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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는 삶의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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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아보는 삶의 축복 >  기억은 소중한 것이다. 좋은 기억은 좋은 인생을 만들고 나쁜 기억은 나쁜 인생을 만든다. 한국어의 ‘기억’이란 단어는 시적인 운치가 덜하지만 영어의 리멤버(remember)라는 단어는 시적인 운치가 느껴진다. remember는 ‘삶의 일부조각(member)을 다시 되돌려내는 것’이란 뜻의 단어다. 되돌려내고 돌아볼 좋은 기억은 미래로 나아갈 힘을 준다. 돌아보고 싶은 것이 많은 삶도 축복이지만 돌아보는 삶 자체도 축복이다.  나그네 인생길의 고단을 줄이려면 돌아갈 고향이 있어야 한다. 성도의 인생길이 덜 고단한 이유는 천국 고향이 있기 때문이다. 왜 현대인들은 옛날보다 삶이 훨씬 편해졌는데 정신적으로는 더 고단함을 느끼는가? 진한 영상을 남기는 돌아볼 것이 적기 때문이다. 돌아보고 싶은 마음의 고향과 같은 것이 있는 삶이 큰 축복이다.  왜 한국 교회가 활력과 영향력이 약해졌는가? 교회가 최후의 안식처란 느낌과 영혼의 고향이란 의식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교회의 대형화로 ‘내 고향 교회 의식’이 약해진 것은 한국 교회의 큰 손실이다. 대형 교회에 몸담으면 ‘내 교회 의식’은 생겨도 ‘내 고향 교회 의식’은 생기기 힘들다.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서 자라면 강한 연대감을 주는 고향 의식이 거의 생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반면에 지방에서 자라면 고향 의식이 강해지고 작은 시골 마을이나 섬에서 자라면 고향의식이 더 강해진다.  교회생활에서도 자녀에게 작은 교회의 경험을 통해 교회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고향 교회 의식을 심어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자신은 큰 교회에서 편하게 다니고 싶어도 자녀의 앞날을 생각하면 편한 것만 생각할 수는 없다. 큰 교회는 주일학교 교육 시스템이 잘 된 편이지만 자녀의 영혼을 살찌우려면 ‘교육 시스템’보다 영적인 고향 교회 의식을 가지게 하는 ‘교회적인 삶’이 더 중요하다. 큰 교회에서 또래와 어울려 신앙생활을 하면 재미있고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 같지만 대학교에 들어가면 대부분 흩어

사랑은 결국 먹혀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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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신을 끊임없이 훈련하라 >  요즘 가장 큰 문제는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인내와 헌신이 없는 값싼 사랑이 많은 것이다.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사랑의 이름으로 많은 사람이 접근했지만 모두 값싼 사랑이었다. 값싼 사랑은 영혼을 더 갈증 나게 한다. 그래서 본문의 여인도 남편을 다섯 명이나 갈아 치우고 여섯 번째 남편과 살고 있었다. 그녀의 다섯 남편은 누구였을까요? 가상적으로 이런 추리를 해볼 수 있다.  첫째 남편은 인물이 좋았을 것이다. 선악과처럼 보암직했지만 속이 비었고 자주 바람을 피웠다. 그래서 바람피우지 말라고 따지니까 심지어 때리기까지 해서 도망쳤다. 둘째 남편은 지식이 있었을 것이다. 그 배운 지식으로 속이 꽉 찬 것처럼 보였지만 너무 고지식하고 재미도 없었고 가난했다. 그래서 빨리 팔자를 고치자고 관계를 끝냈다.  셋째 남편은 돈이 많았을 것이다. 원하는 것은 다 가질 수 있었지만 가정보다 사업을 더 중시해서 돈 때문에 돌 것 같았다. 그래서 위자료를 많이 챙기고 끝냈다. 넷째 남편은 권력이 있었을 것이다. 권력의 맛은 꿀맛이어서 권력 휘두르는 기분이 끝내주게 좋았지만 매일 중상모략하고 남을 칠 궁리만 하는 것을 보고 환멸이 나서 끝냈다.  다섯째 남편은 평범한 농부였을 것이다. 모든 부귀영화가 다 귀찮고 평범한 것이 좋을 것 같아서 같이 농사를 하며 살았지만 얼마 후에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이 너무 팍삭 늙어 보였다. 그래서 아무래도 밑지는 인생 같아서 관계를 끝냈다. 그런 식으로 만나고 헤어졌다가 현재는 아무 희망도 없이 그저 길거리에서 만난 남자와 살고 있었다. 그런 여인의 모습이 바로 현대인의 모습을 잘 나타낸다.  왜 많은 현대인들이 그렇게 방황하는가? 헌신이 없기 때문이다. 헌신이 커지면 공허가 작아지고 헌신이 작아지면 공허가 커진다. 결국 ‘주는 삶’이 갈증과 공허를 극복하고 내일의 축복을 예비하는 최고의 삶이다. 사람의 마음을 얻고 인간관계를 튼튼히 하고 영혼의 갈증을 해소하려면 위로는 하나님께

은혜의 3대 통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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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십자가의 대속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에 달렸다. 하나님 보시기에 사람은 거의 똑같은 죄인이다. 옛날 사람들은 높은 곳에서 물건을 떨어뜨리면 무거운 것이 가벼운 것보다 더 빨리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갈릴레이는 실험을 통해 무거운 돌과 가벼운 돌은 동시에 떨어진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죄 문제도 마찬가지다. 중죄는 깊은 지옥에 떨어뜨리고 경죄는 얕은 지옥에 떨어뜨리는 줄 알지만 지옥에 가는 것이 같다면 중죄와 경죄의 구분도 무의미하다. 때로는 경죄인보다 중죄인이 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빨리 돌아온다.  누가 구원의 은혜를 받는가? 십자가의 복음을 영접하는 자다. 십자가의 진리는 생각을 초월한 진리기이에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복음을 이해하지 못했다(32절). 아무리 잘 설득하고 설명해도 사람은 의롭게 되지 못함을 알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다. 누군가의 변화를 원하면 그를 이해시키고 설득해서 변화시키려고 하기보다 먼저 십자가를 짐으로 감동을 통해 변화시키려고 하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앞세워 복을 얻는다는 것’보다 ‘예수님을 따라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의 의미가 크다. 2. 믿음의 고백  하나님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라고 고백한다(33절).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은 언제나 옳습니다.”라고 고백한다는 뜻이다. 믿음은 “저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는 고백만으로 단순히 판명되지 않는다. 영생의 축복을 얻는다니까 말로만 그런 피상적인 고백을 하는 경우도 있다. “하나님은 언제나 옳습니다.”라고 진실로 인정하는 경지까지 가야 그 믿음이 참된 믿음이다. “하나님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의 진정성은 언제 판가름 나는가? 힘들 때도 “하나님의 조치는 언제나 옳습니다.”라고 하는 고백을 통해 판가름 난다.  제자에게 있어야 하는 중요한 요건 중의 하나가 ‘아멘의 고백’이 훈련된 것이다. 제자를 가르치는 사람을 순수 한국말로는 ‘스승’이라고 한다. 스승은 ‘스님, 승려’에서 나온 말로 추정되지만 어떤 사람은 ‘스스로 승

