구하러 오지 않았다.
바니타스 바니타툼(vanitas vanitatum 헛되고 헛되니) 사이의 균형
우리는 만신창이가 된 다음에야 최상의 자신을 찾을 수 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반드시 적을 두기 마련이다.
태어나는 건 나오는 것이고 죽는 건 들어가는 것이라고 노자가 말한 이유는 뭘까?
#펴낸곳_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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