크기보다 영향력이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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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의 사자가 되라 >  1800년대 중반까지 베들레헴에 있는 예수 탄생 교회의 꼭대기에는 그리스 정교회를 상징하는 큰 은별 장식이 있었다. 어느 날 그리스 정교회와 건물 일부를 함께 소유하던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그 은별을 철거하고 대신 자신들의 별을 장식하기로 결정했다. 그리스 정교회 측에서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그 은별 하나로 세기의 대 전쟁이 벌어졌다.  당시 팔레스타인을 통치하던 터키가 프랑스의 후원을 받던 로마 가톨릭 교회 편에 서자 그리스 정교회 편에 섰던 러시아가 터키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그래서 프랑스와 영국과 터키가 연합군을 형성해 러시아와 싸웠다. 그 전쟁이 1853년부터 4년간 계속된 크리미아 전쟁(Crimean War)이다. 그 전쟁으로 100만 명 이상 죽었고 결국 로마 가톨릭 교회를 옹호했던 영국과 프랑스와 터키 연합군이 승리해 은별을 철거했다.  평화의 왕이 탄생한 곳에서 역사적으로 갈등과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사실이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사람은 스스로 평화를 이루지 못한다. 한 역사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역사상 지금까지 약 8%의 기간만 평화가 있었고 지난 300년간 유럽에서만 약 300번의 전쟁이 있었다. 또한 주전 1500년부터 주후 1900년까지 약 800번 이상의 평화조약이 체결되었지만 그 조약의 평균 유효기간은 2년이었다.  사람만으로는 참된 평화가 없기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주셨다. 성육신의 핵심 정신은 평화다. 어디에 가든지 평화의 사자가 되기를 힘쓰라. 그것을 위해 제일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무엇인가에 집착하면 평화가 깨지고 그것을 내려놓으면 평화가 커진다. 자기 몫만 찾고 나눌 줄 모르면 세상은 어두워지고 하나님의 진노를 부른다. 평화를 원하면 욕망을 줄이고 내려놓고 손해 볼 줄 아는 삶을 연습하라. < 크기보다 영향력이 중요하다 >  비전은 개인 욕망의 성취를 위한 성공 수단이 아니다. 잘못된 비전은 영혼을 어지럽히고 교회를 어렵게

성육신의 사랑을 실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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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육신의 침묵에 담긴 사랑 >  얼마 전 한 이단 교주가 성경에 약속된 최후의 낙원인 피지에 가면 피지인을 거느리며 왕처럼 산다고 미혹해 약 400명의 신도를 피지로 이주시켰다. 그러나 현지 농장 등에서 일하다 탈출한 신도들은 피지가 최후의 낙원이 아닌 지옥 같았다고 했다. 그들은 여권을 뺏긴 채 감금돼 하루 14시간 넘게 돈도 못 받고 일하고 서로 감시하고 몸 안의 귀신을 내쫓는다면서 타작마당이란 이름으로 폭행을 일삼았다고 증언했다.  어떤 교인은 맞아서 온몸에 벌겋게 피멍이 든 채 후유증으로 죽었다. 또한 매 맞으며 일하는 삶을 견디다 못한 신도 20여 명은 필사적으로 섬을 탈출했다. 가족도 서로 감시시켰다. 이단을 구분하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 가정을 버리도록 세뇌하면 대개 이단이다. 왜 이단의 뻔한 거짓말에 넘어가는가? 욕망 때문이다. 왜 이단의 사기가 계속되는가? 뻔한 거짓말에도 속으니까 “어, 이런 말도 통하네.”라고 쾌재를 부르며 계속 속이는 것이다.  교주가 추종자를 종처럼 거느리는 정신적 쾌락에 빠지면 거짓말이 심화되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워 자기를 높이고 자기 왕국을 쌓으며 남을 지옥으로 밀어 넣는다. 이단 교주는 말로는 최고의 영성을 과시하지만 행동을 보면 기본 윤리성도 없다. 예수님의 성육신의 삶을 조금만 묵상해도 이단 교주를 쉽게 분별해낼 수 있다. 피지인을 거느리며 왕처럼 산다는 말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비성경적인 말인가? 그 말에 피지로 이주한 신도들은 일을 시키고 먹여만 줘도 좋은 종처럼 되었다. 왕이 되려고 욕심내면 비천한 종이 된다.  희생을 모르는 종교는 진리가 아니다. 물론 이단 교주도 희생을 크게 강조한다. 그러나 왕 같은 제사장 및 내세의 축복을 약속하며 자기 왕국을 위해 신도의 희생을 강요한다. 화려한 말로 ‘영혼의 때’를 위해 헌금하라고 하면서 그 헌금으로 초대형 교회를 건축해 교주 자신은 ‘이 땅의 때’에 집착하는 모순적인 행동으로 남만 희생시키는 것이 이단 교주의 특징이다. 자기희

복된 삶을 위한 5대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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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라  어느 날 세례 요한의 제자와 유대인들이 와서 그에게 고통스런 말을 했다. “선생님! 선생님이 증거하던 예수라는 분이 세례를 주니까 사람들이 다 그에게 갑니다.” 이 말이 얼마나 고통스런 말입니까? 어느 정도 가는 것도 아니고 ‘다’ 간다고 본문은 묘사한다. 보통 사람이라면 복장이 터지고 미운 감정이 들고 이런 한탄이 나올 것이다. “내가 그보다 뭐가 부족해.” 그러나 세례 요한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라고 했다(27절). 하나님의 뜻이니까 괜찮다는 것이다. 그처럼 그는 넉넉한 마음으로 자기 위치를 지켰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역사를 반드시 체험한다. 2. 자기의 위치를 인식하라  세례 요한이 말한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라는 말에는 나름대로 깊은 메시지가 있다. 즉 하나님은 사람마다 각자 나름대로 고유한 것을 주셨다는 암시다. 남이 어떤 것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을 자신도 꼭 받으려고 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소명과 재능과 스타일에 집중하라. 하나님이 주신 다양성을 외면하고 남이 되려고 하지 말라. 실패하는 사람의 특징은 자기 것을 시시하게 보고 남의 것을 좋게 보면서 여기 저기 기웃거리다가 세월만 보내는 것이다. 남에게 있는 것은 참고만 하고 자신에게 있는 것을 소중히 여기고 발전시키라. 그런 삶에 기쁨과 만족과 보람이 있다. 3. 뚜렷한 소명의식을 가지라  세례 요한이 넉넉한 마음으로 자신을 낮췄다(28절). 뚜렷한 소명의식과 목표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를 인식하고 하나님이 주신 자신만의 특징을 가지고 주님을 위해 일하라. 소명의식과 목표의식이 뚜렷하면 인생의 창의성과 효율성이 배가된다. 사람에게는 세 번의 생일이 있다. 첫째 생일은 자신이 태어난 날이다. 둘째 생일은 자신이 거듭난 날이다. 셋째 생일은 자신이 소명을 발견한 날이다. 거듭난 것으로 만족하지 말라. 거듭난 자녀로서 자신을 향한

더 많이 알려고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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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많이 알려고 하라 >    혼합주의로 국력이 쇠퇴하면서 점차 이방인에게 삼켜진 현실을 북 이스라엘은 깨닫지 못했다(9절). 지식이 없는 무지도 문제지만 현실을 모르는 무지는 더욱 큰 문제다. “결코 포기하지 말라.”는 말도 현실 인식이 분명할 때 필요한 권고다. 현실 인식도 없는 상태에서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은 집착이 될 수 있다.  포기가 다 나쁜 것은 아니다. 욕심을 내려놓는 포기는 꼭 필요한 것이다. 쥐기를 포기해야 더 많이 쥘 수 있고 손을 펴야 얼굴도 펴진다. 집착을 끊으면 폭넓은 자유가 펼쳐지고 지경도 넓혀진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필요한 것이 뚜렷한 현실 인식이다. 몸이 약해지는 상황을 인정하라. 건강미 대신 원숙미를 빛내면 되고 피부가 광채를 잃으면 마음이 광채를 발하면 된다. 옛 것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새 것이 찾아온다.  현실 인식이 분명하면 무엇인가를 잃어도 우울해할 필요가 없다. 무엇인가를 잃는 것은 무엇인가를 얻는 과정이다. 인기는 잃어도 목적은 잃지 말라.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지금 너무 쥐려고 하지 않아야 삶의 지혜가 깊어지고 나중에 얻을 것이 많아진다. 많게 되기를 포기하면 깊게 되는 길이 열린다.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면 할 수 있는 것의 깊이가 더해진다. 이기적인 안경 대신 성경적인 안경을 쓰고 세상을 폭넓게 보라. 내려놓을 때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되고 알게 된다.  무지는 죄다. 더 많이 알려고 하라. 특히 자기 위치와 현실을 더욱 알려고 하라. 나이가 들어도 명예나 권력을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면 더 많이 잃는다. 물러설 때를 알고 조용히 물러서서 후대를 잘 준비하는 것도 충성이다. 최대의 충족보다 최선의 충성을 앞세우라. 인생은 계주와 같다. 계주는 나만 잘 달려도 소용이 없다. 어떤 일을 내 대에 성취하겠다고 하지 말고 자녀와 후대를 잘 길러 내 소유를 기쁘게 넘겨줌으로 그 일이 잘 계승되도록 분명한 현실 인식 가운데 은퇴를 잘하는 것도 축복이다. < 마음의

하나님이 기억하심을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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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기억하심을 생각하라 >  하나님은 치료하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치료에는 영혼의 치료, 정신의 치료, 육신의 치료, 관계의 치료, 사회의 치료, 국가의 치료 등이 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치료하려고 하실 때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이 드러났다(1절). 왜 그들이 죄악을 행했는가? 하나님이 모든 악을 기억하고 있음을 그들이 마음에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2절). 하나님이 그들의 악을 기억하심을 생각하지 않기에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고 악행이 그들을 에워쌀 정도로 많아지고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행할 정도로 대담해졌다.  모든 악행은 하나님이 다 지켜보고 기억해서 보응하신다. 악뿐만 아니라 모든 상황은 하나님이 다 보고 허락하신 것이다. 내게 다가오는 예기치 않는 고난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다. 고난당하는 성도는 꽃을 못 피우고 꺾인 꿈나무 같다. 특히 착한 사람에게 고통이 계속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정의 문제에 생각이 미치기도 한다. 언뜻 보면 죄를 덜 짓고 순수하게 사는 사람에게 시련과 고생이 더 많이 주어지는 것 같다.  정직하면 육신이 수렁에 빠지고 불의하면 마음이 수렁에 빠진다. 그때 육신을 수렁에서 빼려면 마음이 수렁에 빠지고 마음을 수렁에서 빼려면 육신이 수렁에 빠진다. 난감한 상황이다. 정직하게 살려고 할 때 상황이 어려워지면 은근히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들지만 중요한 것은 그 부조리한 상황은 일시적이라는 사실이다. 모든 것을 보시는 하나님이 결국 불의는 보응하시고 정의는 보상하신다.  부조리한 현실에 너무 낙심하지 말라. 그 현실도 하나님이 선용하실 목적으로 허락하셨다. 하나님을 붙잡아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 수 있지만 그때 더욱 하나님을 붙잡으면 조만간 높은 산에 오르게 된다. 시련과 고통과 질병은 간혹 통과해야 하는 현실이다. 또한 이 땅의 재화가 한정된 상태에서 더 많이 가지려는 경쟁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붙잡고 믿음으로 그런 현실을 극복해 나아가는 것이다.

믿음으로 사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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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께로 돌아가라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삶은 하나님께 돌아서는 삶이다. 성경은 끊임없이 그 삶을 권고하고 본문에서 호세아도 그것을 권고한다. <호세아>는 호세아 선지자와 음녀 고멜과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를 잘 나타낸 책이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음녀 고멜과 결혼하지만 고멜은 계속 호세아를 배반했다. 그 모습은 하나님의 은혜를 끊임없이 배반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이다. 그 상황에서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돌아가자고 외친다(1절).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말은 회개한다는 말이다. 회개란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는 것만이 아니다. 고난이 잘못 때문에 생기는 것만은 아니다. 하나님의 선한 뜻으로 혹은 새로운 창조와 깨달음을 위해 주어질 때도 있다. 의인은 편하고 죄인은 불편한 것이 아니다. 회개란 이전의 나보다 훌륭한 나가 되려고 나 중심적 삶에서 하나님 중심적 삶으로 변환을 뜻한다. 즉 나를 보다 훌륭한 나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고난도 필요하다.  내가 변하는 것이 빠르다. 하나님은 그것을 더 원하신다. 기독교는 환경의 변화나 남의 변화보다 나의 변화를 중시하는 종교다.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도 내가 변화된다는 것이다. 다른 것이 변화되기를 바라기 전에 내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가 나타난다. 하나님이 축복을 주실 때 원하시는 한 가지는 내가 손들고 하나님께 찾아오는 것이다. 하나님께 돌아가면 하나님은 원점에서 나를 일으켜 세우시고 나의 약점이나 잘못된 과거를 묻지 않으신다. 2. 하나님을 힘써 알라  힘써 여호와를 알라(3절). 왜 사람들이 믿지 못하고 절망하는가? 왜 사람들이 잘못 사는가? 왜 사람들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가? 왜 사람들이 헌신을 모르는가?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과 길을 잘 모르고 하나님의 약속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아는 것 같아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한

제자에게 필요한 4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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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도 준비  갈릴리에서 전도하시던 어느 날 예수님은 12제자를 선택하는 중요한 결정 전에 산에 가서 밤새도록 기도하셨다(12절). 예수님은 중요한 일 전에 대개 먼저 기도하셨다. 기도는 예수님께도 변화를 선도하는 능력의 원천이었다. 아마 이렇게 기도하셨을 것이다. “하나님! 내일 제자를 선택해 발표하려고 합니다. 누구를 12제자로 선택할까요?” 기도할 때 가시적인 복을 달라는 기도도 필요하지만 좋은 선택을 위한 기도도 필요하다.  예수님은 과시적으로 기도하지 않았기에 기도할 때 산과 같은 한적한 곳으로 따로 가서 기도하실 때가 많았다. 공중기도 때는 어쩔 수 없이 남이 듣지만 원래 기도는 남에게 듣게 하는 것이 아니다. 남이 듣는 상황에서 기도하면 가식적이고 과시적이고 형식적이고 설교적인 기도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한적한 곳의 기도를 즐겨하셨다. 예수님은 제자 선택을 위해 기도했지만 사실상 제자로 선택되려는 사람도 기도로 준비해야 한다.  기도로 준비하라는 말은 “하나님! 제가 복된 존재가 되게 하소서.”라고 하루 8시간 이상 기도만 하라는 말이 아니다. 참된 기도를 할 때 꼭 나타나는 것은 실행력과 실천력이다. 결국 기도로 준비한다는 것은 그 기도대로 되도록 필요한 준비도 병행한다는 뜻이다. 학생이 시험 패스를 위해 기도하면서 공부를 게을리 하면 그것은 참된 기도가 아니다. 기도하면서 믿음도 준비하고 인격과 도덕성도 준비하고 실력도 준비해야 한다.  기도로 준비하면 인물이 되기를 원해도 자리를 탐하는 욕심은 없어진다. 기도 없이 준비하면 성공과 자리를 탐하게 되지만 기도로 준비하면 그런 탐심이 없어지기에 더 잘 준비될 수 있다. 원래 바른 학자는 직책을 구하지 않는다. 사심 없이 어떤 분야에서 학문적인 성취를 이루면 대개 어느 시점에 하늘의 선택을 받아 어떤 자리로 올라서고 또한 그 자리를 나보다 공익을 위해 활용하는 것이 바른 수순이다. 그것이 기도로 준비된 사람이 어떤 자리를 맡아야 하는 이유이고 또한 어떤 자리를 맡은 후에도

심판에서 면제받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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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의 도리를 지키라  하나님의 심판은 꼭 이뤄진다(9절).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유다를 벌했는가? 우상숭배 외에 유다 지도자들이 경계표를 옮기는 것과 같은 도덕적인 타락도 한 몫을 했다(10절). 소유의 경계를 나타내는 경계표를 옮기는 것은 율법에서 저주를 받는 큰 죄로 여겼다(신 27:17). 경계표를 옮기는 것은 남의 땅을 불법적으로 취하는 도둑질로서 당시 도덕적인 타락을 대표하는 행위로 언급되었다.  경계표를 옮기지 말라는 말씀은 윤리도 지키라는 말씀이다. 영성을 내세우는 사람은 “기독교는 윤리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윤리를 무시한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윤리 의식이 불신자보다 못해도 영성이 있다는 말은 공감하기 힘들다. 하나님은 성도가 세상 윤리보다 나은 모습으로 살려는 삶을 기뻐하신다.  인간 본능에 의해 만들어진 가짜 신은 윤리를 요구하지 않고 무시하면서 복을 준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엄격한 윤리를 요구하시기에 율법도 주셨고 성경도 복음서 4권 외에 66권까지 정경으로 있게 하셨다. 거짓 무속 종교는 자기만 생각하기에 윤리가 필요 없지만 기독교는 남도 생각하기에 윤리가 없을 수 없다. 윤리를 지켜야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불신자보다 차원 높은 윤리의식이 있어야 한다. 2. 사람을 뒤따르지 말라  잘못된 사람의 명령 뒤따르기를 좋아하면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방 민족에게 압제당하고 멸망당한다(11절). 진리의 길을 걸으려면 궁극적으로 사람을 뒤따르거나 나를 뒤따르게 하지 말라. 예수님을 뒤따르고 진리를 뒤따르려는 사람이 진짜 자유인이다. 나를 뒤따르지 않을 것이 예상되어도 바른 말을 해주라. 자기를 바라보는 대신 주님을 바라보게 하면서 광야의 고독도 감수하려고 하라.  생각을 단순화시키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가면서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그 고난은 영혼과 정신을 작품으로 만든다. 잘못된 사람을 뒤따르면 영혼이 조각나지만 예수님을 뒤따르면 영혼이 조각된다. 사람을 인정하고 높여주되 사람에게 비위를

사랑은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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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 힘써 대접하라 >  한 사람이 집에서 예쁜 개를 키웠다. 그 집을 가끔 방문하는 사람은 처음에는 그 개를 많이 예뻐했지만 나중에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이 주인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점차 교만해졌기 때문이다. 점차 자기를 끔찍하게 위해주는 주인에게 딱 달라붙어 다른 사람에게는 안하무인처럼 행동했다. 남들이 그 개를 보며 생각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인데 저렇게 주인 믿고 까불면 언젠가는 다치지.”  어느 날 주인의 자녀가 아프게 되면서 자녀를 위해 시간을 더 내야 했고 가정 환경도 깨끗하게 만들어 개털도 날라 다니지 않게 해야 했다. 결국 끔찍하게 예뻐해주던 개가 곧 그 집에서 쫓겨났다. 개가 큰 착각을 한 것이다. 주인이 아무리 자기를 예뻐해 주어도 어느 누가 개를 위해 사랑하는 자녀를 희생시키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독생자를 주심으로 그런 사랑을 보여주셨다. 주님을 닮은 삶이란 주기를 힘쓰는 삶이다.  한 사람이 첫 직장생활을 할 때 월급을 받고 감격하며 생각했다. “그 많은 돈을 어떻게 쓸까?” 보통은 월급을 저축하고 결혼준비를 하는데 그는 결혼은 그냥 하는 줄 알고 돈을 저축하지 않았다. 대신에 열심히 드리고 나누고 베푸는 삶을 위해 썼다. 결국 거의 돈이 없는 상태에서 결혼했지만 결혼 후에도 하나님이 신기하게 그 가정의 모든 필요를 넉넉히 채워주셨다. 그 후에도 부자는 아니지만 선교와 구제를 위해 최고의 부자처럼 선한 손길을 펼치자 자신도 다른 선한 손길을 많이 만나 풍성한 은혜를 받게 되었다.  드리고 나누고 베풀면 가난뱅이가 될 것 같지만 하나님은 신기하게 드리고 나누고 베풀 수 있는 능력을 넘치게 주신다. 나눔은 결코 손해가 아니다. 살면서 수많은 기쁜 일 중에 주는 일과 내는 일만큼 기쁨을 주는 일은 없다. 나눔을 위해 자기 안전을 걸 때 하나님은 신기하게 더 채워주시는 하나님임을 꼭 보여주신다. 서로 힘써 대접하라. 대접하는 기쁨을 빼앗긴 삶은 불행한 삶이다. 주는 기쁨과 내는 기쁨을 위해 자기 안전을

하나님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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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풍성한 사랑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할 때 헬라어를 통해 마땅한 단어를 찾지 못해서 결국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바다를 먹물로 삼고 하늘을 두루마리로 삼아도 하나님의 사랑을 다 기록할 수도 없고 잘 표현할 수도 없다. 그 사랑으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기에 내가 받은 구원의 가치는 무한하다. 십자가는 내 생명이 예수님의 생명만큼 가치 있다는 실물적인 증거다. 사랑의 하나님께 돌아서기만 하면 어떤 잘못이나 아무리 끔찍한 죄도 용서받을 수 있다.  어느 날 한 처녀가 목회자를 찾아와 상담했다. 좋은 남자를 만나 청혼을 받았는데 자신은 과거가 있어서 양심이 찔려 도저히 결혼을 못하겠고 혼자 평생 죄 짐을 지고 사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않겠느냐는 얘기였다. 그때 목회자가 말했다. “과거를 회개했으면 하나님은 다 잊어버리셨으니까 감사함으로 결혼해 잘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말에 용기를 얻고 결혼해서 잘 살았다.  본문 말씀은 생각할수록 신비하고 감격적인 말씀이다.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이 과거를 불문하고 그토록 나를 사랑하시는가? 내게 하나님의 사랑 받을만한 모습이 있는가? 사람은 하나님 앞에 배반자로서 사랑스럽지 않게 행동할 때도 많다. 마틴 루터는 말했다. “내가 만약 하나님이라면 사람들의 죄악을 보며 금방 진노의 불을 내렸을 것이다.” 그래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한다고 하신다.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2. 끝없는 사랑  나의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나는 주님 안에서 깨끗해졌다는 것이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말씀에 내포된 의미다. 자의식을 괴롭히는 가장 큰 죄도 진심으로 회개하면 하나님은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한번 구원하신 사람은 포기하지 않는다. 사람이 양 같아서 제 갈 길로 가도 하나님은 끝까지 붙들어주신다.  한 목장에 성난 이리떼가 밤에 나타나 양들을 물어뜯고 죽였다. 살아남은 양은 놀라서 산과 들로 도망쳤다. 날이 밝아 목자가 양을 찾아 나섰는데 놀란 양들은 주인도 무서워하고 가랑잎

믿음은 복의 척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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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보다 믿음이 중요하다 > 예수님이 거듭남의 비밀을 말씀하자 당시 최고 학력을 가진 니고데모는 “어떻게 사람이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4절). 그때 예수님이 성령으로 거듭나는 원리를 말씀하자 니고데모는 다시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가 무식해서 그런 질문을 한 것이 아니다.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선생’이라는 호칭을 들을 정도로 유식했다(10절). 그러나 세상 지식과 영적인 지식은 확실히 다르다.  니고데모는 2번의 질문을 통해 영계의 비밀을 알고 싶어 했지만 예수님은 영계의 비밀을 알려주기보다는 믿음을 요구하는 말씀을 하셨다. 지식보다 믿음이 더 중요하다는 암시다. 지식이 무엇인가? 본문 11절에 의하면 지식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는 것’이다. 지식이란 사람이 납득할 수 있도록 증명된 것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증명된 지식도 잘 받아들이지 않을 때가 많다는 것이다. 하물며 사람의 지식을 초월한 하늘의 지식을 어떻게 잘 받아들이겠는가? 그래서 믿음이 필요이다. 결국 지식보다 믿음이 더 중요하다.  믿음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믿음의 최고봉은 ‘영생의 믿음’이다. 영생의 믿음은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온 분임을 믿고 또한 광야에서 들린 뱀처럼 십자가에 들린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13-15절). 믿음은 순종이다. 즉 참된 믿음은 누가 확실한 증명을 해줄 때 하나님께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이유를 몰라도 그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처럼 이유를 따지지 않고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지만 그렇다고 맹목적으로 의지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을 굳게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믿음 중에는 가짜 믿음도 많다. 진짜 믿음과 가짜 믿음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진짜 믿음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믿는 것이지만 가짜 믿음은 ‘자기 요구가 관철될 것’을 믿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이 약속하지도 않고 원하시지도 않는 것도 마치 자기가 다 할 수 있

낭떠러지 상황을 극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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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을 잃지 말라> ~ 거룩한 선교 비전을 가지면 하나님이 비전을 이룰 수 있는 능력과 여건도 주신다. 또한 가끔 다가오는 어려운 상황도 능히 극복하게 하신다. 지금 임 선교사는 몽골에서 2020년까지의 마지막 텀 사역을 하고 있다. 며칠 전에 받은 선교편지에서는 생활의 어려움을 짤막하게 피력했다. 그동안 다른 기도제목은 많이 보냈어도 생활의 어려움을 직접 피력한 적은 처음인 것 같다. 그 어려움도 잘 극복할 것이다. 사명을 따라 살면 어려움도 겪지만 계속 사명을 따라 살면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길이 신기하게 열린다. 말씀과 기도와 지식과 경험을 통해 미래 상황을 예측하고 대비하는 거룩한 선견지명을 가지라. 예측만 잘하면 안 된다. 대비까지 잘해야 선견지명이 있는 것이다. 어려움을 예측해서 대비하는 선견지명을 발휘하면 어려움이 극심한 어려움으로 커지지 않고 극심한 어려움이 오기 직전에 대개 길이 열린다. 믿음이 낭떠러지 상황이 올 수 있다. 그 사실을 알고 잘 대비하면 낭떠러지 상황에 처하지 않고 그런 상황에 처해도 비교적 손쉽게 극복할 수 있다. <낭떠러지 상황을 극복하는 길> 예수님은 여러 번 죽음의 위협을 겪으셨다. 본문을 보면 출신지인 나사렛에서 동네 사람들에게 산 낭떠러지까지 끌려가서 밀쳐져 떨어져 죽기 직전에 그 상황을 극복하셨다. 살다 보면 그처럼 죽음 직전의 낭떠러지 상황을 맞이할 때가 있다. 그 상황을 잘 극복하고 사명의 길을 잘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편견에 매몰되지 말라 당시 나사렛 회당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사람들이 큰 은혜를 받고 놀라면서 말했다(22절).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말씀은 은혜롭게 들었지만 그 말씀을 전한 사람이 '요셉의 아들'임을 알고 경탄하기보다 무시하는 감정을 가지고 놀라움을 표시했다. 그때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 가문에 대한 편견이 진리를 놓치게 한 것이다. 편견을 통해 남

넘치게 채워주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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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넘치게 채워주시는 예수님 >  사람들은 가끔 예수님을 오해한다. 그 중의 하나가 예수님이 찢어지게 가난했다는 오해다. 언뜻 보면 가난해야 더 영적인 것 같지만 그것은 편견이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찢어지게 가난하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구절도 많다. 본문 5절에서 예수님의 어머니가 하인들을 부리는 위치에 있었던 점도 ‘예수님의 가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예수님을 ‘가난한 분’으로만 보지 말라.  가나 혼인잔치가 벌어질 때 거기에는 약 100리터의 물을 담을 수 있는 돌 항아리 6개가 있었다(6절). 그 항아리의 물이 모두 포도주로 변화되면 약 600리터의 엄청난 포도주가 생겨난 셈이다. 게다가 그 포도주는 가장 맛있는 포도주였다. 예수님은 넘치게 채워주시는 분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5천 명을 먹이실 때도 12광주리가 남게 하셨다. 하나님의 은혜에는 한계가 없다. 하나님은 필요하고 충분한 것만 주지 않고 필요하고 충분한 것 이상을 주시고 자신이 원하는 만큼만 주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 이상도 주신다.  아무 것도 없는 자도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을 가진 자다. 시편 145편 15-16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모든 사람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나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내 생각 이상으로 주어지기에 사실상 하나님께 더 요구할 것이 없다. 결국 기도할 때 입술에서 제일 많이 나와야 할 단어는 ‘감사’다.  에베소서 3장 20절에서는 하나님을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라고 표현했다. 하나님은 나를 좋아하시지만 나를 축복하는 일도 좋아하신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강도에게 낙원을 허락해주셨고 현장에서 간음죄로 잡힌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셨고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에게도 천국 열쇠를 주셨다. 그처럼 좋은 것을 아끼지 않고 주시는 하나님은 내가 필요한 것을 구할 때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나타내 보여

최고의 전도 방법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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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의 전도 방법은 사랑 >  예수님은 빌립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43절). 빌립은 베드로와 안드레와 한 동네인 벳새다 사람이었다. 그때 빌립에게 어떤 깊은 감동이 있어서 바로 나다나엘을 찾아 전도했다. 안드레가 예수님을 믿고 바로 형 베드로를 찾아 전도했듯이 빌립은 예수님을 믿고 바로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 전도했다(45절). 전도는 소극적이면 안 된다. “하나님이 만나게 하시면 전도하겠다.”고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나서라.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 바로 나사렛 예수님이다.”라고 하자 나다나엘이 반문했다. “베들레헴 예수가 아닌 나사렛 예수가 어떻게 메시아가 될 수 있는가?”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헤롯 왕 때문에 애굽으로 잠시 갔다가 다시 나사렛으로 와서 자란 사연을 몰랐기에 그렇게 반문한 것이다. 그때 빌립은 설득하지 않고 말했다. “와서 보라.” 빌립의 간단한 그 말에는 영혼을 감동시키는 무엇인가가 있다. 전도는 ‘경험과 지식’으로 되기보다 ‘감동’으로 된다.  빌립의 “와서 보라.”는 말에 끌려 나다나엘이 오자 예수님이 그에 대해 말씀했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그 말씀은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서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예수님이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스라엘 사람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깊은 묵상을 할 때가 많았다. 결국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다는 것은 평소에 그가 진실하고 경건하게 살려고 했다는 암시를 준다.  예수님이 나다나엘의 진실한 마음을 알아주시자 묵상으로 종교심의 기초가 다져진 나다나엘이 즉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예수님을 메시야로 고백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49절).” 그 고백을 듣고 예수님은 그에게 더 큰 일을 보게 하시고 예수님의 능력자 되심을 더욱 생생하게 체험하게 하시

영향력이 있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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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명적인 삶  세례 요한은 삶의 목적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당시 그의 삶과 메시지는 신선한 충격을 주어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며 그를 메시아로 여기기도 했다. 그래서 유대 교권주의자들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그에게 보내 “네가 누구냐?”고 물었다(19절). 그때 그는 자기는 그리스도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니고 주의 길을 곧게 하려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했다(20-23절).  세례 요한은 레위 지파 후손으로 제사장 출신이었고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다. 게다가 말씀에 은혜가 넘쳐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지만 정작 그는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는 자기 신분보다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기 사명을 더 중시했고 인기가 높아졌어도 그 사명이 흔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몰려오면 그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했고 자기 제자들까지 예수님께 보내 예수님을 따르게 했다.  사명을 깨닫고 삶의 목적이 분명해지면 삶에 활력이 넘치고 자신감이 생기고 힘든 상황에서도 길을 잃지 않게 된다. 그러나 삶의 목적이 분명하지 않으면 자신감이 없어지고 나태해지고 고난과 상처가 있으면 우울해지거나 난폭해진다. 분명한 삶의 목표를 가지라. 가장 행복한 사람은 분명한 삶의 목표를 따라 사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일하실 때 하나님의 뜻에 맞는 소원을 주신다(빌 2:13). 그 소원이 사명이고 그 사명을 따라 살면 그때부터 하나님이 동행해주신다. 2. 겸손한 삶  당시 세례 요한은 사람들이 메시아로 착각할 정도로 영력과 권세와 인기가 많았지만 자신은 예수님의 신발 끈 풀 자격도 없다고 했다(27절). 유대 지역에서는 주인이 신을 벗을 때 대개 최하층 노예가 신발 끈을 풀어주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비해 자기를 최하층 노예처럼 여겼다. 또한 사람들이 자기를 찾으면 자기보다 더 귀하신 예수님께 보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가리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말씀했다(마 11:11). 내가 주님을 최대한 높여드리면 주님도 나를 최대한 높여주신다.

말씀과 하나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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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과 하나 되라 >  말씀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인격이다. 본문 앞 1절에 나오는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표현은 말씀이 살아 있는 인격임을 잘 나타낸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라는 표현도 말씀이 인격임을 잘 나타낸다. 말씀의 인격성과 능력을 믿으면 창조성과 생명력이 넘치게 된다. 왜 말씀이 역사를 일으키지 못하는가? 말씀에 대한 상투적인 태도가 문제다.  요새 교회 부흥이 어려워지면서 각종 묘안과 프로그램이 개발되어 시행되고 교회성장 세미나에는 목회자들로 넘치지만 그럴수록 더욱 말씀에 집중하라. 상투적인 말씀생활을 지양하고 깊은 묵상으로 말씀을 받으면 심령도 살아나고 교회도 살아난다. 상투적인 말씀생활은 말씀을 살아있는 인격체로 대하지 않는 것이기에 하나님도 기뻐하지 않고  말씀을 듣는 사람에게도 기쁨을 주지 못한다. 상투적인 말씀생활을 피하고 말씀과 하나 되는 삶을 살라.  참된 믿음이란 ‘말씀’과 ‘자신’이 하나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현재 자신의 삶에서 실체화시키는 것이 믿음이다. 요한복음 1장 14절을 보면 말씀이 육신을 입어 예수님이 되었다고 기록한다. 그처럼 말씀이 육신을 입어 실제 삶 속에 나타난 것이 참 믿음이다. 말씀과 하나 되면 내 안에 예수님의 형상이 나타난다. 그때 창조적인 지혜와 어떤 환경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말씀과 하나 되도록 말씀을 가까이하며 붙잡고 살라. 마귀가 낙심과 두려움을 심으려고 찾아올 때 말씀을 붙잡고 담대히 선포하라. “이 늙은 사기꾼 마귀야! 너는 나를 무너뜨리지 못한다. 예수님의 승리는 내 승리가 되었다.” 그래도 마귀는 쉽게 물러가지 않는다. 마귀는 영혼을 넘어뜨리는 전략의 천재다. 특히 에덴동산에서 하와까지 꾀어 넘어뜨린 경험이 있기에 계속 갖가지 방법을 통해 찾아와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을 넘어뜨리려고 한다. 그 사실을 깨닫고 더욱 말씀 안에 거하기를 힘쓰라.  하루의 첫 시간을 말씀과 기도로

인물의 꿈을 가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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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혼 구원에 힘쓰라 >  한때 공산주의가 짧은 기간에 지구 절반을 삼켰었다. 왜 그것이 가능했는가? 3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학습의 힘이다. 학습은 히틀러도 위대한 영도자로 믿게 만들고 잘못된 이론도 진리로 믿게 만든다. 둘째, 조직의 힘이다. 조직은 확산의 근거다. 공산주의는 두 명이 있어도 조직을 만들어 거기에 사람을 담았다. 셋째, 활동의 힘이다. 만원이 한 사람의 호주머니에 가만히 있으면 만원의 가치로만 남지만 열 사람을 거쳐서 돌면 10만원의 가치를 낳는다. 얼마나 활동하느냐에 따라 파워가 커진다. 그 활동을 공산주의에서는 ‘투쟁’이란 용어로 표현한다.  복음 전파를 위해서도 사실상 그 3가지가 필요하다. 먼저 하나님 말씀을 학습시키고 그 다음으로 조직을 만든 후 열심히 활동해야 한다. 복음의 진리 안에서 활동하면 한 사람의 힘이 크게 증폭된다. 영혼 구원을 위해 직접 전도에도 힘쓰고 자기 분야에서의 성공적인 삶을 앞세워 간접 전도에도 힘쓰라. 내 재능과 시간과 물질을 힘써 활용하라. 관심과 전략을 가지고 서두르지는 말되 시간을 아껴 영혼 구원에 투자하고 사명적인 제자를 만드는데 일조하라.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이 첫 제자를 얻는 장면을 통해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는다. 첫째, 예수님의 공생애 첫 사역은 제자 삼는 사역이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제자의 중요성을 잘 교훈한다. 주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는 교인으로 머물지 말고 늘 주님 안에 있는 신실한 성도가 되고 더 나아가 주님을 위해 활동하는 제자가 되라.  둘째, 예수님의 첫 두 제자는 원래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는 사실이다. 특히 본문 35절에 나오는 “세례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는 표현을 보면 그 두 제자는 세례 요한의 핵심 제자였을 것이다. 결국 예수님의 첫 두 제자는 예수님 말씀을 듣기 전에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좇았다. 핵심 제자를 거리낌 없이 예수님의 제자로 보내는 장면에서 세례 요한의 위대성을 깨닫게 된다.  셋째, 두 제

죄 문제부터 해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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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샛길이 더 막힐 수 있다 >  인간은 다 약하다. 강하다는 사람도 다 약하다. 어떤 스턴트맨은 나이아가라 폭포를 세 번이나 떨어져 내리고 살아서 매스컴이 ‘죽음을 정복한 사나이’라고 불렀다. 어느 날 그가 뉴욕 시내를 걷다가 꼬마가 먹다 버린 바나나 껍질에 미끄러져 뇌진탕으로 사망했다. 세상에 아무도 자기 인생을 자신할 사람은 없다. 아무리 잘 나가는 사람도 막히는 길을 만난다. 내가 잘해도 남이 막는다.  가끔 자동차 사고 때문에 도로가 꽉 막힌다. 내가 아무리 운전을 잘해도 남이 사고를 치면 내 길도 막힌다. 나이 많은 회사원들은 가끔 이런 소리를 듣는다. “아직 안 미쳤어요?” 위에서는 호시탐탐 자르려 하고 밑에서는 밀치고 올라오니 속상한 일을 많이 당한다. 그냥 다니자니 속이 썩고 안 다니자니 처자식이 운다. 앞길이 잘 안 보이니까 미치기 일보 직전이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머리 빠른 사람들은 정상적인 길로 가면 안 되는 줄 알고 요령을 피우고 샛길을 찾는다. 그처럼 너도나도 샛길을 찾으니까 나중에는 샛길이 더 막힌다.  지금 곳곳에 길이 막혀 있다. 왜 길이 막히는가? 근본 원인은 죄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기술을 개발하고 좋은 사상을 발굴해도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사람에게는 길이 없다. 공산주의도 처음에는 화려하게 등장했다. 산업혁명 후 많은 사람이 도시로 몰리며 품값이 크게 떨어졌다. 근로자는 노예처럼 일해도 살기 힘들었고 조금만 불평하면 그냥 쫓겨났다. 마르크스는 그 모습을 보며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겠다고 공산주의를 주창했다.  그렇게 출발되었기에 겉으로 보면 공산주의가 자본주의보다 더 인간미가 더 있어 보임으로 급속히 많은 사람들을 그 사상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는 경제적 불행의 근본 원인은 자본주의 때문이 아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의 죄 때문이다. 죄 문제를 처리하지 않으면 자본주의도 행복을 줄 수 없고 공산주의도 행복을 줄 수 없고 인간이 만든 어떤 종교나 윤리나 사상도 행복을 줄

말씀을 듣는 복된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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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순종하는 마음으로 들으라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은 주님의 말씀과 뜻에 지나치게 상관하지 말고 순종하라는 말씀이다. 성경은 토기가 토기장이에게 “나를 왜 이런 그릇으로 만들었느냐?”고 힐문하지 못한다고 했다(롬 9:20-21). 교회에 동냥하러 온 사람이 돈을 적게 준다고 따지고 화를 낸다면 기가 막히는 일이다. 그처럼 어떤 일로 하나님께 불평하면 하나님도 기가 막히게 여기실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이 가장 공평하게 모든 상황을 허락하셨다고 믿고 감사하고 순종해야 한다.  모든 자연만물은 하나님의 프로그램대로 철저히 순종한다. 유독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인간만이 반항한다. 만약 사람이 자연만물처럼 100% 순종하면 성경에 나오는 무수한 기적이 내 기적이 될 수 있다. 돈 유무(有無)나 배경과 인맥 유무보다 말씀에 순종하는 삶 유무가 가장 큰 축복의 관건이다. 순종한다고 당장 역사가 일어나고 상황이 바뀌지는 않을 수 있지만 순종하는 마음으로 묵묵하게 나가면 하는 일마다 있는 곳마다 복된 역사가 나타난다. 2. 증인이 되려고 들으라  사도 요한은 자신이 요한복음을 기록했으면서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24절). 그처럼 자신을 죽여야 참된 증인이 된다. 증거인 되려면 말씀을 먼저 실천하라. 어떤 사람은 성경을 읽으면서 복 받고 형통한다는 구절에 형형색색으로 밑줄을 그어 놓았다. 진짜 복을 받으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구절들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 무엇을 얻으려고 하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라. 믿는다는 것은 ‘얻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다. 얻으려고 하면 적이 많아지지만, 되려고 하면 자신만 이기면 된다. 내가 바로 되면 사는 길도 무수히 열린다.  신앙이란 ‘얻는 작업’이 아니라 ‘되는 작업’이다. 진짜 사는 길은 ‘많이 얻는 삶’에 있지 않고 말씀을 따라 ‘바로 되는 삶’에 있다. 내 뜻을 포기하고 말씀대로 살면 가장 복된 인생이 되지만